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의 전통문화와 천혜의 관광자원을 자랑하는 경기도 화성은 최근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집약된 도시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생태도시로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살기 좋은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화성의 지역주민 또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그런 이곳에서 줄곧 성장하며 지 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 박광직 변호사의 화성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아버지 농사일을 돕다가 뒤늦게 늦깎이 공부에 성공,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는 박광직 변호사의 드라마와도 같은 인생스토리를 소개한다.
농부의 아들, 늦깎이 공부로 사법고시 꿈 이뤄
경기도 화성은 예로부터 충·효의 전통문화가 뿌리 깊은 곳이다. 화성시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효행의 도시이자,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시대에 분연히 일어나 일제에 항거한 구국의 도시이다. 특히 제암리와 수촌리의 3·1독립운동 유적지, 정조대왕의 효심이 서린 융·건릉과 용주사 등은 화성시의 정신적 문화유산이다. 또한 홍난파 홍사용 조용필 차범근 박지성 등을 배출한 예술·문화·체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152㎞에 이르는 해안선, 농·축산업이 어우러진 입지적 여건을 활용한 농촌체험 및 해양관광 등 천혜의 관광자원을 보유한 화성은 이제 U-City(유비쿼터스 도시)개념을 적용한 최초의 도시로 빠르게 탈바꿈하고 있다.
인권변호사로 잘 알려진 박광직 변호사는 이곳 화성에서 줄곧 성장해 화성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은 물론 화성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비록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4살 무렵부터 화성군 태안면 반정2리(현 화성시 반정동)와 냇가를 경계로 접해있는 기산3리(현 화성시 기산동)로 이사와 현재까지 화성지역에 살고 있다. 1970년대 병점초등학교 시절에는 동네 냇물이 맑아 여름 방학이면 물고기 천렵에, 겨울방학에는 썰매와 스케이트 타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학교 공부보다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이 우선시 되던 때였는데 초등 2학년 무렵부터 농사일을 질리도록 했습니다. 특히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공부보다 일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셔서 당시 공부를 하고 싶은 저는 꾀를 내어 일요일이나 쉬는 날이면 학교에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학교로 도망가서 공부하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안용중과 수원고를 졸업하고 다니던 동국대(인도철학과)를 자퇴한 박 변호사는 농사일을 돕다가 85년 전투경찰로 군에 입대해 민주화 요구 시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인천사태, 대통령선거, 87년 6,29항쟁 등 시위 진압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생활을 겪었다고 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늦깎이 공부를 시작, 26세에 한국외국어대 법학과에 입학하며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러나 대학졸업 당시 나이 30세에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서 택한 것이 어린 시절 꿈이었던 사법고시 도전이다. 고시공부 초기에는 주로 공기 좋은 시골이나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고, 고시에 합격하기 2~3년 전부터는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부를 했다. 마침내 그는 1999년 제4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각오한 것이 되도록이면 의뢰인의 입장에서 일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히 맡은 사건마다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의뢰인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변호를 하게 되면 결과가 나쁘더라도 저를 책망하는 의뢰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법원에서 배당하는 형사 국선변호사건도 마다 않고 맡으면서 비록 범죄자이지만 헌법상 인정된 피의자, 피고인들의 변론권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는 자부심 또한 갖고 있습니다.”
폭력대책자치위원장 등 지역사회 큰 기여 ‘한국판 마타하리’사건서 진가 발휘
세상은 그를 인권변호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어패가 있다고 말한다. 굳이 인권변호사 운운한다면 다른 여러 인권변호사 틈에서 함께 한 사람 중의 한명일 뿐이라며 겸손해한다. 그는 변호사로서 지역사회발전에도 앞장서 왔다. 오산시 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장, 화성경찰서 행정발전위원회 위원, 화성경찰서 법률자문변호사, 법 교육 출장강사로 위촉받아 활동한 바 있다. 현재는 화성 지역의 3개 고교(경성·반송·안화)와 3개 중학교(안용·진안·예담)에서 폭력대책자치위원회의 위원 및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날로 더해가는 학교 내 폭력 및 집단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 학생의 구제뿐 아니라 가해학생에 대한 선도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화성교육청 정보공개심의회 위원, 화성소방서 소방행정 법률자문변호사, 경기도 무료법률상담위원, 병점1동 주민자치위원회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화성시민뿐 아니라 경기도민을 위해 그가 가진 법조인으로서의 능력을 한껏 펼치며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변호사인 그에게 특히‘한국판 마타하리’사건은 각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2008년 7월경 국내 언론은 2003~2006년 중국에서 의붓딸 원정화에게 공작금 1억 원을 제공하고 2006년 말 탈북자로 위장 입국한 뒤, 황장엽 씨의 소재 탐지를 시도한 혐의를 받은 여간첩 원정화의 계부 김동순을 체포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수원지방법원 영장실질심사 담당 국선변호인이었던 그는 김동순을 영장실질심사실에서 처음 만났다.
“첫인상은 작은 키에 마른 형으로 우리가 배워온 바대로 간첩처럼 생겨 정말 간첩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10분정도의 변호인 접견시간 그가 자신의 결백함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강변하기에 정말로 억울한 사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영장실질심사를 마치면서 김동순은 영장이 발부되더라도 자신의 사건을 꼭 맡아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박 변호사는 약 7개월 동안 김동순 사건을 맡으면서 북한의 실정과, 탈북자들의 고통과 불행 등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결국 의붓딸인 원정화가 거짓말을 해 자신의 계부인 김동순을 끌어들인 것임을 밝혀냈다. 1심 선고일인 2009년 2월경 검찰은 국가보안법위반을 근거로 12년 구형을 했으나 결국 무죄를 선고 받았고, 당시 수원구치소에 수감된 다른 피고인들 모두가 함께 만세를 불러주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가 이 사건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선고 전 3일간 병원신세를 질만큼 변호사로서 진가를 발휘한 쾌거였다.
“모든 구성원이 서로 배려하고 협력하는 화성 만들고파”
박 변호사는 이 지역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이 화성에서 누구든 특권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독식하는 사람도 없고 천대받는 아이도 없으며 다른 이를 얕보지 않으며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고 서로 배려하며 협력 속에 사는 화성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꿈꾸어왔던 대동사회입니다.”교육은 부족한 아이들을 기다려주고 이끌어주는 시스템으로 가야한다는 박 변호사는 “교육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 개인의 가치를 높여주고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이어야지, 경쟁을 우선시해 다수의 아이들이 좌절하는 교육은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요즘 정치권의 화두인‘복지’에 대해서도 그는 “복지는 보편적 복지여야 진정한 복지이지 차별적 복지야 말로 복지라고 할 수 없다”며 “부자들도 당당하게 세금을 내게 하고 애국·애민정신을 발휘하게 하는 사회구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 양극화에 대해서도 “저임금과 고용안정성 부족이 주범”이라며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간에 대한 배려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 한다면 멀지 않아 양극화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