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영재의 전당 KAIST 가로지르는 죽음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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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영재의 전당 KAIST 가로지르는 죽음의 행렬
  • 정대근 기자
  • 승인 2011.04.1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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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과 효율 중심의 개혁정책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올해 들어서 학생 4명이 자살한 KAIST에서 이번에는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4월10일 오후 대전시 유성구의 한 아파트에서 이 학교 생명과학대 박모 교수가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이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박 교수의 아내는 “연락이 안 돼 내려와 보니 남편이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숨진 박 교수는 주방 가스배관에 붕대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또한 “애들을 잘 부탁한다.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이 담긴 A4용지 3장 분량의 유서가 발견됐다. 이에 경찰은 “유서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KAIST 학생들의 자살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학생들에 이어 교수까지 자살
숨진 박 교수는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KAIST에 대한 종합감사를 벌였고, 이 결과 연구 인건비와 관련한 유용혐의가 포착돼 학교 차원의 징계와 검찰고발 방침을 통보받아 고민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동료교수들에 따르면 박 교수가 이 문제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고 말했다.
KAIST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일부 교수들이 외부 업체와 연구용역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대가성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올해 2월 교과부로부터 종합감사를 받았다. 감사 결과 연구비 관리와 시설공사 비리 정황이 포착됐고, 교과부는 이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중징계를 학교 측에 요구했다. 또한 검찰 고발도 검토 중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월, ‘올해의 KAIST인상’을 수상한 바 있는 박 교수는 1996년 부임한 생명과학 연구 분야의 국내 최고 연구자다. 그는 고분자물질을 이용해 암이나 유전자 질병을 치료하는 연구분야에서 국제적인 명망을 얻어왔다.
지난해 2월에는 221건에 달하는 과학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 등의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KAIST 정교수 가운데 1명을 선정하는 '최우수 교수'에 꼽혔고, 2009년 4월에는 미국 생체재료학회가 주는 클렘슨상(Clemsen Award)을 수상했다. 클렘슨상은 생체재료 분야 세계 최고 학자들에게만 주는 상으로, 미국인이 아닌 박 교수가 받은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박 교수는 지난 2008년 7월 새로운 항암 물질을 개발해 쥐 실험에서 항암효과를 입증했으며, 이 연구결과가 약물전달 분야의 국제학술지인 '저널 오브 컨트롤드 릴리스(Journal of Controlled Release)'의 표지 논문으로 게재했다. 지난해 열린 '2010 세계해양포럼'에서는 홍합과 도마뱀 등 생물에서 추출한 물질을 수술용 봉합실로 사용하는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2010년 1월에는 차세대 핵산계열 약물인 소간섭 RNA의 세포 내 전달을 극대화시키는 획기적 나노약물전달 시스템을 개발,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지에 싣기도 했으며, 2009년 12월에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10년간 과학기술분야에서 최고 성과를 낸 연구자 6명에게 주는 창조대상도 받았다.

실적과 효율에 내몰린 학생과 교수들
일각에서는 실적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서남표 총장의 개혁정책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 총장은 교수들의 정년을 보장했던 테뉴어 제도를 손보고, 100% 영어강의를 실시하는 등 교수사회를 경쟁 속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2006년 취임한 서남표 총장은 테뉴어 심사를 강화해 4년 동안 모두 148명의 카이스트 교수 가운데 24%를 탈락시켰다. 이는 '철밥통'으로 불렸던 한국 교수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긴 일대 사건으로 기록됐다.
또한 100% 영어강의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까지 힘들게 만드는 경쟁 우선 정책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외국인 교수나 젊은 교수들의 경우 영어강의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영어에 서툰 일부 교수들의 경우 강의에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는 것. 하지만, 숨진 박 교수는 2007년 테뉴어 심사를 통과했고, 탁월한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지난해 최우수 교수로 선정됐기 때문에, 서 총장의 개혁 정책에 따른 불상사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최근 잇따라 목숨을 끊은 학생들의 경우 징벌적 수업료 징수와 전 과목 100% 영어강의, 입학사정관제 등 서남표식 개혁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1월 숨진 조모(19)군은 전문계고 출신으로 KAIST의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해 입학했으나, 이번 학기 일부 과목에 대해 학사경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고, 지난 7일 숨진 박모(19)군의 경우도 '등록금만큼은 내면 안 된다, 부모님께 미안해서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것으로 전해지는 등 '징벌적 수업료 징수'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KAIST 학생들은 원칙적으로 수업료를 내지 않지만 2007학년도 신입생부터는 학점 4.3 만점에 3.0 미만인 학생은 최저 6만원에서 최고 600여만원의 수업료를 내야 했다.

서남표 총장 사퇴 요구 목소리 높아
3월11일,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민교협)와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는 서울대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남표 총장이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교협 등은 “서 총장이 KAIST에서 징벌적 차등 등록금제와 영어 몰입교육 등 유례없는 경쟁 교육을 실험했다”며 “학생들은 대학이라는 생존 게임의 장에서 살아남는 기술만 배우고 창의적 능력은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서 총장은 자살 원인을 학생들의 의지박약으로 돌리고 있다”며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교육 환경을 제공한 만큼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한편 참여연대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 이유로 꼽히는 ‘징벌적 차등 등록금제’와 8학기 이상 재학 시 800만원을 내게 하는 ‘연차 초과제도’, ‘재수강 3회 제한 제도’ 등에 위법성과 공익 저해 요소가 있다며 이날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했다.
이들은 “서남표 총장의 정책은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헌법 10조, 고급 과학기술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을 밝힌 카이스트법 1조에 어긋나며 카이스트 학부생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제도”라고 비판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에는 야당 등 정치권에서 사남표 총장의 사퇴론이 쏟아져 나왔다. 민주당 전현희 원내대변인은 “성적에 따라 등록금이 결정되는 경쟁지상주의에 빠진 카이스트 당국은 반성해야 한다”며 정부 대책을 촉구했다. 교육과학기술위 민주당 간사인 안민석 의원은 “무겁고 통렬한 마음으로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서 총장 책임론을 제기했다.
또한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서 총장의 개혁은 ‘학생잔혹사’인 것으로 증명됐다”며 서 총장 사퇴를 요구했다. 진보신당은 서 총장 사퇴를 주장한 뒤 ‘학생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한나라당 김대은 수석부대변인은 “시스템 전반을 점검하라”며 카이스트의 변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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