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권 안팎에서는 ‘강남좌파’라는 신조어가 연일 화제다. 그런데 생소한 단어가 주는 느낌은 뭔가 부자연스럽다. 부와 권력의 상징인 ‘강남’과 약자와 사회개혁의 상징인 ‘좌파’의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강남과 좌파는 물과 기름, 혹은 물과 불처럼 공존할 수도 상호 보완할 수도 없는 이질적인 존재였던 까닭이다. 그렇다면 강남좌파의 실체는 무엇일까. 지난 2005년 일부 보수진영에서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운동권 출신의 386 인사들을 비꼬아 일컫던 말이었다. 즉 고학력에 고소득자이면서 그들이 보이는 좌파적이고 친북적인 행태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였던 것이다.
진보의 분화, 강남좌파
상류층 진보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단어는 서구사회에서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미국에서는 ‘리무진 리버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고급 승용차인 리무진을 타는 부유층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척 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프랑스의 ‘고슈 카비아’도 마찬가지다. 상류층을 위한 최고급 철갑상어알을 즐기는 좌파들을 비꼬고 있다.
이 외에도 영국 런던의 부촌 햄스테드 거주 부자들이 노동당에 표를 몰아주는 현상을 비꼬는 ‘햄스테드 리버럴’을 비롯해 따뜻한 응접실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사회주의에 관한 잡담을 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19세기 러시아의 철학자의 말에서 유래한 ‘샴페인 코뮤니스트’도 있다.
우리나라의 강남좌파도 비슷한 맥락이다. 의사, 변호사 등 고학력 출신의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면서도 진보와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부와 권력을 거머쥔 기득권층, 즉 우파에 속하지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생각과 실천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이전의 전통적인 좌파들과 다른 행태를 보인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전의 좌파들이 주로 노동조합 등을 중심으로 기득권층과 첨예한 대립 및 충돌양상을 보여 왔다면, 강남좌파는 상대적으로 세련되고 부드럽게 사회개혁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계층이 출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나돌 뿐 명확하게 짚어낼 수 없다. 대학시절 운동권 참여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일찍 눈 뜨게 된 이들이 사회에 진출해 성공을 거둔 후 당시의 체험을 상기하며 일종의 부채를 갚아나가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탄탄한 조직력을 자랑했던 과거 학생운동권의 연장선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대학시절 구성됐던 인맥과 학연이 사회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강남좌파로는 조 국 서울대 교수, 강금실 前 법무장관, 박찬욱 영화감독, 장하성 고려대학교 교수 등이 꼽히고 있다. 특히 서울법대와 UC버클리 출신의 조 국 교수는 최근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 공동으로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을 내고 강남좌파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그는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 진보세력이 재집권하기 위한 이념적 당위성과 전략을 전파하고 있다.
진보세력의 또 다른 형태인 강남좌파의 등장은 변화된 정치, 사회환경에 따른 자연 선택적 진화라는 주장도 있다. 우파의 또 다른 형태인 뉴라이트의 등장과 성장과정이 비슷한 논란이 일으켰다. 뉴라이트라 불린 자유주의연대가 2004년 출범했을 때 좌, 우파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야 했다. 뉴라이트에는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던 까닭에 좌파진영에서는 변절자 집단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우파들은 ‘좌파들의 불순한 전향’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뉴라이트의 등장 배경에는 1997년과 2002년 잇따라 대선에서 패배한 우파진영의 우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우파의 존재나 미래에 대한 재정립이 절실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뉴라이트는 기존 우파에 대한 강도 높은 자기비판으로부터 시작됐다.
