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영화 보러 가실래요?”
20세기 초 TV가 처음 등장했을 때 머지않아 영화산업이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로서는 영상혁명으로까지 불렸다고 한다. 크기가 조금 작긴 했지만, 거실이나 안방에 앉아 온 가족과 함께 다양한 영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100년이 흘렀어도 영화산업은 건재하다. 오히려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해 멀티플렉스라는 신 개념의 영화관이 등장했으며, 3D와 4D 등 영화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그렇다고 TV산업이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니다. 둘은 상생을 유지하며 발전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이는 영화와 TV가 전혀 다른 영역이었음을 방증한다. 비록 영상과 음향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각각 만들어내는 추억의 빛깔이 분명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00년이 흘렀지만, 연인은 여전히 영화관을 찾는다. 더구나 시작하는 연인에게 있어서 그곳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첫 추억의 생산소가 된다. 이는 “함께 영화 보러 가실래요?”라는 프러포즈 멘트는 앞으로 100년이 더 흘러도 결코 진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게 되는 대목이다.
돈이 없으면 추억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는 각박한 세상. 더구나 수도 서울 한 복판에 단돈 2,000원으로 더 없이 향기로운 추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영화관이 있다. 단, 청춘 자체가 큰 축복이자 특권인 젊은 연인들을 위한 곳은 아니다. 황혼에 접어 든 55세 이상의 어르신들을 위한 ‘추억전용’ 실버영화관이다.

“초기에는 큰 빚까지 져 가며 운영해야 할 만큼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 영화관을 자주 찾으시는 어르신들께서 떡이나, 귤, 심지어 집에서 지낸 제사음식까지 싸들고 오셔서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시는데 그 분들이 전해주시는 온기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매일 영화관 앞에서 인사를 한다. 흰 머리에 허리가 굽은 어르신들을 기다리는 그녀의 뒷모습에는 애틋한 설렘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의 그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향기는 마음을 사로잡는 법
아무리 지극하다 해도 고비가 없는 사랑은 없다. 김 대표 역시 허리우드클래식영화관을 건사하며 여러 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주로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도 ‘최소한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어르신들께서 직접 서울시장과 대통령께 편지를 쓰셨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받아 몇 차례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기도 했지요. 어른신들께서 그렇게까지 저희 극장을 아껴주시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분들께서 잡아주신 따뜻한 손이 제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마다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로 마음에서 피어나는데, 그 마음이 따뜻할수록 향기는 짙고 멀리 퍼져나가는 법이다. 다른 무료시설이야 사비로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다 해도 임대료와 직원 인건비에 대한 걱정을 늘 달고 살았던 김 대표. 그 마음의 향기를 맡은 SK케미칼이 선뜻 지원해 주겠다고 나섰다.
“밤새 사업제안서를 썼습니다. 정성을 다해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는데, 반려되면 어쩌나 싶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죠. 그런데 광고를 하는 대가로 1억 2,0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지원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마치 치료비가 없어서 숨이 넘어가는 연인을 살려낸 듯 황홀하고 감사한 순간이었지요. 더욱 감사한 것은 SK케미칼의 지원이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꽃향기는 코를 행복하게 하지만, 사람과 사랑의 향기는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법이다. 이는 영화관을 운영하는 김 대표와 그곳을 찾는 어르신들의 미소로 번져나가는 중이다. 아름다운 영화관과 향기로운 사람들, 기업과의 만남. 허리우드클래식영화관에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고도 남을 온기가 머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미소를 머금은 어르신들을 만나게 되면
영화관 운영에는 김 대표의 아버지도 힘을 보태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황혼을 바라보는 연세인지라 어르신들의 마음을 헤아려 소통하는 데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녀(父女)가 작년 한 해 동안 미소를 전파한 어르신만 해도 자그마치 18만 명.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꿈꾸고 있는 사업은 끝이 없다. 어르신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사업도 준비하고 있고 외롭고 쓸쓸한 발걸음을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다방사업도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게다가 올해 세운 목표는 관객을 두 배로 늘이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고스란히 세상의 미소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점에서 인터뷰를 하는 기자의 마음까지 설레었다.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지금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잘 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노년이 되었을 때 그대로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분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열린 영화관, 그리고 사랑과 따뜻함이 넘치는 공간으로 지켜나가자는 게 제 경영철학입니다.”
여운이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잔잔한 울림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것은 널찍한 영화관 로비에서 진행된 인터뷰이어서가 아니었다. 김은주 대표의 마음 깊은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 향기로움이 기자의 마음속에 닿은 까닭이었다. 혹여 당신이 길을 걷다가 미소를 한 가득 머금은 어르신들이 무리지어 나오는 건물을 보게 된다면 유심히 그곳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곳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추억의 공간이며, 그 로비에는 오래된 연인을 기다리고 있는 아담하고 단정한 한 여인이 당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허리우드클래식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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