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정치의 균열, 시민사회세력의 정치권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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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정치의 균열, 시민사회세력의 정치권 진입
  • 정대근 기자
  • 승인 2011.11.0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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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정치권의 한계 넘어 대안세력이 될 수 있을지가 관건

지난 10월26일 치러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권단일후보로 나선 시민운동가 출신의 박원순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어느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소속이다. 박 시장은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를 약 8%포인트차로 여유롭게 따돌렸다. 지난 1995년 서울시장 선거가 시작된 이래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민사회세력의 정치권 진입
지난 9월초 이른바 ‘안철수 열풍’과 함께 등장한 박원순 시장은 민주당의 끈질긴 영입제의를 뿌리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 과정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이른바 ‘아름다운 단일화’가 있었고, 이어 민주당 박영선 의원과의 경선도 거쳤다. 그리고 본선에 나서 압도적인 표차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었던 것이다.
이는 기존 정당정치에 굴욕을 안겨준 일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평생 동안 인권변호사이자, 시민활동가로 살아온 비정치인이 채 50여 일이 되지 않는 기간 만에 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여야의 거대 정당을 제압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도 이러한 ‘기현상’을 분석하고 의미를 찾아내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대략적인 풀이는 기존 정당정치 세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과 반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데에 모아지고 있다. 이에 임기말로 치닫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심판도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러한 모든 현상은 정당을 포함한 기존 정치권의 위기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10.26재보선 이후 정치권은 거대한 후폭풍과 지형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먼저 ‘안풍(安風)’의 위력이 이번 선거를 통해 재확인됨에 따라 야권은 기존의 정당질서를 초월하는 대안세력에 대한 요구와 위상이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주로 진보개혁 성향을 띠고 있는 이들은 내년도 있을 총선과 대선에 있어서 범야권 단일화의 주도적 세력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특히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됐다. 당장 수면 위로 부상하지는 않겠지만 총선을 눈앞에 둔 홍준표 대표체제에 상당한 균열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된다. 나경원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역시 지금까지 굳건하게 지켜왔던 대세론에 치명상을 입게 됐다.
이와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도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설상가상 선거과정에서 불거진 ‘내곡동 사저’ 문제의 파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어서 청와대의 향후 행보와 대응이 주목되는 대목이다.

직격탄 맞은 정치권 비상등 깜빡깜빡
박원순 서울시장의 등장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이번 선거가 세대 간의 대결양상을 보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거결과에 따르면 박 시장은 20,30,40대 등 상대적으로 젊은층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48.6%라는 높은 투표율 역시 이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는 향후 치러지게 될 총선과 대선에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존 정당이나 유력정치인 대신 진보성향의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제3의 정치세력이 정치권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날로그에 기반한 기존의 정당체제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중심의 양강구도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박원순 시장의 등장을 두고 ‘기존 정치권에 대한 퇴출 경고장’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야권 역시 후폭풍에서 자유로운 처지가 아니다. 야권 내에 제3의 세력이 등장함에 따라 민주당 내부에서는 각 정파별 주도권 잡기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박 시장이 끝내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고 안철수 원장과 시민사회 세력을 규합해 제3의 정당을 창당할 경우 민주당의 위상과 입자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그야말로 위기 그 자체다. 이 대통령의 임기말이 가까워짐에 따라 국정장악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상황인데다, 측근비리를 비롯해 각종 의혹과 논란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 내부의 수도권 의원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총선필패론이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여권 내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는 고스란히 변화와 쇄신 요구로 이어지게 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한동안 잠잠했던 당내 계파간 갈등과 각종 혼란이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달을 경우 홍준표 대표체제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안철수 원장 중심의 제3정당 창당설
이번 선거를 통해 기존 정당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이 확인되면서 초반 지지율 5%대였던 박원순 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서울시장으로 만든 1등 공신인 안철수 원장의 신당 창당설은 힘을 얻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받아 들이는 분위기다. 다만 안 원장과 박 시장이 속한 시민단체가 같은 노선과 정책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기존 정당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모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만은 기정사실화된 상태다. 특히 미세하게나마 한나라당의 타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민주당이 서울시의회를 장악하고 서울시장마저 야권이 차지한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총서울 지역 대패는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 2007년 대선 이후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세론은 흔들림 없이 지속돼 왔다. 야권에서 대항마가 불쑥불쑥 등장했지만,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을 한참 밑도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바람’이 끝나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지난 9월초 등장한 안철수 원장은 박 전 대표의 굳건했던 박근혜 대세론을 위협하고 있다. 한때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을 앞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까지 박빙의 지지율 구도로 지속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박원순 시장의 당선으로 안 원장 지지율은 더 욱 올라갔으며, 이러한 상승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 있다.