강남좌파의 등장배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2007년 대선에서 보수진영에게 정권을 빼앗긴 후 차기 대선의 전망도 그리 밝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강남좌파는 기존의 진보진영과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유럽식 복지국가를 선호하고, 북한을 서슴없이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등장 초기 보여줬던 통렬한 자기반성 혹은 자기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강남좌파의 등장은 이념적 다원화의 반증
이런 까닭에 강남좌파는 ‘의식과 물질이 따로 노는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기득권의 이중 잣대를 갖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양극화 방지나 인권, 그리고 평등개념 등 이들의 의식적 진보성이 많은 사회운동과 변혁운동의 원동력이 되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문화영역에서 강남좌파의 독특한 형태는 우리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의식과 물질이 따로 노는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기득권의 ‘이중 잣대’ 를 갖는다는 비판도 받지만, ‘사회 양극화 방지’ ‘인권’ ‘평등개념’등 이들의 의식적 진보성이 많은 사회운동과 변혁의 동인이 돼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문화영역에서 강남좌파의 독특한 캐릭터는 우리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강준만 교수는 사회양극화 방지, 실천 없는 재츠처 등 강남 및 문화좌파의 장단점을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 강 교수가 내린 강남좌파의 정의는 ‘생각은 좌파적인데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다’이다. 즉 몸은 상류층인데 의식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의미다. ‘강남’이라는 단어는 실제 거주지역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생활수준을 향유하는 계층’을 상징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물질과 의식이 따로 노는 강남좌파들의 경향이 위선이나 허위의식이라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양심적 부르주아로 통칭되는 다양한 지식인, 전문직 종사자들의 의식적 진보성이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회변혁과 운동을 주도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정계에서는 판사 재직 시 수많은 시국관련 판결에서 이름을 빛내며 민변 부회장, 부패방지위원회 위원 등으로 참여한 강금실 前 법무장관이 있다. 그녀는 1988년 민변 창립을 주도했고, 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꼐 굵직한 인권사건 변론을 맡은 바 있다. 그리고 1993년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모임에 참여했던 천정배 前 법무장관 역시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학계는 참여연대에서 삼성전자, SK텔레콤 등을 상대로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했고, 현재는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의 고문으로 활동 중인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이 있다.
문화계에서는 2003년 미군에 의한 여중생 장갑차 사건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영화인을 대표해 삭발을 하고 이후 2004년 민주노동당 공개지지를 선언한 박찬욱 영화감독이 있다. 또한 명계남 영화배우이자 이스트필름 대표는 1999년 스크린쿼터 감시운동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해 2002년 노사모 회장을 맡으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대선 이후 생활정치 네트워크 ‘국민의 힘’을 결성해 인터넷 시민운동에 힘을 싣기도 했다.
영화배우 문소리 씨는 대학시절 각종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고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연극에 출연하는 등 진보성향의 작품에 다수 출연하는가 하면, 진보신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 역시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강남좌파들의 경우 인권과 양성평등과 같은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 진보입장을 취하는 특징을 보인다. 정치적으로 진보를 표방하고 있지만 자기 이익과 관련된 교육, 기업규제, 정규직, 세금문제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보수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일각에서는 강남좌파의 존재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의 다양성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영역과 이슈별 입장이 다른 것은 이율배반과 자기모순이라기보다는 이념적 다원화의 반증이라는 것이다.
역할과 평가 그리고 미래
강남좌파의 사회적 역할과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우선 긍정적인 시각에서는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게 하층계급에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상류층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득권이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이어 갈등의 양극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있다. 모든 상류계급은 보수이고 반대로 모든 하층계층은 진보라면 갈등이 더욱 첨예하고 살벌해지겠지만 상류층에도 진보가 있고, 하류층에도 보수가 있다는 건 양쪽의 극단적인 충돌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 볼 때 제기되는 문제도 만만치 않다. 먼저 부와 권력을 동시에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양심과 정의의 수호자로 평가받는 이른바 상징자본까지 갖겠다는 건 지나치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강남좌파가 추구하는 진보는 하층계급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에 진정성이 결여돼 있으며 상징적 재스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제기 되고 있다.
또한 강남좌파의 진보는 말로만 강경한 속성이 있어서 실천보다는 당위의 역설로 그칠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해낼 수 있는 실천마저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강남좌파에 대한 평가는 계층적 속성이 아니라 각 인물별, 사안별로 구체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 공정하는 대안이 제시됐다. 어쨌든 보수와 진보의 경계에 존재하며 고정된 이념에 쉽게 경도되지 않는 이들의 진로가 주목되고 있다.
강남좌파를 '부와 권력을 가졌으나 사회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로 평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들을 현실주의자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체제의 모순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고 자시의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계층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가교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린 주장이다.
