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대체론에 100조원 규모 황금시장 선점 치열
앞으로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퇴직금이 기존의 일시불 지급 방식이 아닌 연금제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퇴직 근로자들의 안정적인 소득재원 확충은 물론, 노후생활 보장을 위해 그동안 일시불 형식으로 지급했던 퇴직금을 연금형식으로 전환하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시행령’을 의결할 예정이다. 도입초기 규모만 30조원. 은행, 보험, 증권등 금융권은 우리나라에서는 새로 열리는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물밑 경쟁에 돌입했다. 핫머니로 떠오르는 퇴직연금으로 인한 금융계의 변화와 퇴직연금의 문제점 등을 폭넓게 짚어보도록 한다.
퇴직연금이란
퇴직연금은 기업이 매년 근로자의 한달치 월급을 금융회사에 맡긴 뒤 운용성과를 기반으로 퇴직금을 확보하는 제도다. 기존 퇴직금제로 인해 기업이 부도를 내거나 파업을 하는 과정에서 근로자의 노후를 불안하게 만든 사례가 빈발하면서 퇴직연금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크게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으로 나뉜다. DB형은 근로자의 연금 급여가 사전에 확정되며 회사의 적립금 부담 규모가 연금 운용 결과에 따라 변동되는 방식이다. 임금인상률과 기금운용수익률 등 연금액 산정 요인이 달라질 경우 이를 사용자가 전적으로 부담한다. 반면 DC형은 회사측 부담금이 사전에 확정되고 연금지급 규모가 적립금 운용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제도이다. 사용자의 부담금액이 사전에 확정되고 근로자의 연금급여는 적립금 운용수익에 따라 변동된다. 운용에 따른 책임과 수혜가 근로자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DB형은 기존의 퇴직보험에 가깝고 DC형은 적립식 펀드와 유사한 상품이다. 기업이 망했더라도 떼일 염려는 거의 없다. DB형의 경우에는 그 전까지 적립된 금액은 보장하고 회사가 납입하지 않은 금액은 정부가 최대 3년치까지 대납해준다. DC형은 떼일 염려가 전혀 없다. 퇴직연금제는 근로자의 노후 보장을 위해 기업이 단독으로 혹은 근로자와 공동으로 조성한 돈을 투신, 보험 등에 위탁 운용해 근로자가 퇴직할 때 연금이나 일시불로 지급하는 제도다. 기업은 현행 퇴직금제나 퇴직연금제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매월 일정액의 퇴직 적립금을 특정 금융기관에 적립, 10년 이상 가입하면 만 55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으며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 두 종류가 있다. 확정급여형은 근로자가 받을 연금액이 사전에 확정되며 적립금의 일부는 사외에, 일부는 사내에 운용되는 방식이다. 확정기여형은 근로자가 받을 퇴직급여가 적립금 운용실적에 따라 변동되는 것으로 적립금을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므로 운용수익에 따라 연금 급여액이 달라질 수 있다.
시행령은 근로자가 적립금을 중도인출 하기위한 조건을 ▲무주택 가입자가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 ▲퇴직연금 가입자 또는 부양가족이 6개월 이상 요양하는 경우로 제한하기로 했다. 또 적립금의 안정적인 운용을 위해 운용방법을 금융감독위원회가 지정하는 유가증권에 한정토록 했으며, 확정기여형의 경우 위험자산 투자로 인한 적립금 손실 방지를 위해 금감위가 위험자산별 투자한도를 정하도록 했다.
이밖에 주민등록에 관한 각종 신고를 배우자나 직계혈족도 가능토록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과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확충을 위한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도 의결할 예정이다.
은행, 보험, 증권 등 물밑경쟁 돌입
불과 석달후면 시작될 퇴직연금으로 금융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도입초기 규모만 30조원. 은행, 보험, 증권등 금융권은 우리나라에서는 새로 열리는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물밑 경쟁에 돌입했다. 퇴직연금을 둘러싼 각축의 결과에 따라 성장과 도태가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에는 새로운 현금창출을 키울 수 있는 기회다.
이 제도가 잘만 정착되면 사용자와 근로자들은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불안하기만 한 퇴직금 대신 노후를 맡길 수 있는 연금을 하나 더 갖게 된다. 국민연금이 거의 유일할 정도로 취약한 사회보장시스템의 기반도 강화되는 효과도 있다.
