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착공에서 준공까지 고객만족이 최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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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착공에서 준공까지 고객만족이 최우선
  • 취재_정용일 차장
  • 승인 2011.04.0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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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나의 아내였다”

코스피지수 2000돌파와 삼성전자의 100만 원 돌파 소식은 국내 경기에 탄력을 불어넣는 듯 했으나 일본의 대지진과 원전폭발은 세계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일본의 이번 재앙이 단기적인 영향을 줄 것은 분명하나 중/장기적으로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란 견해를 내놓고 있다. 국내에는 수많은 강소기업들이 즐비하며 이들은 국가경쟁력의 튼튼한 버팀목 역할을 해내고 있다. 지금처럼 세계경제가 어수선할 때 각 산업 현장에서 브레인들의 활약은 한국경제 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그 어느 때 보다 클 수밖에 없으며, (주)태민씨앤씨의 경제브레인 김용태 대표는 ‘작지만 강한 기업’의 저력을 보란 듯이 보여주고 있다.

하자율 0%, 안전사고율 0%의 시공

“대한민국에서 기계설비공사와 전문소방공사로 단연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는 (주)태민씨앤씨의 김용태 대표의 목표는 사실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현재 (주)태민씨앤씨는 업계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을 작정이다. ‘미래를 만들어 가는 회사’로 성장시키기 위해 김용태 대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쉼 없이 질주하고 있다. (주)태민씨앤씨는 전문건설업인 기계설비공사업, 전문소방시설공사업 등 각 분야에서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기술진으로 구성되어 공사착공에서부터 준공까지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퀵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품질 면에서도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인증한 ISO 9001(인증번호 JK-14511)을 취득해 고객감동을 실현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를 토대로 (주)태민씨앤씨는 시화대단위부지공장신축공사, 한국타이어 금산공장, 양평펠리스아파트, ENF아산공장, 능곡역사 외 3개 역사와 을지로119안전센터, 강화여고 외 5개 학교를 시공했으며, 인천 논현지구 내 상업용 건물 등 다수를 시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회사의 주된 공사는 관급공사다. 다수의 관급공사 시공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일조하고 있으며, 특히 현재 시공 중인 영종도 인천하늘고등학교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공사는 지역사회 발전에 토대가 되는 공사여서 유독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작업에 임하고 있다는 것이 김용태 대표의 설명이다.

또한 (주)태민씨앤씨는 시공을 마친 건물이 하자율 0%에 근접하도록 품질관리를 철저히 한다. 각 공정별로 시공 시 공정검사를 자체적으로 시행하며, 철저한 안전관리로 작업 시간 전 작업자들의 개인 안전장비 및 시공에 대한 현장회의를 매회 실시해 안전사고율 0%의 시공을 하고 있다. 이처럼 (주)태민씨앤씨는 미래에 대한 도전정신과 건설 분야에서의 창조적인 사고방식과 고객에 대한 신뢰로 고객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금 2억, 새로운 시작! “당신은 반드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

(주)태민씨앤씨는 설립 이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김용태 대표는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의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린다.
군대를 전역한 후 20대 초반에 건설현장에 뛰어든 김용태 대표는 하루 일당 1만 8,000원을 받아가며 생활했다. 일이 없어 굶어야할 때도 있었지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꿈을 안고 항상 이상을 찾으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그의 인생이었다.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단 한 건의 공사도 수주하지 못했고,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당장은 손해를 보는 일이라도 내색하지 않고 근면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주변건설사 사람들에게 서서히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는 김 대표의 말처럼 회사는 신임을 얻으면서 공사수주 건수가 꾸준히 들어나 2008년 후반부터 점차 안정권에 들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2009년 4월에는 자본금 2억 5,000만 원을 증액해 총 자본금이 4억 5,000만 원이 되어 회사는 더욱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했다. 그해에는 회사를 지금의 인천 구월동으로 이전도 했다. 그리고 2010년 3월에는 전문소방시설공사업 면허까지 취득했다. 아내가 그를 격려해줄 때 해주었던 말처럼, 정말 회사 설립 이후 바빠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면서 지내왔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회사를 볼 때마다 그는 뿌듯하고, 지금껏 함께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주)태민씨앤씨의 성장은 결코 김용태 대표의 자평만이 아니다. 각종 감사패와 공로상이 이를 증명한다. (주)태민씨앤씨는 건설회사로부터 각종 감사패를 받았는가 하면 인천 지역 사회발전에 큰 일익을 담당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이제 (주)태민씨앤씨는 인천지역 전문건설(기계설비공사/전문소방시설공사) 분야에서 뛰어난 실적을 쌓고 있는 것은 물론 명실상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기업으로도 성장했다.

그렇다고 김용태 대표가 여기서 안주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고객감동 실현’이라는 최종의 목표를 더욱 완벽하게 달성하기 위해 그는 조금 더 멀리 내다보고 달릴 생각이다. 과거를 발판삼아 현재를 치열하게 살며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기업, 이것이 그가 그리고 있는 (주)태민씨앤씨의 미래다. “항상 원칙과 기본에 충실한 신뢰받는 기업이 될 것이며, 깨끗한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지역사회 발전의 모체가 되도록 하겠다”는 목표로 2006년 설립 이래 최고의 기술 인력과 품질시공으로 사회에 공헌해온 (주)태민씨앤씨. 김용태 대표는 “앞으로도 진취적인 생각과 화합으로 창조적인 발전을 거듭해나갈 것”이라며 “회사의 핵심경쟁력을 보다 강화해 언제나 앞발 앞서가는 기업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Q. 김 대표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불행하게도 시련은 가장 행복해야 할 시기에 찾아왔다.
1995년 결혼을 하고 아내가 둘째 아이를 낳았을 무렵, 나는 IMF라는 파고를 넘지 못하고 실직을 하게 되었다. 취직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이들은 점점 커갔다.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괴로운 심정이었으며, 아이의 기저귀를 살 돈조차 없을 정도로 빈곤해지자 지인들의 무시 섞인 시선까지 받아야만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상황에 좌절하던 나를 보며 아내는 “당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고,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면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리고 아내는 “일을 시작하면 바빠서 잘 쉬지도 못할 것이니 넘어진 김에 푹 쉬어가라”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나의 자존심을 지켜준 아내는 나를 일으켜 세운 장본인인 셈이다. 아내의 응원과 지지로 이후 부지런히 돈을 모은 나는 2006년 자본금 2억 원으로 법인을 설립, (주)태민씨앤씨의 문을 열었고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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