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과 의지가 다져놓은 단단함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이제 너무 유명해져서 ‘표현할 방법이 많은’ (주)천호식품 김영식 회장. 산수유 건강식품 광고가 전파를 탄 지 1년이 훌쩍 넘었지만,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잔뜩 묻힌 그 오묘한 카피는 갖가지 패러디로 재생산되어 세상을 휩쓸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당분간 산수유의 메아리는 계속될 것 같다.
눈만 뜨면 온통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시대. 연예인의 대박 유행어도 채 몇 달을 넘기기가 어려운 법인데, 김 회장의 투박한 목소리가 이토록 오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더욱 기이한 것은 메아리의 진원지가 채 30초도 되지 않고 유명 연예인 하나 출연하지 않은 짤막한 광고였다는 점이다.
광고제작 비화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신제품 마케팅 회의 중 불현듯 기발한 문구를 떠올렸고, 즉석에서 제작사를 회장실로 불러 뚝딱 만들어낸 것이 대박을 쳤던 것. 덕분에 (주)천호식품과 김영식 회장은 단숨에 스타기업, 스타CEO로 급부상했다. 300여 명의 임직원들은 더욱 신이 났고, 매출액도 1,100억 원을 뛰어넘었다. 일단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27년의 경영이력과 생사를 넘나드는 질곡의 세월이 숨어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염없이 쓰러졌다가 오뚝이처럼 일어서기를 반복한 세월이었는데, 벌써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군요. 부침이 많았던 날들을 돌이켜 보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는 부산지역을 거점으로 달팽이농축액사업을 펼쳐 한때 지역사회의 100대 부자에 꼽힐 만큼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 확장과 1997년 외환위기가 겹쳐 100대 빚쟁이로 전락,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수렁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600원짜리 소시지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와신상담한 끝에 오늘날의 (주)천호식품을 다시 일으켰다.이는 TV광고 하나를 잘 만들어서 갑자기 뜬 벼락 스타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의 유행어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광고를 보고 들은 사람을 웃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우스갯소리에 그치지 않았던 것은 모진 세월과 끈질긴 의지가 다져놓은 단단함이 한 몫을 한 셈이다.
즐거움의 순환고리 만들기

“직원들에게 처음부터 200미터를 뛰어보라고 요구하면 아예 포기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먼저 뛰어온 100미터를 일깨워주고 10미터만 더 뛰어보라고 격려하면 110미터, 120미터를 뛸 수 있고 그게 쌓이면 200미터는 금방 채워질 수 있는 법이지요. 성공의 과정이나 세상살이도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성공은 있어도, 우연한 실패는 없다’라고 강조하는 김 회장.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이어온 열정적인 일기쓰기를 아직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짤막한 일기라도 꾸준하게 쓰다보면 인생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다행히 성공한 인생이라면 그와 닮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교과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기쓰기의 진가는 실패의 길목에서 발휘된다. 시간의 순서대로 가지런히 정리된 자신의 흔적을 들춰보며 잘못된 선택과 생각들을 짚어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패를 몇 번 더 경험한다고 해서 부끄러운 건 아닙니다. 일기장을 지도로 삼아 길 찾기에 골몰하다보면 성공의 열쇠를 꼭 찾아내게 되는 것이니까요. 뼈저린 실패보다는 섣부른 포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듯 뼈저린 실패를 이미 경험해 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김 회장의 직원사랑은 각별했다. ‘직원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을 목표로 세워 놓고, 임금과 근무환경은 물론이고 각종 직원복지에 내리사랑을 쏟고 있는 중이다.
회사발전을 위해 오너와 직원이 함께 노력했다 하더라도 직원들은 오너만큼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이에 직원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면 신이 나서 더 좋은 제품을 만들게 되고, 성공에 있어서 오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직원이 부자가 되면 즐겁게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제품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만든 제품은 고객들까지 즐겁게 하기 때문에 회사는 점점 더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를 테면 즐거움의 순환고리가 생기는 겁니다.”
이러한 ‘즐거움의 경영철학’ 덕분인지 (주)천호식품이 사원을 모집할 때마다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얼마 전에 단 2명을 모집하는 공고를 냈는데, 자그마치 1,500여 명이 넘는 지원자들이 몰려 진땀을 빼야 했단다.
대한민국, ‘10미터만 더 뛰어봐’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점점 커지는 동그라미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원이었지만 뱅글뱅글 돌리다 보면 어느새 스케치북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거대한 달팽이 원 말이다.
김 회장이 처음으로 그린 동그라미는 개인적인 성공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려온 원은 어느새 세상을 다 담을 수 있을 듯 커져 있었다. 사재를 털어 출산장려 정책을 펼치는 등 국력신장을 위해서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인구가 늘어야 국력도 커진다고 힘주어 말하는 김영식 회장. 그는 자신이 뛸 또 다른 10미터를 눈여겨보는 듯 했다.
월간잡지의 마감주간은 고스란히 원고와의 싸움이다. 분초를 다퉈야 하는 이 고단한 기간에 그의 이야기를 가장 나중으로 미뤄둔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인터뷰 녹음파일을 틀고 녹취를 뜨는 동안 김 회장의 목소리는 녹초가 된 기자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있었다.
“김정현 차장, 10줄만 더 써 봐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