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화해모드, 남남은 갈등 … 해결책은 어디에
8월 17일 북한 당국·민간 대표단이 귀국하면서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8·15 민족대축전이 막을 내렸다. 축전에서 보인 북한 대표단의 파격적인 행보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란 평가도 받고 있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번 행사 기간 표면화된 진보와 보수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은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라는 지적이다.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8.15 민족대축전’ 둘째날인 15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민간단체,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민족대축전 주최측인 6.15 공동준비위원회 등이 각종 행사를 잇따라 열었다. 진보 성향 민간단체들은 반전(反戰)ㆍ반미(反美)ㆍ평화ㆍ통일 등을 주제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고 보수단체들은 한미동맹 강화 궐기대회 등으로 맞섰으나 일각에서 우려했던 ‘보ㆍ혁(保ㆍ革)’ 사이의 물리적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8.15 광복절의 남쪽 풍경
진보 단체들의 모임인 통일연대 및 민중연대는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대학로에서 1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8.15 반전평화 자주통일 범국민대회’를 열고 종각까지 2.5㎞를 행진했다. 민주노총과 한총련 등을 중심으로 약 1만명이 모인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푸른색 한반도기 등을 들고 "반전 평화 자주 통일 투쟁으로 평화통일 쟁취하자", "주한미군 몰아내고 평화통일 앞당기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이날 29개 중대 3천700여명을 행사장 주변에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 했으나 별다른 충돌이나 마찰은 없었다.
진보단체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회원 100여명은 대학로 집회 이후 용산 전쟁기념관으로 이동, 오후 12시30분부터 오후2시까지 ‘미국의 한반도 전쟁 책동 규탄과 한반도 평화실현 촉구대회’를 열었다. 이날 밤 범청학련 회원 3천명은 오후 9시30분부터 밤 11시까지 연세대에서 13주년 기념대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연세대측의 반대로 장소를 경희대로 바꿨다. 그러나 경희대측도 불허방침을 밝혀 행사 개최여부는 불투명하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회원 200명은 오후 1시부터 오후 4시까지 탑골공원 앞에서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제'를 연 뒤 종로1가∼공평로터리∼종로구청 후문∼국세청 구간을 행진했다.
보수단체인 국민행동본부는 오후 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2천500명이 모인 가운데 ‘광복 60주년 자유통일 국민대회’를 열었다. 또 다른 보수단체인 반핵반김 국민협의회가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광화문 인도에서 개최한 광복절 기념 한미동맹 강화 궐기대회에는 2천여명이 참석했다.
남측의 시선은 두갈래
북측의 국립현충원 참배에 대해 진보진영은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한 위대한 결단’이라고 평가한 반면, 보수진영에서는 6·25전쟁에 대해 먼저 사과해야만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 8월 15일 대학로에서 열린 민주노총과 한총련의 ‘반전평화 자주통일 범국민대회’와 국민행동본부가 서울역 광장에서 개최한 ‘광복 60주년 자유통일국민대회’는 우리 사회의 남남갈등을 보여준 대표적 집회이다. 북한의 행보를 바라보는 남측의 시선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한반도 정전체제를 바탕으로 한 대결구조가 평화체제 정착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마련됐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북한이 대남 여론을 떠보고 남측의 이념적 무장해제를 노린 대남전술을 펼쳤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북한이 전략적인 변화의 단초를 보였다는 분석과 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남측으로부터 적극적인 공조를 얻어내기 위한 유화 제스처를 펼친 것뿐이란 해석도 엇갈린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북한이 남남갈등의 씨앗을 심고 돌아갔다는 비판도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보고 우리 사회 안에서 대립하기보다는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또 앞으로 남북 양측이 적극적인 관계 개선과 6·25전쟁을 비롯한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인 정리를 통해 갈등을 치유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소 연구원은 “북한이 본질적인 행보를 보여줘야 북한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지금까지 해결되지 못한 인도적인 사안과 정치·군사 분야의 협력관계 발전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번 축전이 남북 당국과 민간이 뒤섞인 상태로 진행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단체들의 집회가 잇따르면서 앞으로 우리 정부의 대외적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광복 60주년을 맞는 15일을 "꼭 60년 전의 혼란한 해방정국으로 되돌아 간 듯 하다"고 촌평했다. 