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유적지 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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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유적지 5선
  • 글/신혜영
  • 승인 2005.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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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발자취를 따라 배우는 역사 이야기
시대 불문하고 존경받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 제승당, 한산정, 현충사 등 5선

절세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지금도 변함없이 존경받는 위인이다. 그는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최후를 맞는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운 영웅 중의 영웅이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시련을 감내하고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조선을 왜적으로부터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 한민족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 사람인 그의 행적을 따라 역사를 배운다.



1545년(인종 1)에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태어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32세 되던 1576년 (선조 9)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관직에 진출한다. 1591년 47세 때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 된 이듬해인 1592년에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때 그는 그의 최초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최후를 맞는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운다.
한편, 그는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조선수군의 본거지 제승당(制勝堂)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한산도에 소재하는 이순신(李舜臣)의 해군사령부가 있었던 곳.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써 당포승첩(唐浦勝捷)후 왜적과 세번째로 접전하여 적군을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사기와 전의(戰意)에 큰 타격을 준 곳이다. 또한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陣)을 친 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하였던 곳이며 집무실이기도 하다. 이곳은 원래는 운주당(運籌堂) 터이다. 운주당이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고 있는 곳인데, 1740년(영조 16)에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한데서 비롯되었다.
제승당은 한산도의 이충무공 유적지는 16만평의 숲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경내에는 여러 건물이 있지만 전체를 통틀어 제승당이라 부른다. 지금의 제승당은 1749년 제 107대 통제사인 조경이 충무공의 얼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허비와 함께 새로 세운 것이다. 그 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 한산도의 제승당 앞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1592년)의 승리를 거둔 곳으로 제승당 입구 바다 암초의에 세워진 거북등대는 1963년 12월에 세운 것으로서 한산대첩지가 여기임을 가리켜 주고 있으며 항해하는 선박들을 인도하고 있다.
한편 한산도 앞바다는 바로 세계 해전사상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룬곳으로 서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옥포, 당포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활쏘기를 연마하던 한산정(閑山亭)
선조 26년(1593) 7월부터 선조 30년(1597) 2월까지 제승당에 머물면서 군사들과 매일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으로, 선조 27년(1594) 4월에는 이 곳에 과거시험장(특별무과시험)을 개설하여 100여명의 무사를 배출하였다. 한산정에서 과녁까지는 145m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활터로는 유일한 곳이다. 이 곳에서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하여 활쏘기를 수련함으로써 실제 해전에서 직선과의 사정거리(射程距離)를 측정하였다고 한다.

애국충정을 기리는 곳 현충사(顯忠祠)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이 충무공이 성장하여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던 곳이다. 병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충무공이 순국한지 100여년이 지난 숙종 32년(1706)이 충무공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아산지방 유생들이 건축하여 사당을 건립한 후 그 이듬해 현충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현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외침(外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정(愛國忠情)을 기리는 곳으로 봄꽃과 가을단풍이 아름다워 즐겨 찾고 연간 100여 만명이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워가고 있다. 이 곳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봉안 되어 있으며 고택유물 난중일기 등 이충무공께서 쓰던 많은 유품및 전시품이 보존?관리 되어있다.

이충무공 묘(李忠武公 墓)
충남 아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어린시절을 보낸 외가이다. 이순신 장군은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외가가 있는 이곳 아산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큰 전공을 세우고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당시 충무공의 묘는 고금도에 안치되었다가 이 곳 아산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고금도가 어느 섬인지는 확실치 않고, 현재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남해도에 가면 충무공의 사당인 충렬사에 충무공의 묘가 있다.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공의 유해는 최후의 진지였던 고금도에 일단 모셨다가 이듬해 1599년 운구되어 2월 11일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에 장사되었으며 전사 16년뒤인 1614년 어라산에 이장되었다. 1959년 5월 22일 묘역이 사적 112호로 지정되었는데 묘는 상주방씨와의 합장묘로 조선시대 전통적인 고관묘의 전형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

왜 지금 이순신인가
시대가 영웅을 부른다, 뜨거운 이순신 열풍
'신화'에서 '현실'로 대중문화 속의 이순신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前方急 愼勿言我死)"
이순신 리더십 열풍이 뜨겁다. 열풍의 진원지는 고뇌하는 직장인, 그리고 기업인들의 가슴속이다. 이순신 열풍은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텅 빈 가슴을 23전23승의 자신감으로 가득 메우고 있다. 민족의 성웅에서, 직장인과 기업인들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난 이순신 장군의 열풍은 어수선한 시대, 영웅을 바라는 대중의 심리와 만났다.
드라마로, 소설로, 평전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선 이순신. 현재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는 여전히 베스트 셀러이며,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종영 직전 시청률 랭킹 3위를 유지함으로써 이순신 열풍의 힘을 과시했다. 영화 '천군'도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은 온라인 게임 속에서도, 휴대폰 속 모바일 게임 속에서도 존재한다.
1970년대에는 정권 차원에서 이순신을 충(忠)의 화신으로 과도하게 숭배했고, 1980년대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원균의 복권' 작업이 활발했으며, 1990년대에는 자살설·은둔설 같은 이순신 미스터리가 유행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이순신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그것은 '신화'에서 '현실'로 내려온 인간 이순신이다.
"임진왜란은 결코 패배한 전쟁이 아니었다. 침략자의 의지를 끊고 조국의 산하를 지킨 승리한 전쟁이었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에도 불굴의 의지로 조국을 지켰고,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그것을 기회로 삼아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꿈꾸는 사람들의 영웅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통해 꿈과 희망을 확인할 것이다"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제작팀이 밝힌 기획의도다. 지난해 9월4일 첫 방송된 '불멸의 이순신'이 지난 28일 104부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김탁환의 '불멸'과 김훈의 '칼의 노래'. 이 드라마 속에서 불패신화·전쟁영웅이라는 외피를 벗기면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것은 원칙주의자, 혁신주의자, 비주류, 탁월한 리더십으로 요약된다. '칼의 노래'나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이순신은 명장, 성웅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면, 영화 '천군'에서는 성웅 이순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 이순신을 드러낸다.
그 동안 이순신 재조명 작업을 관망만 하던 역사학계도 본격적인 채비를 하고 있다. '이순신 평전'을 준비중인 서강대 정두희 교수는 "조선왕조의 정치라는 씨줄과 동아시아의 국제전이라는 날줄이 촘촘히 얽혀있는 얼개 속에서 그의 삶을 살펴야 본모습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죽을 각오로 모든 것에 임한 이순신 장군,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았던 충무공의 결의는 독도문제로 일본과 외교전쟁을 벌이는 우리에게 '왜 지금 이순신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난세의 격랑을 헤치고 겨레를 구한 충무공이 현재 대중문화에서도 주목받는 것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독도 망언 등으로 격앙된 국민 감정이 작용한 결과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위기관리능력의 극대치를 보여준 이순신의 리더십과 전략적 사고를 대중문화를 통해 곱씹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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