대부분 전문가들이 현행 퇴직금제도가 그대로 존속되는 것을 이유로 초기시장이 세간의 기대보다는 작을 것으로 분석하지만, 절대규모 자체가 워낙 커 금융상품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각계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초기 퇴직연금시장 규모는 20조원 내외, 10년후인 2015년경에는 100~200조원 규모로 급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당장 올해 말이나 내년 초 금융상품 신규수요도 20조원은 족히 되는데다 초기시장을 선점할 경우 향후 금싸라기 금융상품시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 제도의 도입이 향후 국내 금융상품시장의 판도를 좌지우지 할만큼 영향력이 대단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국내 금융상품시장은 각 업권이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구분돼 있지만 퇴직연금제도가 시행되면 이같은 업권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은행, 보험, 증권 등 퇴직연금 운용관리기관이 자기 업권의 금융상품 뿐만 아니라 타 업권의 금융상품까지 운용방법으로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전문가들은 제도 도입 초기단계의 경우 주로 운용관리를 맡은 금융회사의 계열 금융상품이나 원금이 보전되는 은행, 보험사 상품이 선호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투신권 펀드나 보험사 변액보험 등 실적배당상품은 퇴직연금제도가 안정권에 접어들고 운용실적이 우수한 상품에 대한 자발적인 재평가가 내려지기까지 수요 유발에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채권의 경우 부도위험이 없으면서 만기가 5~10년 이상으로 긴 국공채, 금융채 등에 대한 만기 보유목적 수요가 만성적 초과상태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장기 국공채·금융채는 발행되기가 무섭게 국민연금, 보험사 등 주요 기관투자자들의 선점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퇴직연금제도가 시행되면 또 하나의 강력한 장기채 수요자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퇴직연금제도 특히 확정기여형(DC) 통해 주식시장으로 유입될 수 있는 자금의 규모는 크지 않을 전망이다. 확정된 법시행령상 가장 공격적인 퇴직연금 포트폴리오를 짜더라도 적립금의 40% 이상을 주식간접상품에 투자할 수 없다. 펀드상품과 더불어 은행예적금상품, 보험상품 등을 적절한 비율로 분산투자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볼 때 퇴직연금 적립금의 주식간접투자 비중은 10%내외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퇴직연금제도는 금융권역간 경계를 급격히 허무는 한편 은행 및 보험권을 중심으로 퇴직연금사업을 위한 수직계열화 작업이 가속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제도의 핵심인 운용관리기관과 자산관리기관은 물론 상품제공, 기록관리, 컨설팅까지 계열사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풀라인업을 갖추기 위해 인수합병이나 외국사 등과의 전략적 제휴 움직임이 활발해질 전망이다.
은행권, 마케팅 역량 집중
은행권은 운용관리기관과 자산관리기관의 업무를 동시 수행하고자 한다. 상품 제공분야에 있어서는 독자행보보다는 자산운용에 전문성을 가진 자산운용사와 파트너로 마케팅할 가능성이 높다.
증권사들의 경우 운용 및 포트폴리오 구성능력 등 경험에 의한 노하우에 대한 자신감으로 운용관리부문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보고 있는 반면 은행권은 상품 제공과 포트폴리오 구성에 대해 자산운용사에서 먼저 제공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부상하고 있다. 운용관리기관으로서 은행권의 상품 구성은 보험상품보다는 예금과 안전한 간접투자상품 위주로 구성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간접투자상품의 경우 국내 자산운용사 상품은 대부분 단기성이기 때문에 비교적 성공적인 퇴직연금제도를 수행해 온 외국계 자산운용사와의 국내 은행권의 제휴 가능성도 점쳐진다.퇴직연금제도에 있어 은행권의 가장 큰 강점은 오랜 기업여신업무로 인해 거래 기업들에 대한 영향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초기시장에서 DC형보다는 DB형(확정급부형)이 주류가 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고, DB형은 상대적으로 상품 구성에 있어 근로자보다는 사업주의 결정권한이 크기 때문에 기존 거래기업을 상대로 한 은행권의 마케팅이 한층 수월할 수 있단 얘기다.
은행권의 기록관리(R/K)시스템은 은행 공용으로 금융결제원이 개발을 준비 중에 있지만 시스템 구축 진전은 예상보다 크게 더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은행은 자체적으로 R/K시스템을 개발 중에 있다. 은행권이 제시 가능한 상품으로는 지수연동예금(ELD)를 포함한 예적금이 가장 유력하게 보고 있다. MMDA나 CD 등 단기성 상품은 연금상품 구성에 있어 경쟁력이 없을 것으로 은행권은 판단하고 있다.
보험권 풀라인업 서비스 체제 구축
보험사들의 가장 큰 강점은 이미 퇴직연금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 있다는 점이다. 보험권은 지난 1998년 4월부터 퇴직보험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전체 퇴직보험신탁시장에서 보험사 시장점유율이 80%를 차지하고 있다. 은행의 퇴직신탁은 20%에 불과하다.
