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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 50년, 세월만큼 쌓인 이야기들
이성원 이사장은 만성적인 적자로 허덕이던 연기새마을금고를 튼튼한 흑자 지점으로 돌아서게 만든 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날의 인터뷰는 그의 경영신화나 금융철학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흔히 금융권만큼 냉혹한 곳이 없다고들 한다. 일과를 종료하고 출입문을 봉쇄한 이후에도 직원들은 10원 짜리 하나까지 정산해내느라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철저한 정확함으로 유명한 곳이다. 수북하게 쌓여 있는 서류들과 그 속에 빼곡히 기록된 각종 숫자와 그래프들 사이에서 인간미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하지만 연기새마을금고와 이성원 이사장은 이러한 금융권의 통념을 깨는 독특한 행보를 이어가는 것으로 또 다른 명성을 쌓고 있었다. 불우청소년을 위한 희망원과 청소년상담소를 운영하는가 하면, 농촌청소년운동의 일환으로 4H구락부운동과 가축보급운동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방황하는 학생을 선도하기 위한 학교순회 선도교육 활동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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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사장은 미리 준비해 간 그의 각종 ‘선행’의 이력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기자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랬다. ‘인간사랑 50년’으로 요약되는 그의 삶에서 어쩌면 선행의 기록을 들춰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듯싶었다. 이미 1960년대부터 그의 ‘일과’와 ‘일상’은 계속되고 있었다. 흘러간 세월만큼 이에 대한 사연이 쌓인 탓에 이를 모두 들춰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불우이웃 돕는 거지대장의 역사
“1960년의 이맘때쯤이었을 겁니다. 철도공무원으로 조치원역에서 근무할 때였는데 역 주변을 서성이는 불우청소년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창 사랑받고 공부해야 할 어린 청소년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떨리더군요.”
모두가 힘들고 배고팠던 60년대. 당시 철도공무원이라면 적어도 자신과 가족의 행복은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간의 고뇌와 번민 끝에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의 심장을 떨리게 했던 거리의 아이들을 구출하고 보살펴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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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 자신의 밭이 있던 자리에 ‘희망의 집’이라는 건물을 짓고 아이들을 하나둘씩 모았다. 그리고 농사짓기, 철사 수공품 만들기 등 각종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스스로 돈을 모아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조치원직업소년학교를 설립해 더욱 본격적이고 적극적으로 청소년 선도활동에 나섰다. 그가 세운 학교에서는 해마다 60여 명의 청소년들에게 당시 ‘국민교과과정’을 가르쳤다.
이듬해에는 ‘무호적자 호적 만들어 주기 캠페인’을 벌여 전국 8만여 무호적자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국민임에 틀림없었지만, 갖가지 사연으로 호적조차 갖지 못해 유령처럼 떠돌던 이들에게 비로소 국민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되찾아 준 것이었다. 법무부는 이 이사장의 공로를 인정해 ‘인권옹호대상’을 수여했지만, 그를 즐겁게 했던 것은 나라에서 주는 상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당시에 저와 함께 했던 아이들이 오히려 더욱 큰 힘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희망원 아이들과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금사리, 쌍류, 연서, 연동,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부강까지 돌아다니며 철사수공품 제작 기술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의 열의와 의지가 어찌나 강했던지 잠시도 마음을 느슨하게 가질 수 없었지요.”
이러한 그의 활동은 1970년 9월30일 경향신문에 고스란히 보도되기도 했다. ‘불우이웃 돕는 거지대장’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로써 그의 활동은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의 진심과 아이들의 열정은 고스란히 역사로 기록됐다.
꿈과 희망과 열정의 전염성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 했다. 저 거대한 강산도 10년마다 변하고, 사람이든 세상이든 세월에 닿은 것은 늙어버리거나 닳아버리기 마련이다. 단지 심장이 떨려서 이웃을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이성원 이사장의 세월도 어느새 50여 년이 흘렀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역시 많이 바뀌었다. 그 변화는 마음이 느슨해졌다거나 소홀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으로 이웃을 위한 마이웨이를 뚜벅뚜벅 걷고 있는 것이다.
“희망원을 거쳐 자립해 나간 사람도 어느덧 500여 명이 넘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자신의 꿈과 희망 그리고 미래를 꾸려나가고 있겠지요. 더욱 보람된 것은 그들이 또 다른 불우이웃을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란 점입니다. 이를 테면 희망원은 단지 가난을 구제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꿈과 희망을 전파시키는 씨앗 저장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맨발로 다리 밑에서 살다가 어엿한 공무원이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영업, 운송업, 회사원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이사장을 찾아와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풀어낸다고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린 청소년들이 아니다. 이 이사장 역시 세월을 곱게 덧입은 노년의 신사가 되었다. 이 두 존재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자식과 부모의 관계로 단단하게 이어주는 계기가 됐다. 세상에서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일과’이자 ‘일상’이라고 표현했던 거대한 선행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지극한 사랑은 그 누구도 가로 막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서는 이번 주말에 최강의 한파가 찾아올 것이라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는 목에 칭칭 감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사상 유래 없이 찾아왔다는 이번 한파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것은 어느새 이성원 이사장으로부터 꿈과 희망과 열정이 전염된 까닭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