전여옥 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이 나라 광복은 회갑을 맞았지만 60주년의 잔칫상은 꼭 60년 전의 혼란한 해방정국으로 되돌아 간 듯 하다"며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보수단체는 겹겹이 포위를 당하고 태극기를 나눠줬다는 이유로 병 세례를 받으며 경찰에 끌려가고 몇 천명씩 무리지어 다니는 자칭 진보단체는 '통일은 됐어!'라는 구호를 목청껏 외치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전 대변인은 "이 혼란과 갈등이 비등점을 향해 나아간다면 우리는 광복의 기쁨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 6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갈 것"이라며 "거센 남남 갈등의 쓰나미속에서 한 집에서 아들과 아버지가 싸우고 형제와 자매가 등을 돌리고 부부가 갈라서듯 이 나라는 산산조각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 대변인은 "이제 이 대한민국에서 화합은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얻어야 할 '목표'가 되고 말았고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는 일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고 주장했다. 전 대변인은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의 평화를 가져왔으며 정의로운 시장경제가 이 땅의 풍요를 가져왔고 법치주의를 통해 우리는 편안한 질서를 얻었다"며 "이것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남북은 화해모드 남남은 긴장
6·15남북공동선언 5주년기념 평양 민족통일대축전, 금강산 관광길에 이은 백두산 관광 추진 합의, 장성급 회담 예비회담 등 남북관계가 급속한 화해무드를 타고 있다. 대중문화교류도 활기가 넘치고 있다. 북한의 스타 무용수 조명애가 남쪽의 화장품 광고모델로 등장하더니 남쪽의 국민가수 조용필은 한반도 전체에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는 23일 저녁 6시부터 두 시간 동안 평양 류경체육관에서 공연을 하게 되는 등 남북의 왕래는 이제 흔히 있는 일상사가 되어 가고 있다. 이렇듯 거스를 수 없는 남북간의 거대한 화해의 흐름에 무작정 퍼주기식 식량·비료 제공 반대 등의 비판적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릴 정도다.
엊그제는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한 북한측 대표단이 국립묘지 현충탑을 참배했다. 북한대표단의 참배는 분단이후 처음 있는 일이며 우리와 전혀 사전 상의 없이 자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북측의 임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현충탑 참배는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기본은 이념을 초월하자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을 보면 남북이 과거를 청산하고 화해의 국면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든다. 북측대표의 표현대로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야 할 문’을 넘어 진정한 화해로 가는 첫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넘어야 할 문이 또 있다. 바로 남남갈등의 치유이다. 북측의 참배에 대해서 당장 보수단체들은 6·25전쟁을 비롯한 과거 북한이 저질렀던 각종 사건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며 참배반대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한쪽에서는 진보진영 인사들이 전향적인 사건이라며 북측 대표단을 환영함으로써 남남갈등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냉전시대와 서슬이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에는 진보적 인사들이 통일을 외치며 경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제는 북한 인사들의 현충원 참배반대를 외치는 보수인사들이 경찰과 대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대가 변해 서로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지 갈등의 골을 전혀 메우지 못하고 있다. 해방이후 분단의 역사에 대한 우리사회의 평가는 뚜렷이 양분돼 서로간 충돌을 빚고 있다. 이렇듯 상반된 역사평가에 따른 충돌은 상호이해로 화해의 기반을 다져야지 어느 한쪽의 편향된 이론과 아집만 앞세워서는 천년이 흘러도 치유하지 못한채 국민전체의 분열과 대립을 가중시킬 뿐이다.
