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의 비극이 낳은 KAL기 폭발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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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의 비극이 낳은 KAL기 폭발 테러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1.11.0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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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친필지령…비행 중 폭발로 115명 전원 사망

분단의 비극이 테러라는 이름하에 115명의 사망자를 냈다. 1987년 11월29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떠나 서울로 향하던 명을 태운 대한항공 858 여객기가 공중에서 폭발하며 추락한 것이다. 당시 사건 조사 결과 북한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고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폭발물(PLX)에 의해 폭파되었음이 밝혀졌다.

[1987년 11월29일] KAL기 폭발, 115명 사망
1987년 11월29일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떠나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 여객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갑자기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다. 당시 기내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해외근로자가 대부분인 한국승객 93명과 외국승객 2명, 그리고 승무원 20명 등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는 29일 오후 2시경 미얀마의 뱅골만 상공에서의 무선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사건발생 15일 만인 12월13일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공기주입펌프 등이 파손된 KAL기 구명보트 등 부유물 7점이 발견됨으로써 비행 중 폭발에 의해 추락했음이 확인되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이듬해인 1988년 1월15일, 한 달 반 동안의 수사 결과를 공식 발표한다. KAL기는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고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폭발물(PLX)에 의해 폭파되었음이 밝혀졌다.
김현희는 기자회견에서 바레인 공항에서 음독자살한 김승일과 자신은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소속 특수공작원이라고 말했다. 폭파범들은 1984년부터 3년 7개월 동안 언어교육과 폭파훈련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현희는 바그다드공항에서 서울행 KAL858기에 시한폭탄을 갖고 탑승한 뒤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드에서 비행기 선반에 시한폭탄을 놓고 내렸다고 밝혔다. 폭파범들은 범행 이틀 뒤 바레인 당국의 조사를 받다가 음독자살을 기도했지만 김승일은 사망하고 김현희는 의식을 되찾았다. 
KAL기 폭파사건으로 국내외에서는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비난의 여론이 들끊었고 남북관계는 악화됐다. 미국은 즉각 북한을 테러국가로 규정해 각종 제재를 가하였고, 일본도 북한공무원의 입국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으로 북한은 국제무대에서 외교적 불이익을 자초하는 결과를 감수해야 했다.
한편 김현희는 한국 정부의 보호하에 압류되어 있다가 1990년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한국에 전향, 대통령 특사로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조사과정과 김현희의 증언 등에 의혹이 제기되어왔으며, KAL기 사고 희생자 가족들은 전면 재조사를 주장하고 있다.

[1970년 11월13일] 스물 두 살의 노동자 전태일 분신
전태일은 1948년 8월26일 대구의 한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1954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1960년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였으나, 같은 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학교를 중퇴하고 이때부터 동생과 함께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1965년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기술을 바탕으로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보조로 취업해 하루 14시간씩 힘겨운 노동을 하고 일당으로 당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받았다. 이듬해 직장을 옮겨 미싱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렵 함께 일하던 여공이 직업병으로 인해 폐렴 3기 진단을 받고 강제 해고되는 등 사업주의 노동착취와 비인간적인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전태일은 여공들의 어려운 일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968년 노동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 법의 내용을 이해한 뒤, 이때부터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6월 드디어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고 회원들과 평화시장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설문을 통해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나고 평화시장에서도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전태일은 한동안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1970년 9월 평화시장의 노동환경 개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켜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노동실태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를 수합하고,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노동조건 개선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평화시장 근로개선 운동에 나서, 10월8일 2명의 동료와 함께 평화시장(주) 관리사무실을 찾아가 사업주 대표들과 임금·노동시간·노동환경의 개선,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해줄 것 등을 협의한다. 이즈음 정부의 태도도 바뀌어 회유를 통해 일을 무마하려는 쪽으로 돌아섰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약속을 하였으나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분신사건 당일인 11월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火刑式)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를 준비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평화시장 주변에는 시위 소식을 들은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경찰들은 평화시장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주위를 향해 소리 높여 그들의 요구를 외쳤으나 플래카드를 경찰에게 빼앗기고, 시위 역시 경찰의 방해로 무위로 끝나갈 즈음, 전태일은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리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70년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만 전국에서 2,500여 개에 달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두가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에 자극을 받아 출현했다.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 화해의 장벽으로
1989년 11월9일, 동서냉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당시 동독의 동베를린 지역 책임자 귄터 샤보브스키는 “동독시민은 외국으로 여행해도 좋고 여권은 즉시 발급될 것”이라며 베를린 장벽을 비롯해 동독의 모든 국경을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국경이 개방되자 수백 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과 서베를린을 방문했다. 베를린의 브란텐부르크문은 연일 역사의 현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볐으며 동서냉전 완화에 크게 기여했던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도 브란텐부르크문을 방문했다. 베를린 장벽 개방과 함께 동독의 개혁은 더욱 가속화된다.
독일에 냉전의 상징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건 1945년 5월8일 나치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해 2월에 있었던 미국·영국·소련의 3국 정상 얄타회담에서 이미 독일의 처리방법을 결정한 대로 프랑스까지 합하여 4개국이 분할 점령해 최고통치권을 이어받았고, 동독 안에 있는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 점거하게 되었다. 이 분할 독일에 대한 처리방침은 그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수뇌회담에서 나온 ‘포츠담선언’으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에 당분간은 중앙 정부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정치·경제적 통일성의 유지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非)나치화, 즉 민주화에 있어서는 4개국이 제각각 그 해석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점령지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1946년 12월 미·영 양국의 점령지구가 경제적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동서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그것이 베를린봉쇄 이후 최대 현안이 된 ‘독일문제’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후 ‘독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종종 열렸으나, 사사건건 미국과 소련측의 의견이 대립하여 충돌함으로써 1947년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고, 이듬해 소련측이 독일관리이사회에서 탈퇴함에 따라 그 기능도 정지되고 말았다.
이후 동·서독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되자 동독에서 서독으로 월경해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동독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에 이르는 길고도 두꺼운 콘크리트 담장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동서 냉전의 상징물이 됐다.
그 후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독일분단 44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28년 만에 분단의 현장 베를린 장벽은 개혁과 개방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11개월 뒤인 1990년 10월3일 독일은 역사적인 통일을 달성, 이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졌다.

