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미학의 현대적 계승자 손양희 선생, 소리로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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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미학의 현대적 계승자 손양희 선생, 소리로 말하다
  • 취재_박은영 기자
  • 승인 2011.08.0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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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한 폭의 풍속화이자 종합예술, “그 속에 한국 정서와 문화가 녹아있다”

한국음악의 깊이와 한국인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판소리, 민요, 산조 등 전통음악과 새롭게 시도된 창작국악까지, ‘한국 국악’에 대한 가치가 국내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새롭게 조명되고 인정받으면서, 국악 고유의 가치를 지켜온 국악인들의 위상도 재평가 받고 있다. 이에 경남의 대표 예술인이자, 명실상부한 국악인으로서 판소리를 통해 ‘우리소리’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손양희국악예술원’ 손양희 선생을 만나 옛 조상들의 희노애락이 묻어나는 판소리의 미학을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판소리는 1964년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11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와 위상을 인정받은 한국 전통 음악이기도 하다. 경남의 대표적 예술인으로, 이러한 판소리의 가치와 미학을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는 손양희 선생은 우리의 전통 소리인 판소리 문화를 보다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1995년 ‘손양희국악예술원’을 설립했다.

판소리에는 조상들의 정서와 문화가 녹아있는 진국

“판소리는 한 폭의 풍속화이자 종합예술입니다. 그 속에 한국인의 ‘한과 흥’이라는 정서와 문화가 고스란히 묻어나 있죠”라고 서두를 꺼내는 손양희 선생은 “우리 정서 속, 한과 흥은 하나입니다. 극과 극은 통하듯 한과 흥을 적절히 어우러 내어 진한 소리로 풀어내는 것이 판소리입니다”라고 말한다. 조상들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판소리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하는 손양희 선생은 우리 전통의 소리를 배우고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이 우리 민족의 얼을 이해하고 수호하는 길이라고 거듭 이야기하며 우리 전통 음악의 가치를 망각해가는 현대인들에게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오늘날까지 알려진 사실로는 판소리가 누구에 의해서 언제 불리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판소리가 하나의 민속음악으로서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완성의 단계에 이른 시기는 대체로 조선왕조 숙종 조로부터 영조 조까지의 시기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즉, 18세기 말경에서 19세기 경 전성기를 이룬 판소리의 주체와 향유층은 당시 역사적 주역으로 부상하던 일반 평민과 서민층이다. 이후 양반층을 흡수하며 상층 문화적 요소를 갖추긴 하지만 일부일 뿐, 그렇기 때문에 판소리에는 당시 일반 민들의 애환과 정서, 문화가 그대로 묻어난다. “그래서 판소리를 보고 있자면 한 폭의 풍속화를 보는 듯, 생생하죠”라고 손양희 선생은 덧붙인다.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현재 불리어지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 하며, 손양희 선생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전수 조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이수자,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흥보가> 이수자이다. “소리광대는 더 좋은 소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독공하는 과정을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되풀이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은 늙어가지만 소리는 젊어진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죠”라고 말하며 춘향가의 한 소절을 들려주시는 손양희 선생의 소리에는, 그 말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카리스마과 혼이 담겨져 있다. 단지 한이라는 정서에 매몰되지 않고, ‘시김새’를 통해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을 자연스럽게 소리로 갈무리해 표출해 내는 선생의 ‘춘향가’는 판소리의 미학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소리는 내 삶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소리는 내 삶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포기하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며, 지친 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고 다독였죠”라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는 손양희 선생. 선생의 20대에 소리는 삶을 살아갈 이유였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글짓기에 미술, 체육까지 예체능에는 타고난 감각의 아이가 손양희 선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어머니의 헌신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손양희 선생에게 고등학교 2학년 어머니가 쓰러져 뇌수술을 받던 그 시간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무용을 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쓰러져 수술을 받으시고 살아날 가능성이 10%라는 의사의 소견 아래 중환자실에서 3개월 가량 누워계시면서 가세가 기울었죠. 18살의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까지는 어머니를 보살피며 살아야한다는 생각 뿐이였습니다”라고 말하는 손양희 선생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돈이 들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손양희 선생은 신문에서 본 ‘국악무료강습회’에서 판소리와 탈춤을 배우게 되었다. 집안의 유일한 경제원이었던 언니가 어머니가 쓰러진 후 1년 만에 시집을 가면서, 어머니의 부양은 온전히 선생의 몫이었다. “수술은 성공했지만 어머니는 사람만 알아볼 뿐, 말을 못하시고 한쪽 팔 다리를 사용하실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아 가야한다는 생각에 좌절할 틈도 없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력에 취업해서도 일이 끝나면 밤 1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10여년을 매일 같이 코피를 흘리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판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손양희 선생은 비온 뒤의 땅이 더 단단해지듯, 당시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선생의 소리에 삶의 희노애락이 구성지게 묻어나는 것은 그래서 청중을 압도할 전율과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은 손양희 선생의 애환이 소리의 깊이를 더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밤, ‘내가 나에게 주는 격려’로 스스로를 다독여 온 손양희 선생은 지금도 눈물 자국이 있는 당시의 일기장을 보면서 당시의 자신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예술의 꽃 판소리로, 최고의 공연을 피우다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 즉 창조적인 변이형을 자유자재의 성음으로 구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진하는 손양희 선생은 1995년, 손양희국악예술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지역의 판소리 문화 전파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20대부터 두각을 나타낸 손양희 선생은 서울 중앙 무대로의 스카웃 또한 부지기수로 받았지만 끝까지 지역을 지키며 남도의 소리를 계승 전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경남이 판소리의 고장이지만, 공연문화나 국악에 대한 지원, 후진양성에 있어 어느 지역보다도 열악합니다”라고 말하는 손양희 선생은 “국악의 뿌리가 약하다는 그 말은 반대로, 제가 해야 할 몫이 더 크고, 중요하다는 의미기기도 합니다. 국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인의 국악인으로 남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지역에서 다양한 국악 공연이 기획되어, 여러 사람이 판소리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도록 역할하고 있는 손양희 선생은 1996년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를 주최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국 국악 신인을 발굴, 육성하여 권위 있는 국악 등용문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창원을 배경으로 매년 개최된 창원전국국악경영대회는 13회를 맞으면서 21세기 한국 전통예술을 창달하는 대표적 국악대회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 경남최초 창극 공연인 ‘황진이’를 기획 제작했으며, 2009년에는 수궁가 ‘토끼야 수궁가자~’를 성황리에 마친 손양희 선생은 창극 ‘시집가는 날’을 현재 준비하고 있다. 경극, 가부기, 오페라와 함께 세계적 4대 가극으로 손꼽히는 창극을 지역에서 최고의 퀄리티로 구성해 낼 수 있는 것은, ‘최고의 공연만을 선보이겠다’는 손양희 선생의 예술 혼 때문이다. 