나름대로의 시대적 상황은 완전히 도외시한 채 도덕적 판단이나 명분을 지나치게 중시, 마치 선과 악의 대립인 양 구도를 짜놓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로 몰아가지 말아야 한다. 어느 일방이 정해놓은 선(善)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옳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악(惡)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어떤 선이라 해도 그 선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사회를 선-악으로 구분하고 악으로 지목된 쪽을 무자비하게 공격, 매도해서는 안된다. 남북간 화해물결이 높아질수록 남남간의 갈등이 심각해지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이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남북이 손잡고 펼치는 화합의 장 한켠에서는 또다른 갈등의 골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보혁 갈등으로 점철된 2004년
올해 뿐만 아니라 지난해에도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이념대립 양상을 보였다. 혹자는 지난해처럼 국민들이 좌우로 나뉘어 분열상을 보인 것은 해방 이후 처음이라는 다소 과장된 평가를 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은 심각했다. 지난해 말 대학교수들이 한국 사회를 잘 표현한 사자성어로 ‘당동벌이(黨同伐異·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무리의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를 꼽은 것도 이 같은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이념 갈등이 표면화한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였다. 이후 이라크 추가 파병,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비전향 장기수 민주화 인정 파문, 국가보안법 폐지·과거청산 문제, 행정수도 이전 등 주요 사안마다 각각의 이념적 지향에 따라 대립과 반목을 거듭했다.
지난해 3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은 진보 진영의 위기의식을 자극, 탄핵반대 촛불집회 등 집단행동을 유발했다. 탄핵을 지지했던 보수단체들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다. 양측은 헌법재판소 결정이 내려진 지난해 5월 14일까지 2개월여 동안 몇번이나 물리적 충돌 직전까지 가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탄핵 정국은 4·15총선과 맞물려 과반수 여당을 탄생시켰고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에 일조했지만 이념적으로 우리 사회를 진보와 보수로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이라크 추가 파병안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반전·평화단체들은 파병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반면 보수 진영에선 동의를 보냈다. 7월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가 비전향 장기수들이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결정을 내리자 보수단체들은 “간첩행위가 민주화 운동이냐”며 연일 의문사위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었다. 조사관 가운데 간첩 전력이 있다는 의혹은 급기야 의문사위 해체 주장까지 나왔다. 같은달 서울고법에서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씨의 집행유예 선고를 두고 진보와 보수는 각각 환영과 반대의 성명을 내며 대립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은 우리 사회의 이념논쟁의 결정판이었다. 연초부터 국보법 폐지를 위한 사전작업에 들어갔던 열린우리당은 존치 또는 대체입법을 주장하는 한나라당과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국회 내에서 벌어진 국보법 폐지 논쟁은 그대로 국민들 사이로 옮겨졌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벌어진 국보법 논쟁은 건전한 토론과 대안이 벌어지는 대신 ‘수구꼴통’과 ‘빨갱이’라는 원색적인 비방만 난무했다.
이 과정에서 8월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 합헌 결정과 9월 국보법 사범 상고심에서 대법원의 국보법 존치 입장 표명이 있었지만 보혁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특히 헌재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보법 폐지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보수와 진보 진영은 또다시 대립했다. 이념 논쟁의 ‘대미’는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이 장식했다. 12월 초 정국을 얼어붙게 만든 이 의원의 북한노동당 가입 전력 의혹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여당이 추진 중인 과거사 진상규명법 등 4대 개혁입법도 결국 이 같은 이념논쟁의 틈바구니에서 타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갈등의 해결책은
전문가들은 개혁성향의 ‘소수정권’ 탄생에서 이미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이 잉태돼 있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현 정부 출범 초기부터 2002년 발생한 여중생 장갑차 사건, 북핵 해법 등을 두고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은 시각차를 드러냈다. 무엇보다 이념적 배경을 달리하는 남과 북이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이 한국 사회의 갈등 치유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정치학 전문가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진정한 의미의 이데올로기 논쟁이 아니다”며 “한국전쟁으로 인한 심리적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심리적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리며 진보와 보수 양측이 물리적으로 양보하고 타협점을 찾는 길밖에 없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또한 “먹고살기 힘든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한다고 보기 힘들다”며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선명성을 추구하는 보혁 양 극단의 정치인이 문제”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정치권에서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회색분자로 매도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국민들은 그런 정치인에게 오히려 힘을 실어줘야 한다”며 국민 정치의식의 제고를 주문했다. 이와 함께 막연한 국민통합론보다는 보수·진보간의 건전한 긴장관계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정도(正道)’라는 지적도 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문제가 생길 때 덮고 넘어갈 경우 언젠가는 다시 쟁점으로 부각된다”며 “정치권의 구체적인 정책 대안과 합리적 토론문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