[1968년 11월21일] 주민등록증 발급 시작
1968년 11월21일 우리나라 행정사상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이 발급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민등록증을 받아들고 주민등록증은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증명해 준다고 말했다.
1962년5월10일 주민등록법이 공포됨으로써 주민등록 제도의 첫 윤곽이 드러났으나 이후 몇 년이 지나도록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21일 청와대를 급습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지면서 박정희 정권은 주민등록법 개정을 서둘렀다. 주민의 동태를 파악하고 남파 간첩 등의 불온분자 색출이 용이하도록 모든 국민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한다는 내용의 개정안이었다. 1968년 5월10일 통과된 1차 개정안은 주민등록 제도의 양대 축을 이루는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입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11월21일부터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 발급되면서 시민증과 도민증은 폐지되었다. 주민등록번호는 주민등록증 발급과 함께 각 개인에게 부여되었다. 번호는 앞 뒤 6자리씩 모두 12자리로 구성, 주민등록증에는 전국민에게 영구적인 고유번호와 주거지에 대한 기록이 명시돼 있어 행정의 능률화를 이룰 수 있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10101-100001,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110101-200002를 부여받았다. 앞 숫자 6자리는 지역, 뒷 숫자 6자리는 개인 번호였다. 현재의 13자리 숫자 체제는 1975년부터 바뀌였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현재의 주민등록증이 위·변조가 쉬워 범죄에 악용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주민등록번호 등 민감한 개인정보가 표면에 직접 노출돼 개인정보 유출, 오남용 등 침해가 있어 오는 2013년부터 5년에 걸쳐 연차적으로 전자주민등록증을 발급할 계획이다. 전자주민등록증은 표면에 성명, 생년월일, 성별, 사진 등 기본사항만 기재하고 주민등록번호, 지문 등 민감한 정보는 IC칩에 위·변조 식별 보안장치를 내장하게 된다.

[1917년 11월7일] ‘러시아 혁명’ 발발
일반적으로는 1905년의 제1차 러시아혁명과 1917년의 3월 혁명(구력 2월)을 포함하는 러시아의 사회변력 혁명을 일컫는다. 1905년부터 1907년의 혁명을 소련에서는 제1차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였으며 1917년 3월(구력 2월)과 11월(구력10월)의 혁명을 소련에서는 전자를 ‘2월 혁명’ 또는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후자를 대(大)10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하였다. 1905년부터 시작된 러시아 혁명이 불길이 1917년 11월7일 절정에 이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2월22일, 러시아의 수도 페프로그라드에서는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빵 배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배급품은 떨어지고 없다는 사실을 알자 굶주림과 분노에 사로잡힌 이들은 빵가게, 식료품점을 습격했다. 대부분 여성들인 이들은 가난한 병사의 아내, 그리고 여공들이었다. 이날은 10만 여 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여했고 다음날인 2월24일엔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2월25일, 총 파업이 일어났다. 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하자 황제 니콜라스 2세는 내일까지 모든 환란을 정지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시위대는 자꾸 불어나기만 했다. 그러나 시위대에 가담한 사람들이 대부분 병사들의 가족들이었던 탓에 진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2월27일 마침내 병사들은 총부리를 장교들에게로 돌렸다. 병사들과 함께 동궁으로 몰려간 시위대는 동궁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깃발을 꽂았다. 당시 시위를 주도한 병사와 노동자들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를 결성, 병사는 1개 중대당 1명, 노동자는 1,000명당 1명 씩 대표를 선출했다.
한편 의회는 혁명의 급진화를 막기 위해 황제를 퇴위시키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300여 년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했다. 이것이 3월 혁명이다. 그리고 4월3일 1917년 2월 혁명 직후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국적으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님의 소비에이트공화국이었다. 볼셰비키의 지도자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으로 뛰어난 조직력과 지도력으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혁명임시정부인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레닌은 밖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전국이었던 독일에 대해 휴전을 선포하고 안으로는 대대적인 사회주의 개혁정책을 폈다. 11월7일(구력 10월25일) 새벽, 적위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시가를 재빨리 장악했다. 그리고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1,000여 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그날 밤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는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노동자와 농님의 정부인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레닌이 의장, 트로츠키가 외무위원, 루이코프가 내무위원, 스탈린이 민족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국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식민지의 민족해방 운동을 부추기기도 했던 러시아 혁명. 이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결국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20세기 공산권과 자본주의권의 대립이라는 세계의 큰 틀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11월 혁명 ‘볼세비키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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