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의 몰락, 공교육 붕괴로 사회양극화 현상
소득 2만달러 시대를 빨리 열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며 ‘웰빙’ 인생을 소개하는 각종 광고의 유혹이 신문 지면마다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절대적인 삶의 조건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이웃이 있다. 학교 급식이 안 나오는 방학이 무서운 아이들. 세상과의 단절 속에 안위조차 불확실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노인들. 이 모든 것들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스스로의 미래와 꿈을 말살하고 있는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현재의 자화상이다. 빈약한 제도 속에는 철학의 빈곤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하지만 빈곤한 이웃을 이대로 두고서는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처절한 생존투쟁으로 채워가게 될 뿐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빈곤층이 심각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지난 6월 23일 국민 9.62명중 1명은 빈곤상태에 있거나 빈곤계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집계가 발표됐다. 대략 국민의 10%가 빈곤상태에 있거나 준 빈곤층이라는 이 집계는 우리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보건복지포럼에 따르면 빈곤층 또는 빈곤위험층에 속하는 국민이 502만 3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전체 인구 4,829만 4,000명의 10%가 넘는 비율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이중 기초생활수급자가 149만명, 최저생계비 수준 소득자지만 각종 제한규정으로 인해 기초수급에서 탈락한 비수급빈곤층이 167 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최근 집계된 통계는 더 심각하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우리나라의 빈곤인구가 600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정부가 추정해왔던 빈곤계층의 규모, 약 460만명과 비교하면 이번 보건사회연구원의 실태조사 결과는 140만명이 증가한 규모다. 빈곤인구 600만명, 이는 인구 8명당 1명꼴에 해당된다. 이제 빈곤층이 10%를 넘어선다는 집계다. 빈곤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그 자체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점은 이들 대부분이 아무런 사회적 대책 없이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추락
현재 빈곤계층의 생활을 지원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 대상자에게 제공되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147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450여만명은 부양의무자 기준, 최저 생계비 기준 등의 사유로 빈곤대책의 사각지대로 남아있는 셈이다.
빈곤층의 증가 원인은 양극화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불평등과 빈곤이 증가했고 이 경향은 점차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경제구조가 재편됐고 우리 사회는 점차 양극화돼 갔다. 산업, 수출이 양극화되고 있으며, 기업실적의 양극화, 주가의 양극화, 고용의 양극화, 소득의 양극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산층이 얇아지면서 빈곤층이 늘어나고 있다. 소득은 높아도 의료비, 교육비를 많이 써서 실질적으로는 최저생계비 이하 생활을 해야 하는 빈곤위험계층도 184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여차하면 빈곤층을 전락할 사람들이다. 빈곤층들은 또 연금에서 조차 배제되고 있다. 국민연금의 경우 기초수급 자의 72.9%, 차상위계층은 71.2%가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연금에서 배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공적연금의 혜택조차 못 입고 있는 빈곤은 그대로 대물림되기 십상이다. 앞으로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취업이나 자활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기초생활수급자 등에 대해서는 생계급여가 삭감된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7월 28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오는 9월 정기국회에 제출키로 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일하지 않는 수급자는 자활사업 등에 참여할 경우 발생하는 수입의 전액 또는 일부를 뺀 나머지 돈을 생계급여로 받게 된다. 자활사업에 참여하면 하루 2만 6,000∼2만9,000원을 받는다. 이 같은 방침은 저소득층의 빈곤 탈출 의지를 다잡기 위한 것이라고 복지부는 설명했다.
차상위계층에 대해서도 정부는 이제서야 실태 파악에 부심하고 있는 상태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지난 달 18일 열린 간부회의에서 “의료와 교육 주거 환경등이 어려워지면 차상위 계층이 신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며 “최저 생계비를 간신히 넘어서며 생활하고 있는 차상위 계층에 대해 그 실태와 실체를 좀 더 면밀히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정부차원의 생계지원은 일당 2만~2만 8,000원의 자활근로사업뿐인데 그나마 대상자는 2만명에 불과하다. 의료혜택은 만성질환자나 희귀·난치병 환자에게만 제공되지만 홍보가 제대로 안돼 혜택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알려졌다.
교육이 빈부격차 고착화시켜
20∼30년 전만 해도 서민들에게 교육은 계층 상승의 주요 수단이었다. 시골에서 소 팔고 논 팔아 일류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노력하면 번듯한 직장은 물론,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상류사회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돈 없는 사람들은 그런 꿈을 접어야 할 정도로 소득에 의한 계층의 고착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어제 발표한 도시근로자가구의 교육비 지출 현황을 보면 최상위와 최하위 계층간 교육비 지출 격차는 6배가 넘는다. 이에 따른 교육소비의 불균형도 심해져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구조화되고 있는 것이다.