손양희 선생은 또한, 2007년 창원 어린이 국악단을 창단해 매년 완성도 높은 정기 공연을 추진해 오고 있다. “지역에서 뜻있는 분들이 모여 십시일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손양희 선생은 “하지만, 아직까지 국악에 대한 관심이 낮고, 인프라와 지원이 열악해 매년 어려움에 직면합니다”라고 덧붙이며, “무엇보다 한국 국악계의 미래 인재가 될 ‘창원 어린이 국악단’이 시립으로 전환되어, 더 많은 지원 속에서 다양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강조한다.     
끝으로 “통합창원시에 시립국악단이 없는 것과 경남권역의 대학에 부산을 제외하고 ‘국악과’가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지역에 시립국악단이 창단되고 창원대학교에 국악과가 신설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나갈 계획입니다”라고 말하는 손양희 선생.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기에 이 자리에 설수 있었다고 말하는 선생은 자신과 같이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소리를 배우고자 노력하는 제자들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오늘도 창원 어린이 국악단 학생들과 7월24일부터 떠날 ‘15박 16일 캄보디아 공연’의 마지막 리허설을 위해 분주한 손양희 선생,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판소리를 계승하여 한국음악의 깊이와 한국인의 미학을 소리로 승화하고 있는 손양희 선생의 열정과 노력이 불씨가 되어, 조상의 얼을 계승하고, 현대적 전자음악과 사운드에 지쳐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이완하는 주요 매개체로 국악과 판소리가 재평가되어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그 위상이 다시금 고취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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