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훈민정음 반포, 한글 세계 속에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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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훈민정음 반포, 한글 세계 속에 피어나다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1.10.0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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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기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자,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

1446년 10월9일 세종대왕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를 반포한다. 3년 전인 1443년 훈민정음을 완성했지만 창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 운서(韻書)를 번역하는 등 꼼꼼한 준비를 거쳐 공포하게 됐다. 훈민정음은 구한말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글은 탄생 기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자로 제자원리가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다. 자음 17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ㄱ, ㄴ, ㅁ, ㅅ, o’의 기본자 다섯 자를 만들고,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해 나머지 자음을 만들었는데, 이는 한글이 치밀한 관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1446년 10월9일] 훈민정음 반포 565돌
한글은 몇 가지 조합 규칙만으로 무한수에 가까운 소리를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로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적으로 입증되어왔다. 한글, 즉 훈민정음은 세계 문자 가운데서도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한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들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글은 탄생 기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자로 제자원리가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다.
자음 17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ㄱ, ㄴ, ㅁ, ㅅ, o’의 기본자 다섯 자를 만들고,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해 나머지 자음을 만들었는데, 이는 한글이 치밀한 관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모음 11자 역시 천(天), 지(地), 인(人)을 본떠서 ‘·, ㅡ, ㅣ’의 기본자 세 자를 만든 다음, 나머지는 그것들을 조합해서 만들었다. 또한 한글은 문자의 활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음소 문자로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쓰는 음절 방식의 표기 체제를 가지며 한글의 모음은 언제나 일정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한글의 이러한 창제원리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서문을 쓰고 정인지 같은 신하들에게 글자에 대한 설명을 적게 한 것으로 이 책이 1940년에 안동에서 발견될 때까지 우리는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 해서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이처럼 한글의 과학적이고 간결한 체계 덕분에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1%에도 못 미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진즉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9월8일을 ‘세계 문맹 퇴치의 날’로 정하고 문맹 퇴치에 기여를 한 개인·단체에 ‘세종대왕 문해(文解)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언어 연구학의 세계최고인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언어학 대학에서는 세계 모든 문자 순위를 매겼는데 그 1위로 한글을 지정했다.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은 한글에 대해 “24개의 단순한 알파벳과 몇 가지 조합 규칙만으로 무한수에 가까운 소리를 표현해낼 수 있는 놀라운 언어”라고 극찬했다. 영국의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맨이라는 그의 저서 ‘알파 베타(Alpha Beta)’라는 책에서 한글을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소개했다. 미국의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 1994년 6월호에서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 
10월은 이러한 한글에 대한 자긍심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한글의 연구 보급을 장려하기 위한 ‘한글날’이 있는 달로서 다시 한 번 한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2000년 10월13일]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선정
2000년 10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뽑혔다. 노벨상 모든 부문을 통틀어 한국 사람이 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날 김 대통령이 한국과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을 개선하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추구한 공로를 인정해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당시 노벨평화상은 모두 115명의 개인과 35개 단체가 후보에 올라 1901년 노벨평화상이 생긴 이래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7년 처음으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이래 이때까지 모두 14번 이 부문 후보에 올랐다. 노벨평화상 수상식은 두 달 뒤인 12월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렸다.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과 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과정에서 공언한 ‘준비된 대통령’답게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해 지난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다.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극복했다는 평가가다.
특히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2000년 6월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1973년 10월20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개관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1973년 10월20일 문을 열었다. 개관을 기념하는 불꽃놀이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연주됐다. 엘라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참석한 이날 개관식은 텔레비전으로 생방송됐다.
오페라하우스는 국제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된 덴마크의 건축가 이외른 우촌(Jørn Utzon)이 설계한 것으로 1973년 완공되었다. 역동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건축하는 데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논란이 많았다. 시드니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요트들의 돛모양을 되살린 조개껍데기 모양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공사기간과 비용이 계획보다 훨씬 증가했다. 착공 14년 만에야 완공됐다. 당초 예상 건설비의 15배에 가까운 1억 200만 달러의 비용이 투입됐다. 하버브리지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공연 예술의 중심지로서 극장과 녹음실, 음악당, 전시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시드니심포니오케스트라 및 오스트레일리아국립오페라단·무용단 및 여러 연극단의 본거지이다. 건물 안에는 극장 5개, 리허설 스튜디오 5개, 그리고 레스토랑과 기념품가게, 도서관시설 등 1,000여 개의 공간이 들어서 있다.
지난 2007년에 유네스코 선정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페라하우스에서는 매년 3,000여 건의 행사가 펼쳐지고 해마다 200만여 명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단순히 건물만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도 매년 20만 명이 넘는다.

[1994년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

   
1994년 10월21일 오전 7시40분쯤 서울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다리 중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교각 사이의 상판 48m가 끊어져 한강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리 위를 지나던 버스 등 차량들도 함께 추락했다. 출근길 시민과 등교하던 학생 등 32명이 목숨을 잃고 17명이 다쳤다. 성수대교는 기능 위주로 세워진 이전의 한강 다리들과는 달리 미관을 최대한 살리고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설됐으나 부실공사와 엉성한 관리 때문에 개통된 지 15년 만에 어이없는 참변이 일어났다.