공교육만으로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대열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사교육비 지출 여력이 없는 서민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가 지난해 ‘2·17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내놓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 교육당국은 대책발표 1년을 맞아 가구당 사교육비가 월 37만원에서 27만원으로 28% 줄었다고 생색을 내지만 지난해와 비교해 달라진 점이 없다.
우리나라의 사교육비는 해마다 꾸준히 늘어 지난해에는 18조원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교육예산(26조원)의 70% 수준이다. 고소득층 자녀들의 해외유학도 늘어 지난해 교육수지 적자가 43억달러(4조3,000억원)나 된다. 사교육비가 날로 증가하는 것은 공교육의 취약성 탓이다. 경쟁사회에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사교육비의 급감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수한 저소득층 자녀들에 대한 국비지원을 대폭 늘려서라도 교육소비의 기회를 고르게 주는 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돈 없는 사람들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갖는다.
부모의 경제력이 모자라 저학력과 가난을 한꺼번에 물려받아야 하는 문제는 해소돼야 한다. 저소득층 자녀가 저학력 학생으로, 다시 저학력 학생이 저소득층으로 이어져서는 기회균등 원칙에 어긋나고 우리 사회의 발전도 기대하기 힘들다. 사회의 지원체제 미흡에서 초래되는 ‘가난의 대물림 사슬’은 끊어버려야 한다.
교육과정평가원이 발표한 기초학력 도달정도 비교결과 급식지원자 비율이 높은 가난한 지역의 학생들이 급식지원자 비율이 낮은 잘사는 지역보다 학력이 매우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저학력이 곧바로 가난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요즘 사회현상이다. 정치권이 이런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교육격차 해소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힘겨운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게 된다는 측면에서 복지사회 건설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교육격차 해소를 위한 특별법안’에는 소득과 학력수준이 낮은 학생들이 많은 지역과 학교에 더 많은 지원을 하도록 되어 있다. 저소득과 저학력 학생 수에 비례해 학교에 더 많은 재정을 배분하고 재량권을 주어 학습의 기회를 늘려나가겠다는 취지여서 강원도에 많은 혜택이 주어지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계기로 기초학력 미달과 급식비 지원비율이 높은 도내 읍·면 지역에 우수교원이 파견돼 학력을 높이고 특기 적성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부모의 재력이 자녀의 성적 좌우
학생의 성적이 부모의 재력에 달렸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수험생의 수능 성적이 부모의 재력과 정확하게 비례했다는 김경근 고려대 교수의 조사 결과는 이런 상식을 수치로 입증했다는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그러나 학교 교육과 본인의 노력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수 없는 많은 저소득 가정의 학부모들에게 치명적인 의미를 지닌다. 부모의 가난은 아이들의 낮은 성적과 아이들의 저교육, 그리고 가난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조사 결과는 가난의 악순환을 세 가지 형태로 제시한 미국 경제학자 래그니 넉시의 설명을 떠올린다. 첫째는 저개발국 차원에서 나타나는 악순환이고, 둘째와 셋째는 저소득 가계에서 나타나는 악순환이다. 교육과의 관계에서는 ‘빈곤-저교육-저숙련-저생산성-저소득-빈곤’의 순환구조로 나타나고, 건강과의 관계에선 ‘빈곤-불건강-저생산성-저소득-빈곤’으로 나타난다. 빈곤은 저교육과 불건강을 통해 더 깊은 빈곤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 경제규모는 세계 11위라지만, 빈부격차에 따른 양극화 현상은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으로 등장했다. 빈곤층은 이제 716만명에 이르렀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경제적 양극화의 해소를 핵심적 과제로 제기했다. 그러나 그의 해법은 일자리 창출 등 경제적인 조처에만 주목한 것이었다.
양극화 해법이라면 그 중심에 교육 문제를 놓아야 한다. 부모의 가난이 아이들의 더 큰 가난으로 이어지는 한 양극화는 해소될 수 없다. 교육을 매개로 한 빈부의 대물림을 끊어야 한다. 그러자면 모든 아이들이 공정한 교육의 기회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 답은 나와 있다. 공교육이 교육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뿐이다.
