
국회본청, 아수라장 속의 처연함
기자가 국회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30분경.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냅다 정문을 향해 뛰었었다. 국회 앞 도로는 이미 전투경찰과 전경버스가 진을 치고 있었고, 국회 정문에는 검문검색을 하는 경찰이 따로 배치되어 있었다. 기자와 국회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시40분 국회 본청 정문. 비준안을 통과시킨 한나라당 의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취재진과 경찰 그리고 각 당 당직자들이 엉켜 몹시 소란스러웠다. 야당 당직자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한나라당 의원들을 비난했다. “한미FTA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역사가 두렵지 않은가”, “당신들은 꼭 심판 받을 것이다”, “날치기는 무효다” 간간이 욕설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 본청을 빠져나갔다. 개중에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이도 보였다.
본회의장 앞 로비는 취재진들과 야당 당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타사 기자들에게 이전 상황을 물었다. 기자들도 분개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이 본회장을 봉쇄한 채 기습 통과시켜 취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비준안 통과 직전, 민주노동당 당직자가 본회의장 4층 방청석 문을 뜯어 간신히 입장할 수 있었다고.
문고리가 파손된 문을 지나 방청석으로 들어섰다. 상황이 종료된 본회의장에는 적막과 처연함이 가득했다. 앞서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최루탄을 터트린 탓에 본회의장에는 매캐한 냄새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그 처연함과 매캐함 속에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의장석 앞 공간에 걸터앉아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6시 10분경 본회의장 앞 로비에서 야당대표 및 의원들의 간단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들은 침통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나라당의 강행처리를 막아내지 못한 데 대해 국민들게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또한 ‘한미FTA 비준안 날치기 통과’를 선언하며 범여권에 대한 정면투쟁을 다짐하기도 했다.
여의도 산업은행에서 명동까지
오후 7시, 국회에서 약 500여 미터 떨어진 산업은행 앞에서는 한미FTA 기습 강행처리를 규탄하는

이어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트린 후 경위들에게 끌려나갔던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무대 위에 등장해 큰 환호성을 받았다. 마이크를 잡은 김 의원은 울부짖는 목소리로 “망국적 한미FTA를 막지 못해 참으로 죄송하다”며 “최루탄이 아닌 폭탄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외쳤다. 이어 김 의원은 “앞으로 시민 여러분과 함께 한미FTA가 폐기되는 그날까지 싸우겠다”고 결의를 내비치기도 했다. 민주노총 정희성 부위원장 발언을 끝으로 약 40여 분 만에 여의도 집회는 마무리 되었으며, 시위대는 약 1시간 후인 오후 8시30분 명동에서 집결하기로 약속하고 자진해산했다.

8시40분, 명동 아바타몰 앞. 지하철과 버스 등을 이용해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손마다 한미FTA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피켓과 깃발을 쥐고 있었다. 처음에는 쇼핑을 나온 인파에 섞여 구분할 수 없었지만, 범국본 관계자의 “비준무효, 명박퇴진” 구호가 울려퍼지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약 3,000여 명의 시위대는 약 10분가량 명동 아바타몰 앞에서 구호를 외치며 인원을 모은 후 명동성당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명동성당 인근에 도착한 시위대는 인근의 왕복 8차선 도로 중 4차선을 점거하며 종로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했다. 이에 경찰은 물대포 2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향해 약 7차례에 걸쳐 살수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13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 10시경 경찰이 차도에 내려와 있던 시위대를 대부분 인도로 밀어냄으로써 도로통행을 재개했다. 시위대는 명동성당 방향과 반대평 등으로 흩어졌으며, 상당수가 모인 명동성당 방향 인도에서는 약 2,000여 명의 사람들이 11시30분경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소형앰프차가 동원된 정리집회에서는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많은 시민들이 한미FTA 날치기 통과에 대해 분노를 토로했다. 특히 강화도에서 뉴스를 보고 왔다는 두 여고생의 자유발언은 가장 큰 박수를 이끌어냈다. 양 아무개, 원 아무개 양은 “한미FTA가 날치기 통과됐다는 소식에 강화도에서 왔다”며 “지금까지는 어른 뒤에서 사회 문제가 흘러가는 것을 지켜봤지만, 이젠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앳된 목소리를 목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살려 주세요”라고 외쳐, 큰 박수를 받았다. 시위대는 자정 전에 집회를 마치고 자진해산했으며, 이후 개별적인 충돌은 없었다. 한편 이날 경찰은 72개 중대 총5,000여 명의 경찰병력이 투입했다.
물대포 직접 맞아보니, “진짜 살인적이네”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시작돼 명동대로에서 마무리된 이날 시위는 대체로