어느 정도 다른 계층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의 계급도 일부 양보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강남좌파의 긍정적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남좌파들이 전통적 좌파들로부터 존경받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보수층처럼 행동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짚어내기도 했다. 사회개혁과 변혁은 모든 계층이 사회 안의 이익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계층만이 이득을 보고 다른 계층이 피해를 본다면 오랫동안 평화롭게 사회가 안정될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범위를 정해 이익 균형을 잡는 것이 정치라하고 볼 수 있는데, 강남좌파들의 본질은 우파이면서 좌파처럼 보이는 행동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의심과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명확한 실체를 드러내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래야 진정한 좌파들이 혼동하지 않고 누구를 지지해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좌파(左派)의 어원과 우리나라의 좌파 역사
급진적 프랑스 혁명세력이 의회 좌측에 앉은 데서 유래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변혁에 온건한 입장을 표방했던 지롱드당이 의회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상대적으로 급진적이었던 자코뱅당은 의회의 왼쪽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좌파의 어원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단어는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좌파는 항상 변화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뜻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을 좌파로 볼 수 있으며 실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중세 유럽 봉건시대 때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상인세력이 좌파였으며, 봉건영주에 맞서 농노들의 권익을 지키려고 한 사람들이 또한 좌파였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는 절대군주의 권력에 맞서 프랑스 전체 시민의 권리를 지키려고 한 사람들이 좌파로 불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속에 현재의 시각에서 우익으로 분류되는 부르주아도 포함됐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좌파는 1910년대 말 상하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을 그 시초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조선공산당 결성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 공산주의 운동은 북한보다 남한에서 활발했으나 유상몰수, 유상분배 성격의 토지개혁으로 일부 소작인이 토지를 소유하는 혜택을 받게 됐고, 남로당 및 조선공산당의 주요 당원이 검거되면서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주요 지지계층과 핵심 활동가의 정치적 제거로 인해 세력의 축소와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된 것이다.
더구나 5.16군사쿠데타 이후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독재정권의 등장으로 남한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함께 민주화운동까지 공산주의나 북한의 지령을 받은 친북세력으로 매도되거나 인혁당 사건처럼 국가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탄압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북한에 동조하거나 그 주장과 비슷한 이념’을 좌파 또는 좌익으로 규정하고, 국가보안법을 통해 이들을 처벌하고 있다. 좌익이라는 용어보다는 ‘급진적 좌경세력’이란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좌익이 반드시 공산주의자를 뜻하지 않음에도 이와 같이 통용되어 좌익이라는 용어를 스스로 사용하는 단체는 없다. 대신 어감이 조금 더 부드러운 좌파하는 용어가 좌익을 대신하여 사용되고 있다.
스페인 좌우파의 상생에서 배운다
안정적인 정권 교체하는 정치문화 자리 잡아
스페인은 여러 모로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많다. 비슷한 국토면적에 인구는 4,500만 명이며 고도성장을 통해 세계경제 순위 10위권에 진입했다. 정치사 역시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 좌우세력의 극심한 대립으로 내전을 치른 바 있고, 30년 넘게 프랑코 독재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에 민주화의 역사도 30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스페인이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양상은 좀 다르다. 10년 동안 진보성향의 정부를 경험한 뒤 다시 보수성향의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준 우리 사례와는 달리 그들은 1980년대부터 좌우파가 안정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정치문화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다.
1982년 진보정부가 출범해 14년 동안 집권했고, 그 후 보수정부가 8년을 집권했다. 그리고 다시 진보정부의 연임을 맞이했다. 지난 2004년 집권한 호세 루이 로드리게스 자파테로 총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이렇듯 짧은 민주화 역사 속에서도 스페인에서 좌파가 안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념에만 집착하지 않고 유연하고 온건한 실용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986년 EU가입을 전후해 ‘적극적인 개방만이 살 길’이라며 진보정부 시절에 추진한 정책 덕분이다.
당시 스페인 진보정부는 선거 공약에서 '나토 탈퇴'를 내세웠지만 친서방정책이 국익에 도움 된다고 판단되자 집권 후 '나토 잔류'로 급격한 방향전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파테로 진보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4년 간 자파테로 총리는 경제 성장으로 늘어난 나라 살림을 성장의 그늘에 놓인 국민들한테 적극 나눠주는 분배 정책에 힘을 쏟았다. 집값 급등으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됐지만, 청년실업과 저임금 계약직의 불안한 일자리를 전전하며 극심한 생계난에 몸살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소외 계층을 위한 저렴한 공공 임대 주택을 대폭 늘리고, 대학생에 대한 지원, 육아비 지원 등을 강화했다.
비슷한 시기를 우리는 진보와 보수로 나뉜 채 서로의 한계를 지적하고 공격하기에 바빴다. 민생정책보다는 정치적 정략에 대한 논쟁이 줄을 이었고, 국민들은 극단적인 생활고로 내몰리기도 했다. 현재의 상황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만약 스페인의 사례처럼 집권한 각 진영이 상대진영의 지혜를 빌렸더라면 우리의 정치지형이나 정치문화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