범야권단일화의 중심이었던 민주당은 외견상의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박원순 시장의 승리가 민주당의 승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번 승리는 분명히 시민단체와 범야권과의 협력과 단일화로 이뤄낸 공동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주당이 만족할 만한 지분을 챙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안 원장이 신당을 창당하고, 진보 시민단체가 민주당과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면 민주당이 내년 총선에서 차지할 수 있는 의석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10.26재보선 기간 동지이자 우군이었던 박원순 시장과 안철수 원장이 졸지에 경쟁세력으로 돌변할 수 있는 셈이다.
더구나 손학규 대표를 제치고 안 원장이 대선 유력 후보로 올라선 만큼 민주당의 처지는 더욱 곤란해질 수밖에 없어졌다. 현재까지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관계도 모호해진다.
이번 선거는 명백히 이명박 정부를 비롯한 집권여당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짙었다. 민주당으로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분노는 비단 한나라당을 겨냥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이에 민주당 한 당직자는 “기존 정치권에 실망한 지지층을 어떻게 다시 돌려놓고, 구세력이 아닌 신진세력 범주에 들어갈지가 민주당의 숙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관건은 ‘박원순 체제’의 실력
박원순 시장이 첫 출근을 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울시의회가 의결한 ‘초등학교 전면무상급식’에 결재하는 한 것이었다. 이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끌게 될 향후 시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서울시정은 근본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 시장은 선거기간에 이미 서해뱃길을 비롯한 오세훈 전 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사업’ 중 대부분을 중단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오 전 시장의 역점사업 중 하나였던 뉴타운 정책도 전면 재검토 대상이다.
이에 박 시장은 또 다른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서울시민의 삶과 수도서울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대표 시절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제도권 속으로 들어온 터라 그의 작은 행보 하나하나가 관심사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또한 25조원이 넘는 부채문제 등 해결이 만만찮은 과제에 대해 얼마만큼의 행정력을 발휘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미지수다. 만약 제대로된 능력과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오세훈 시장이 받았던 비판에 못지 않은 거센 역풍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도발, 해외에서도 한창
유럽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하는 ‘해적당(Pirate Party)’이 등장해 인기몰이 중이다. 이는 의회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는데, 현지 정치권과 언론들은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끼는 유권자들을 힘이 만들어낸 쾌거라고 평가하고 있다.
해적당은 지난 9월 독일 베를린 지방의회 선거에서 15명의 의원을 배출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거가 종료된 후 지금까지 이들의 지지율은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 등 집권 연정의 지지율이 31%에서 답보 상태인 가운데 해적당은 10%의 지지율을 보며 지난 10월5일 조사보다 2%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유럽뿐 아니라 호주와 러시아, 튀니지와 멕시코 등에서도 해적당에 대한 지지가 커지고 있다.
해적당은 2006년 스웨덴에서 최초로 결성됐다.
세계적인 파일공유 사이트인 스웨덴의 '파이어리츠 베이'(Pirate Bay)의 한 분파였던 스웨덴 해적당은 인터넷 자유과 특허제도 폐지, 저작권 제도 개혁과 사생활 보호 등 인터넷과 관련된 운동을 전개했다.
스웨덴 해적당이 부상하면서 2010년 4월 벨기에에서는 전 세계 해적당을 규합하는 ‘해적당 인터내셔널(PPI)’이 공식 설립됐다. PPI에는 현재 22개 국가의 해적당과 옵서버 자격으로 5개국의 해적당이 가입해 있으며 대부분이 유럽에서 결성됐다.
해적당 당원들은 대부분 IT 기술에 친숙한 청년층으로 인터넷을 이용한 홍보를 적극 펼치고 있다. 당의 의사결정 과정을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로 중계 등 기성 정당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정치활동을 펼치고 있다.
PPI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해적당은 61개에 이르며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해적당이 정치의 주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일각에서는 경제 위기 등에 허둥대는 각국 정부에 대한 유권자들의 절망이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으며, 해적당은 그러한 양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저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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