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잡지쟁이의 끈질긴 열정과 희망
정보의 꽃과 지식의 샘물 사이에 ‘잡지’가 존재한다. 주간, 월간, 혹은 계간의 간격으로 세상에 나타난다. 마치 그윽하게 발효되고, 담백한 영양분이 가득한 요리와 같다. 만들어지는 과정의 여유로움 덕분에 시기와 계절에 맞는 각종 이야기들을 담은 성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러한 잡지의 특성을 ‘시대의 표정을 담은 거울’이라 풀이했다.
해방 전후 신지식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절 잡지의 활약은 대단했다.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 교육, 문화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의 양분을 공급하는 훌륭한 매개체였다. 신문의 정보와 책의 지식을 고루 갖춘 잡지의 특성 덕분이었다.
이렇듯 각 매체의 장점을 모두 가졌지만, 이 땅에서 잡지의 르네상스 시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언론분야에서는 정보의 갑옷으로 치장한 변종도서라 했고, 출판분야에서는 지식의 투명도와 깊이가 얕다며 서출(庶出) 취급을 했다. 100년이 넘는 역사와 4,000여 종에 육박하는 발행규모에 비해 그 지위와 가치가 영락없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구나 인터넷과 모바일이라는 신매체가 완전히 자리매김한 후 잡지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일반화 되었고, 잡지판매나 광고판매 그 자체만으로 흑자를 보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로 시장은 엄혹해졌다. 도처에 무료로 보고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유가매체 시장이 전반적인 침체기에 접어들었지만 그 중에서 잡지업계가 받은 타격은 더욱 크고 깊었다.

33년 외길을 걸어온 ‘잡지쟁이’. (사)한국잡지협회(이하 잡지협회) 이창의 회장은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다. 1970년대 후반 잡지사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후 줄곧 잡지와 관련된 일에 종사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조선매거진(주) 대표이사이며 여성조선, 이코노미클러스, 월간 산 등 월간지 8종의 발행인이다. 그야말로 기자작성, 편집, 기획, 판매, 광고영업, 관리업무 등 잡지와 관련된 모든 일을 섭렵한 살아있는 역사이자 증인인 셈이다.
그런 그가 지난 2월24일, 잡지협회의 제39대 신임회장에 선출됐다. 그런데 취임 후 불과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 4월7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잡지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이라는 견고한 로드맵과 예산 433억 원 지원 결정 소식을 전격 발표했다. 이는 ‘얻어 걸린 행운’이거나 이 회장이라는 초인이 행한 갑작스런 기적이 아니었다. 잡지쟁이 이창의 회장이 지난 7년 간 잡지협회 이사, 부회장으로서 ‘잡지진흥법’제정을 추진하고 국회와 정부부처를 오가며 성실하고 끈질기게 다져온 열정과 희망의 산물이었다.
대나무숲의 늦은 아침
“신문과 책의 장점을 고루 갖췄지만, 그것이 오히려 잡지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건 마치 풀과 나무,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대나무의 처지와 닮아 있는 셈이죠.”
이와 함께 이 회장은 잡지업계 내부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의 역사이자 산증인인 그가 단호한 어조로 내부를 질책한다는 게 조금 의아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종사자들의 무능과 나태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련스러우리만치 묵묵하게 자신들의 일에 몰두해온 오랜 동지이자 후배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한껏 기지개를 켠 나무가 더 많은 햇빛과 바람을 맞게 되는 법이다. 잡지인을 천직으로 삼아 신산스럽게 초년을 관통한 이 회장은 자신이 발행인의 자리에 오른 뒤부터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마음속에 고인 안타까움을 직접 씻어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우선 잡지협회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과 통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목소리를 내는 언론인의 단체라 하기엔 여러 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게 사실이죠.”
2005년 잡지협회 이사로 나선 후 협회가 회원들의 오롯한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애썼고, 2007년과 2009년 각각 부회장과 수석부회장에 선임된 후에는 제38대 회장과 함께 ‘일하는 협회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회장의 신념과 열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메마른 들판의 들불처럼 변화와 희망의 조짐이 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토록 절실했던 ‘잡지 등 정기간행물 진흥에 관한 법률’이 2008년 제정됐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법률을 조기 시행시키기 위해 ‘잡지진흥법 추진위원장’을 맡아 ‘잡지진흥 5개년 계획’을 총괄 지휘했다.
이렇듯 한 겹씩 세월과 열정을 버무리고, 한 걸음씩 내디딘 결과 433억 원에 달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예산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최종 단계에서는 이 회장이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잡지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는 후문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4억~5억 원의 예산이 지원됐지만 4,000여 개가 넘는 잡지사들을 지원하기에는 턱 없이 모자란 금액이었죠. 이번에 발표한 5개년 계획과 문화부 예산 유치는 우리 잡지산업의 목마름을 채워줄 우물을 파는 첫 삽입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이야기죠.”
그는 ‘시작’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실었다.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그의 미소는 잡지계라는 음습했던 대나무숲에 늦은 아침이 오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습한 음지에서 자란다는 대나무. 풀도 아니요, 나무도 아닌 외로운 그 식물에는 풀과 나무가 가지지 못한 독특한 운치가 있다. 그 은은한 존재가치의 대가가 바로 외로움이요 쓸쓸함이 아닐까 싶다. 예로부터 선비가 가진 절개와 신념의 상징으로 전해온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여겨진다.
개혁의 돛을 떠미는 긴 호흡