보험사의 경우 기존 퇴직보험 가입기업에 대해서는 기존의 거래관계를 유지토록 할 것이며, 퇴직보험 유예기한인 2010년 이후에는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는 대대적인 마케팅이 예상된다. 외국 보험회사의 경우 재무설계사(FC)를 이용, 근로자 개개인에 대한 1대 1 연금설계서비스를 기업들에게 제안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럴 경우 기업이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어져 외국계 보험사 돌풍이 불어닥칠 가능성이 배제할 수 없다.
최근 보험사들의 퇴직연금 준비 동향은 한마디로 원스톱 일괄서비스 체제를 갖추는데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기존 퇴직보험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영업력과 보험 계리업무의 노하우를 제도 컨설팅에 접목시켜 영업상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려고 시도할 것이다.특히 생명보험사 빅3의 경우 자체적으로 R/K 시스템 개발을 서두르고 있어 퇴직연금 사업 전반에 걸친 업무를 모두 수행하기 위한 인적 물적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험사의 상품구성도 가장 구색을 맞추기 좋은 구조다. 보험권이 제시할 만 상품은 기존 주력 상품인 GIC를 비롯, 퇴직보험, 금리연동형, 금리확정형 및 변액보험 등이 제도 시행에 맞춰 출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보험사가 신탁업에까지 진출할 경우 퇴직연금구조의 전 사업영역을 아우를 수 있어 시장에 대한 지배력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변액보험의 운용을 자산운용사에 투자일임 형태로 아웃소싱하고 있는 추세는 퇴직연금제도 시행 후에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보여 자산운용사들의 일임자문 운용규모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커 보인다.
증권 및 투신권, 수혜 예상
증권회사들은 상품 운용에 관한 한 은행이나 보험권에 비해 한발 앞서 있는 점이 강점이다. 하지만 보수적인 퇴직연금의 성격상 증권사가 높은 비중을 차지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증권사가 제시할만한 상품으로는 주식바스켓, RP, 증권사 자체발행 장외파생상품 등이다. 증권사가 자체로 조달하기 곤란한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경우 해당 증권사의 계열사 상품이 제시되겠지만 은행계나 보험계열이 아니 독립 증권사의 경우 상품 풀라인업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DB시장의 경우 의외로 주식 위탁매매 부분이 강세를 보일 수도 있다. DC와 달리 DB형은 근로자의 급여수준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미리 정해진 급여수준 이상의 수익은 회사의 수익으로 잡힐 수 있어 사업주가 주식과 같은 위험자산에 투자할 유인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확정된 법 시행령에는 DC형과 달리 DB형에서는 사업주가 주식에 직접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외 증권사가 DB시장에서 제시할 만한 상품은 회사채 등 채권과 랩어카운트, RP, ELS, 혼합형 수익증권 등이 유력하다.
투신권은 연금의 운용관리업무보다는 각 권역의 상품 운용 아웃소싱 물량 증가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현재 운용하고 있는 상품의 대부분이 제시 가능하지만 시행령상 40% 위험자산 운용비중 제한으로 인해 주식형펀드(주식 편입비중 40% 이상)는 불가하다.
그외 선박펀드, 부동산펀드, 실물펀드 등 상대적으로 안전하면서 은행 금리 이상의 고수익이 기대되는 대안투자상품들이 큰 각광을 받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 상품운용에 특화한 전문 자산운용사들의 설립이나 변신 움직임이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퇴직연금 문제점은 없나
금융기관들이 흥분하고 주식투자자들이 가슴을 설레는 이유는 이 퇴직연금시장의 크기에 있다. 시장규모는 얼마나 될까. 각 기관별로 다르지만 낮게 잡아도 내년 20조원, 2010년 50조원 내외는 될 것이란 관측이다.
증권연구원은 퇴직연금 전환이 점진적으로 이뤄질 경우 내년 12조원, 2015년 189조원의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보험개발원은 초기 시장을 더욱 긍정적으로 봤다. 내년도 퇴직연금 시장규모를 30조원, 2010년 50조원으로 내다봤다. 이 정도면 누구나 군침이 돌만하다. 하지만 낙관만은 할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풀어야 할 과제가 아직도 산적해 있다. 이 때문에 각 기관들의 예측이 빗나갈 가능성도 높다. 현재로선 누구도 시장 규모가 어느 정도로 형성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회의론도 나온다. 무엇보다 불확실성이 회의론을 키우는 가장 큰 요인이다.
노동부는 퇴직연금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확정 발표하지도 못했고 재경부는 세제혜택을 어느 선까지 줘야할지 고민 중에 있다. 금감원의 감독규정도 시행규칙이 확정된 후 나올 예정이다. 일부에서는 퇴직금제와 퇴직연금제가 노사 선택사항으로 공존하는 상황인 점을 감안할 때 퇴직연금의 초기 시장 활성화는 힘들 것이란 지적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