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식계(服飾界)의 이단아, 철학을 의상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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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계(服飾界)의 이단아, 철학을 의상에 담다
  • 취재_정설진 기자
  • 승인 2011.11.0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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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 준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에스더 리’의 이현경 대표를 만났다. 이 대표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은 25년 경력의 ‘옷 쟁이’란다. 1층에는 한복, 패션한복, 파티웨어 등 다양한 의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그간 익숙하게 보아 온 조선시대의 은근하고 우아한 한복과는 다른 괘를 취하고 있었다. 눈을 강렬히 자극하는 색채, 치마폭이 도화지라도 되는 양 꽉 채워진 그림들은 이 대표가 단순 ‘옷 쟁이’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2층의 고풍스런 농 안에 나란히 숨겨져 있던 100여 점의 작품은 더욱 놀라웠다. 금관벽화, 구름 당초, 능선, 색동, 흔적, 일월오악도 같은 이름의 명품 한복들. 고구려 고분 벽화를 큐비즘적(입체적)으로 원단에 구현한 작품에서부터 백제미술의 온화함을 표현한 디자인, 우주의 원리인 태극, 비룡과 봉황 등이 원단 속에서 세상으로의 출정을 기다리는 듯했다. 이즈음에서 복식계의 이단아, 이현경 대표의 철학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더 리’는 민족기업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재학시절, 염색기법을 가르쳐 준 스승인 故백태호 교수는 이현경 대표의 앞길을 제시해 주었다. ‘앞으로 복식업계에 위기가 닥칠 것이므로 네가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는 스승의 혜안에 이 대표는 남다른 사명감, 한국 것을 지켜내겠다는 마음으로 졸업 후 복식계에 뛰어들었다. 기존 한복이 대부분 조선시대 풍이었다면 이 대표는 저기 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고증이 가능한 시대인 고구려부터 백제, 신라, 고려, 조선,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에 그의 디자인이 맞춰져있다. 한국의 문화와 철학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여장부 스타일의 그의 모습과 말에서 민족사관의 향이 피어났다.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레 민족주의 성향이 생겼을 성 싶지만 그의 민족주의 성향은 다분히 DNA속에 내재된 것이라고 했다. 사재를 털어 조국의 광복을 열망한 독립운동가 조부, 경찰공무원이던 부친. 이들의 피가 고스란히 이 대표의 혈관을 따라 흐르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 그다.

한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옷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디자이너 이현경과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처럼 보인다.
“‘에스더 리’는 옷을 통해 역사를 쓰고 있어요. 그래서 민족기업입니다. 보통 디자이너들은 복식의 실루엣(윤곽, 외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러나 저는 실루엣만 가지고 전쟁하지 않을 겁니다. 제 옷에는 그 시대의 철학이 담겨 있어요. 한민족 각 왕조마다의 특징을 뽑아 의상에 구현해 내고 있습니다.”

그의 손을 거친 의상에 고대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오는 한민족의 문화와 철학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단순 실루엣과 스킬이 아닌 의상에 담긴 한민족의 정신을 보여주겠다는 당찬 민족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복은 시대의 철학’이라는 그의 인식이 ‘에스더 리’는 민족기업이다’라는 그의 말과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철학을 옷에 접목해 역사를 쓰다
의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색채심리, 한복문양디자인, 염색 기법, 의상학 등을 고루 익혔다. 한복과 양장을 두루 섭렵한, 그야말로 복식계의 전문가이다. 2003년 이현경 대표는 유럽판 보그지에 세계적 유망 디자이너로 선정, 아시안 룩의 대표주자로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 우크라이나 유쉔코 대통령 영부인 및 국회의원, 다수의 국빈 의상 제작을 통해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디자이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무대는 국내가 아니다. 유럽과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사절단으로서 한국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패션쇼가 끝난 후 피날레에도 별로 얼굴을 비치지 않는 그다. 그 자신보다 ‘에스더 리’라는 회사가 더 알려지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마찬가지로 국제무대에서는 회사보다 한국을 알리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말하는 그다. 이러한 그가 한국의 사절단으로서 어떤 한국적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까.

이 대표는 ‘도전과 응전’의 관점에서 한민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그의 걸작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쉼 없이 이어온 도전과 응전의 역사는 거기에 걸맞은 역량을 갖추지 못한 민족과 국가는 도태되지만 수많은 아픔 속에서도 도전과 응전의 저력을 보인 민족과 국가는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이다. 대륙과 해양으로부터의 수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불꽃같은 민족혼으로 일어나 새로운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만들었던 우리 한민족이야말로 토인비 박사의 이론을 방증하는 민족인 셈이다. 이 대표는 이 지점에서 방점을 놓는다. 이렇듯 위대한 한민족이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민족혼과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매개체가 옷인 것이다. 이 옷을 통해 ‘한민족 옷의 원류는 바로 이런 것이다’라며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더 나아가 옷에 담긴 한민족의 철학을 외치고 싶은 것이다.

그의 꿈만큼 할 일도 많다. 앞으로 연구소를 만들어 후계자를 키우겠다는 이 대표. 한국 디자이너들의 감각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감각이 뛰어나다고 믿는 그다. 그들을 키워내는 교육자로서의 책임감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세상 빛을 기다리고 있는 각 왕조별 작품에 대한 고증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것을 모아 책으로 엮어 역사서로 활용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세계 TOP디자이너가 목표”라며 자신의 포부를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요즘 전 세계적인 K-POP 열풍에 이 대표의 의상이 장착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드러냈다.

철학을 옷에 접목해 역사를 쓰는 디자이너 이현경 대표. 털털하면서도 솔직한 여장부의 면모와 한민족혼을 장착한 세계 정상으로의 확고한 목표가 요원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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