그는 업계가 들썩일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냈음에도 보다 근본적인 도약과 발전에 대한 장기계획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은 결코 긴 기간이 될 수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준비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컴퓨터 자판이나 인쇄기가 콘텐츠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결국 기자들과 종사자들이 발로 뛰고 심장으로 녹여 빚어내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해답은 매우 간단해지는 것이죠.”
인터넷과 모바일 그리고 디지털TV에 이르기까지 각종 뉴미디어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이 회장이 제시하는 해답에 업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함축되어 있는 셈이다. 도제식 인재양성이 일반화 되어 있는 풍토 속에서 표준화된 종사자 교육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그의 지론대로라면 미디어의 형태라는 그릇의 모양이 바뀌어도 그 속에 담기는 콘텐츠는 변하지 않으며 그것 또한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업계의 부흥, 잡지의 르네상스를 선언할 수 있는 시점은 잡지와 독자가 원활하게 소통하고 교감하는 순간을 뜻합니다. 콘텐츠가 얼마만큼의 설득력과 매력을 갖췄는가가 관건이라는 이야기죠. 이는 우리가 지금부터 해나가야 할 작업이 정부나 제도가 아닌 우리 자신과 독자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원활한 소통통로를 확보하느냐의 문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교육지원을 통한 종사자 역량강화와 함께 ‘발행인들의 친목모임’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잡지협회의 위상을 높여나가겠다고 다짐했다. 협회와 회원들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독자와의 소통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수습기자부터 발행인은 물론 독자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커다란 울타리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쉽고 가깝게 다가와 미래의 희망을 제시할 수 있도록 문턱도 더욱 낮출 것입니다.”
이 회장이 적극 검토하고 있는 한국잡지기자협회 창립이 바로 그 첫걸음이다. 타 언론분야 소속 기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잡지사 기자들에게 자긍심과 소속감을 불어넣어 현장의 저변에서부터 활기를 불어넣어 보겠다는 그의 복안에서 탄생한 기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호흡은 역시 길고도 깊었다. 혁신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준비하고 또한 실천하고 있었지만 천직인 잡지인으로서 몸에 밴 긴 호흡은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무릇 개혁은 얼마간의 풍파를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이창의표 개혁’이 오히려 돛을 떠미는 바람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잡지인의 심장 그리고 굳은살
경력과 그 깊이는 아직 일천하나 본 기자 역시 엄연한 현직 잡지인이다. 이창의 회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가 조목조목 짚고 긁어주는 대목들이 그럴 수 없이 명쾌하고 시원하게 여겨졌던 것도 그가 33년 동안 온몸으로 관통하며 쌓아온 관록 덕분이었다.
“현장에서 신문사 등 다른 미디어의 기자들과 함께 취재활동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편견과 차별을 겪어 왔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현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계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오로지 내 사랑하는 매체가 가진 매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잡지쟁이로 살아온 지난 33년의 세월이 자신의 심장에 굳은살로 남았다고 회고했다. 또한 이는 잡지협회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과감하고 열정적인 활동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 든든한 갑옷이 되어 준다며 웃어 보였다.
본 기자 역시 정부청사를 비롯한 숱한 취재현장을 뛰어다니며 연유를 알 수 없는 왜곡된 시선에 적지 않은 설움을 겪은 바 있다. 하지만 이창의 회장처럼 본 기자의 상처는 굳은살이 되지 않을 듯싶다. 아문 상처 위에 다시 상처가 생겼을 때만이 굳은살이 생기는 법이다. 잡지협회와 이창의 회장의 힘찬 도전이 잡지인으로서 현장을 누비고 있는 현직 잡지인과 예비 잡지인들에게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한국잡지협회의 끈질긴 열정, “본격 시동 걸었다”
문화체육관광부 2016년까지 433억 원 지원 이끌어 내

이로써 뉴미디어 시대에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국내 잡지산업의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보다 분석적으로 위기를 진단하여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문화부와 잡지협회는 TF팀을 구성, 여러 차례의 회의 끝에 최종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전해졌다.
‘잡지산업 진흥을 위한 5개년 계획’의 4대 핵심 과제는 ▲잡지 산업 진흥 인프라 구축(45억 원) ▲잡지 콘텐츠 품질 제고 및 디지털화 지원(240억 원) ▲유통 구조 개선 및 독자 저변확대(77억 원) ▲글로벌 경쟁력 강화(71억 원)이다. 16개의 세부 사업에 총 433억 원을 지원할 계획이며 2012년에 50억 원 지원 등 5개년(2013년 90억 원, 2014년 94억 원, 2015년 95억 원, 2016년 104억 원)에 걸쳐 점진적으로 지원액을 늘려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소요 예산의 재원은 국고 184억 원, 언론진흥기금 226억 원, 민자 17억 원, 기타 6억 원으로 충당된다.
이와 함께 잡지산업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와 창의 인력에 대한 시상을 확대 실시하여 잡지 인력의 사기 진작과 잡지 산업 진흥 분위기를 진작할 계획이며, 그간 고질적인 걸림돌이 되어온 인력 부족 및 교육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 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잡지 유통과 판매 부수 데이터의 집계가 어렵고 잡지사의 효율적인 재고 관리가 쉽지 않은 상황을 고려해 정부는 업계와 협력하여 일원화된 공동 판매망 구축을 통해 잡지 유통 부담을 낮춰 잡지 종의 다양성 보장과 원활한 유통·판매를 지원할 예정이다.
이날 잡지협회 이창의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오늘은 잡지인으로서 상당히 의미 있는 날이며, 일본ㆍ중국 등 주변국가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잡지계가 오늘 이 자리를 주목하고 있을 것”이라며 “문화부에서의 정책 수립은 완성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예산 확보가 절실한 시점이기 때문에 계획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우리 잡지인들이 똘똘 뭉쳐 결실을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