최악 빈곤층 400만 넘어
월소득이 최저생계비(4인가구 기준 113만 6,000원) 이하인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와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인 차상위계층 등 빈곤층이 716만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민 7명 중 1명꼴이다. 지금까지는 통계청의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빈곤층이 500만명이라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보건복지부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통계청 조사에서 빠진 1인가구, 농어촌가구, 자영업자 등을 포함해 3만가구를 표본조사한 결과, 이같이 집계됐다고 한다. 한마디로 충격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716만명 중에는 적지 않은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도 있다. 정책지원대상 기준인 5,445만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315만명을 제외하면 소득과 재산이 모두 취약한 최악의 빈곤층은 401만명이라고 한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지난달 총리실 간부들에게 빈곤층의 실태를 직접 조사토록 지시한 것도 소득기준과 자산기준의 지나친 격차, 과도한 빈곤층 숫자 등이 직접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장기 불황과 고용 악화로 저임금 근로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기반이 붕괴되면서 빈곤층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우리나라는 상위 10%의 소득이 하위 10%에 비해 15.28배나 되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소득 불균형이 심하다. 남북분단, 동서분단에 이어 빈부양극화 분단이라는 제3의 분단이 생겨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양극화는 선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빈부격차 심화가 선진화의 동력인 양 호도했다.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덫에 빠진 빈곤층으로선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고소득층의 주머니가 흘러 넘치면 저소득층의 바닥도 적시게 된다는 ‘적하(滴河)’현상은 이미 실종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소득층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야 한다. 정부가 빈곤층 소득보전을 위해 추진하는 근로소득보전세제(EITC)에 기대를 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지소유 빈부격차도 심화
작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땅부자 가운데 상위 5%가 전체 개인 토지의 82.7%를 갖고 있고 상위 1%의 몫만 해도 51.5%라니 매우 충격적이다. 정부가 부동산 종합대책 마련에 앞서 최근 실시한 전국 개인토지 소유 현황 조사에서 드러난 것으로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사람이 너무 많은 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토지 소유 편중 현상이 이 지경까지 이른 줄은 미처 몰랐다. 땅부자 상위 1%가 갖고 있는 토지는 인구 천만명이 사는 서울특별시의 48.7배나 되고 상위 5%는 78.5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부동산 광풍이 전국을 휩쓸었던 지난 1980년대에 토지공개념 시행을 앞두고 개인토지 소유 현황을 처음 조사한 86년만 해도 상위 5%의 점유 비율은 65.2%였다. 20년도 안 돼 무려 17.5% 포인트나 뛰어오른 것으로 자칫하면 전국의 토지를 일부 계층이 몽땅 독차지하는 상황까지도 각오해야 할 판이다. 땅의 편중 현상이 둔화하기는커녕 훨씬 더 심각해진 데에는 ‘갖고 있으면 남는다’는 ‘부동산 철학’이 크게 작용했을 게다. 가진 자들이 기회만 되면 땅을 사들이느라 열을 올렸다는 얘기다. 그리고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의 위헌 판결로 토지공개념이 중도 하차한 탓도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확대 재생산이 안 되는 특수재인 땅이 소수에게 집중되는데 따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선 이런 독과점 체제에서는 땅값이 왜곡되거나 비정상적으로 치솟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소득 뿐 아니라 자산가치의 양극화도 심화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소득이야 자기 노력이 조금이라도 들어가지만 토지는 `부의 대물림'으로 빈부 격차를 증폭시키는 전형적인 불로소득의 원천일 뿐이다. 아울러 땅값이 오르면 생산요소 투입비용이 늘어나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국토 개발 비용이 급증하는 등 국가 경제에도 엄청난 부담이 되므로 토지 소유의 편중 현상을 해소하는 것은 매우 중차대하고도 시급한 과제다.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8월 말에 내놓을 부동산 종합대책에 이 문제를 포함시킨다지만 지금처럼 토지소유자의 개발 이익 독식이 허용되는 한 가진 자들의 땅 욕심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토지초과이득세에 버금갈 정도의 강력한 누진적 보유세제를 확립하고 기반시설부담금제 도입 등 물샐틈없는 개발이익 환수 장치를 갖춰야 한다. 아울러 행정도시를 비롯해 개발예정지 주변의 우발 이익 환수 방안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달랑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인 서민들의 세부담을 늘리는 일은 절대 금물이라는 점이다. 가뜩이나 쓸 돈도 없는 터에 세금만 늘어나면 서민층의 절망감만 증폭시킬 뿐 아니라 이들의 소비를 더 얼어 붙게 만들어 경기 위축을 가속화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