문제는 명동 아바타몰을 넘어 명동성당 부근에서 도로를 점거한 이후에 발생했다. 종로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살수차) 2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던 것. 경찰은 약 5회에 걸쳐 경고방송을 한 뒤 물대포를 발사해 시위대를 인도 위로 밀어 붙였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물을 흠뻑 뒤집어 써야했다.
많은 시민들이 쏟아지는 물세례를 몸으로 받아내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이들을 향해 직사포를 발사하기도 했는데, 이에 맞아 뒤로 나동그라지는 시민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본 기자 역시 경찰과 시위대 사이를 오가며 취재를 하던 중 2차례에 걸쳐 물대포를 맞았다. 한 번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였고, 두 번째는 앞서 이야기했던 직사포였다.
밤이 늦어 기온이 영하에 가까운 날씨여서 그냥 물을 뒤집어 쓴 것만으로도

이날 이후에도 한미FTA를 반대하는 집회 및 시위가 연일 이어졌는데, 경찰은 물대포를 동원해 시위진압 및 해산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다음날이었던 23일, 서울광장에서 펼쳐진 같은 시위에서 경찰이 퇴로를 열어주지 않은 채 물대포를 발사해 다수의 시민들이 저체온증 등 심각한 신체적 충격을 받아야 했다. 더구나 이날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영하의 수은주를 기록해 물대포를 맞은 사람들의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에 이르렀다.
이르게 찾아온 초겨울 날씨에 물대포를 동원해 집회를 진압하는 경찰의 행태를 두고 여러 시민들은 과잉진압이라며 경찰을 비난하고 나섰다. 실제 본 기자가 취재했던 22일 시위의 경우 시위 막바지에 사람들이 모두 명동성당 방향의 인도로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인도에 있는 시민들을 향해 약 5분 넘게 직사포를 발사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맞은 직사포의 후유증은 약 일주일 동안이나 기자를 괴롭혔다. 등에는 멍이 들었으며, 허리통증으로 한 동안 보행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기자들을 향해 야유하던 시민들
이날 시위는 피켓과 구호, 그리고 함성으로만 진행되었지만, 분위기만은 매우 격앙되

이날 시위현장에는 공중파를 비롯한 다수의 언론매체들의 취재경쟁이 뜨거웠는데, 그런 기자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거나, 취재수첩을 들고 있는 기자들을 향해 집회장에서 나가줄 것을 요청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한 공중파 방송사는 한 중년여성의 강력한 항의를 듣고 철수해야 했으며, 케이블 뉴스전문 채널은 여의도 산업은행 앞 집회장 바로 옆에 중계차량을 주차했다가 다수의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역시 철수해야 했다.
시민들은 “제대로 보도도 하지 않을 거면서 취재는 왜 하느냐”고 항의하며 취재를 거절했다. 특히 보수성향의 언론사의 경우 다수의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야유를 들으며 쫓겨나야했다. 본 기자 역시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와 취재수첩 때문에 기사신분이 들통 나 한 동안 집회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떠한 폭력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본 기자는 시민들의 야유와 조롱이 더욱 더 아팠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깊은 혐오와 불신을 낳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집회장에서 쫓겨난 기자들은 대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나 무대 뒤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들 침통한 표정이었다.

이후 대부분의 취재인력들은 기자냄새(?)를 최소화 하여 다시 취재에 돌입했다. 본 기자는 목에 걸고 있던 기자증을 벗었으며, 플래시가 달린 전문가용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작은 디지털 카메라로 현장사진을 찍으며 취재를 이어나갔다. 방송사의 경우 원거리에서 촬영을 하거나, 전화로 리포팅을 하기도 했다.
시민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직접 듣고 싶었지만, 그날만은 감히 인터뷰를 요청할 면목도 용기도 솟아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