1994년 10월21일 오전 7시40분쯤 서울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다리 중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교각 사이의 상판 48m가 끊어져 한강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리 위를 지나던 버스 등 차량들도 함께 추락했다. 출근길 시민과 등교하던 학생 등 32명이 목숨을 잃고 17명이 다쳤다.
성수대교는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7년 착공돼 2년 만인 1979년 10월16일 완성됐다. 1,160m의 교량 북단과 남단에 인터체인지가 설치됐고 국내 최초로 ‘게르버 트러스(Gerber Truss)’ 공법으로 세워졌다. 성수대교는 기능 위주로 세워진 이전의 한강 다리들과는 달리 미관을 최대한 살리고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설됐으나 부실공사와 엉성한 관리 때문에 개통된 지 15년 만에 어이없는 참변이 일어났다.
서울시는 이듬해 4월부터 기존 성수대교를 헐어내고 새 다리를 짓기 시작해 사고발생 2년 8개월 만인 97년 7월 초 차량통행을 재개시켰다.

[1945년 10월24일] 국제연합(UN) 창설

   
1945년 10월24일 국제연합이 공식으로 창설됐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군을 결성해 한국전에 참전, 대한민국을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하는데 앞장섰다. 국제연합본부는 미국 록펠러재단의 기부금으로 1952년 뉴욕에 세워졌다. 
1945년 10월24일 국제연합이 공식으로 창설돼 세계 평화를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4개월 전인 같은 해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세계 50개국 대표들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국제연합헌장은 각 나라의 비준을 거쳐 4개월 뒤 오늘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됐다. 국제연합 본부는 미국 록펠러 재단의 기부금으로 1952년 뉴욕에 세워졌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군을 결성해 한국전에 참전, 대한민국을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하는데 앞장섰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1991년 9월17일에 유엔의 160번째와 161번째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했다.
국제연합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하여 국제연맹의 뒤를 이어 탄생한 국제평화기구다. 세계 대다수 국가를 포함하고 정비된 조직과 광범한 기능을 갖춘 국제평화유지와 국제협력달성을 목적한다. 국제연맹을 능가하는 일반성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 국제연합은 각 가맹국 내에서 법률상의 지위를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국제연합 자신이 조약체결권 등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법상의 한 주체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국제연합총회(國際聯合總會)·안전보장이사회(安全保障理事會).경제사회이사회(經濟社會理事會)·국제사법재판소(國際司法裁判所)·사무국(事務局)의 5기관을 주요기관으로 주요활동은 크게 평화유지활동·군비축소활동·국제협력활동으로 나눌 수 있으며, 주요기구와 전문기구·보조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기구에는 총회·안전보장이사회·경제사회이사회·신탁통치이사회·국제사법재판소·사무국이 있다. 2개의 이사회(理事會)가 있음은 국제연맹에는 없었던 특색이다. 또 각 기관을 통하여 의사의 의결에는 다수결제도를 채택한 것도 국제기관으로서 획기적인 것이다. 평화(平和)와 안전(安全)의 유지에 대하여 지역주의(地域主義)가 인정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전문기구로는 ILO(국제노동기구), FAO(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WHO(세계보건기구), IMF(국제통화기금),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IFC(국제금융공사), IDA(국제개발협회),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UPU(만국우편연합), IMO(국제해사기구), WMO(세계기상기구), ITU(국제전기통신연합), WIPO(세계지적소유권기구), IFAD(국제농업개발기금), UNIDO(국제연합공업개발기구)가 있으며 그 외에 전문기구는 IAEA(국제원자력기구), WTO(세계무역기구)가 있다.
보조기구로는 국제연합개발계획, 국제연합환경계획, 국제연합난민고등판무관, 국제연합인권 고등판무관, PKO(평화유지활동) 등이 있다.
지난 2007년 1월 한국인 최초로 반기문 국제연합 사무총장이 취임했다.

[1956년 10월29일] 제2차 중동전쟁 발발

   
1956년 10월29일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에 들어간 1차 중동전쟁에 이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두 번째 전쟁이다. 제2차 중동전쟁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군의 일방적 승리였지만, 이들 3개국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영국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스라엘은 아카바만의 봉쇄를 푸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 전쟁은 또한 미국과 소련에게는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6년 10월29일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에 들어간 1차 중동전쟁에 이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두 번째 전쟁이다.
제2차 중동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발발, 왕제가 붕괴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한데서 비롯됐다. 이로써 이스라엘을 비롯한 프랑스 영국이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고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군이 수에즈운하를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약속 받은 이스라엘은 10월29일, 시나이 반도를 기습 공격하여 주요 요충지들을 장악한다. 영국과 프랑스도 공군기들을 동원하여 이집트군의 주요 공군 기지들을 공격하는 한편 공수부대를 투입, 수에즈 운하를 점령한다.
전세는 3국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파견하였다. 그리고 11월23일 정전이 성립되었으며, 영국-프랑스-이스라엘군의 즉각 철수를 UN총회에서 결의함에 따라 12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이듬해 3월에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고 있던 이집트 영토에서 철수했다.
제2차 중동전쟁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군의 일방적 승리였지만, 이들 3개국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영국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스라엘은 아카바만의 봉쇄를 푸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 전쟁은 또한 미국과 소련에게는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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