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박경석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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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박경석 FC
  • 취재_공동취재단
  • 승인 2011.01.0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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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지식 및 전문성 확보는 물론, 고객지향적인 서비스 제공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ING생명의 박경석 FC. 그는 항상 고객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초지일관 최선을 다하는 재무컨설턴트이다. 화려한 언변과 미사여구로 고객들을 현혹하는 말만 앞세우는 FC가 아니라 우직하고 묵묵하게 행동으로 말하는 박경석 FC는 성실과 신뢰를 통한 고객만족으로 민원 ‘제로’의 기적을 달성·유지하고 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동양그룹 공채로 입사한 박 FC는 좀 더 큰 조직생활을 하기 위해 1년 후 기아그룹 공채로 재입사했고, 이후 아시아자동차, 기아자동차에서 3년간 근무하며 제조업보다는 금융계열의 실무를 익히고자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캐피탈로 이직, 10년간의 샐러리맨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직장에선 능력을 인정받고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등 10년 가까운 샐러리맨 생활이 적성에 잘 맞았던 박 FC는 그룹의 임원까지 꼭 해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갖고 재미있게 직장생활을 이어갔지만 그 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년 정도 본부에서 그룹의 임원들을 모신 시절이 있었는데, 이 때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인생 목표의 전환점이 된 계기는 제 자신이 꿈꾸던 국내 최고그룹의 임원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이었습니다.” 사연인 즉, 당시 박 FC가 보좌했던 임원이 지역본부의 목표달성 부진으로 본사의 상무이사에게 쩔쩔매고 고민하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임원의 삶이 결국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다른 차원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것.

더불어 그는 10년간의 조직생활에서 다소 아쉽게 느껴졌던 성과에 대한 보상의 미흡함과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성취감을 맛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판단, 조금 더 다이내믹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때 마침 외국계 생명보험사에서 리쿠르트 붐이 한창 일었다. 박 FC는 곰곰이 생각했다. 직장생활 초창기 P생명의 억대 연봉의 대졸 전문직설계사의 강연을 듣고 신선한 충격에 빠졌던 자신의 모습을. 순간 ‘그래 바로 이거야’라는 탄성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이후 여러 군데의 보험사로부터 리쿠르트 제의가 왔지만, 박 FC가 택한 곳은 ING생명이었다. 그렇게 ING생명과 인연을 맺게 된 박 FC는 2005년 5월, 자신의 인생에서 첫 sales를 시작하게 된다.

일하면서 즐기고 즐기면서 일하는 FC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날이 있듯, 박 FC 역시 2005년 5월2일을 잊을 수 없다. 아직도 그때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박 FC는 2005년 5월2일 첫 working-day에 무려 4건의 종신보험 계약을 성사시키며, 성공을 향한 첫 발을 내딛었다. 이를 시작으로 3주간 32건의 청약 달성, 월간 신계약 건수 기네스 수립 등 현재까지 다수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박 FC는 매주 3건 이상의 계약을 이어가야 하는 3W를 3년(127주, 강동지점 기네스 달성) 가까이 해내며, 전체적으로 어려웠던 금융위기의 해(2008년 하반기~2009년도)까지도 극복했다.

평범한 샐러리맨 인생에서 소위 잘나가는 지금의 박경석 FC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박 FC는 “자신과의 굳은 결의와 끝없는 노력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 FC는 고교동문이 단 한명도 없다. 초등학교 시절 경남 고성에서부터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전학만 무려 7~8차례 다닌 박 FC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서라벌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학년을 마칠 무렵 없는 살림에 부친의 막대한 채무와 도피까지 더해 결국 정규교육을 중단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외삼촌 공장에서 1년 간 기계를 만져야 했다.

하지만 박 FC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배움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며 독학을 하는 조건으로 어렵게 가족들의 동의를 구한 박 FC는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 마침내 대학에 입학에 성공, 고교 동문이 없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학업보다는 인간관계에 주안점을 두어 다양한 활동을 경험했다. 아울러 강원도 양구에서 하사로 군복무를 하면서 조직의 생리를 터득했고 졸업 후 샐러리맨 생활 속에서 경쟁력과 자생력을 스스로 쌓아가며 타인보다 더 부지런히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사회를 배워 나갔다. 이처럼 현실에 결코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기회를 찾아 과감한 결단과 실행으로 옮긴 박 FC는 자신의 힘으로 열악한 주위 환경을 극복,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가정의 행복전도사 박경석을 찾아주세요”

금융이란 테두리 안에서 돈이면 돈, 인맥이면 인맥, 서비스면 서비스, 고객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제공하는 만능해결사인 박 FC는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해 고객을 위한 최선의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보험을 주축으로 증권사 및 은행의 투자상품과 자문형 상품 등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금융 지식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고객지향적인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는 그는 월납 보험료 5만 원을 불입하는 고객도, 300만 원을 불입하는 고객도, 그리고 1,000만 원 가량의 연금 보험료를 납부하는 고객도 모두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고객 한 명 한 명이 평생을 재무동반자로써 함께 할 수 있는 무형자산이기 때문. 이처럼 다른 누구보다 고객의 행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박 FC는 고객의 이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실기도 한다.

누가 봐도 고객 또는 보험과 사랑에 빠진 박 FC. 그는 부친이 지병으로 별세를 한 당시에도 3W 달성에 대한 집념을 꺾지 않았다. 물론 3W를 40주 정도 할 시점으로 박차를 가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에 그는 3W는 반드시 해야겠다는 각오로 발인을 마치고 본가에 잠시 들린 친인척들에게 종신보험 계약을 받아내 3W의 신화를 이어갔다. 일부는 이런 박 FC의 행동에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지만, 박 FC는 ‘보험쟁이’로서의 소명을 다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부심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는 끝으로 미국의 90세 할아버지 MDRT처럼 평생을 즐겁게 일하면서 副를 이루어가고 진정한 삶의 자유를 누리길 희망했다. 10년 연속 MDRT를 최대한 빨리 달성해 전세계 MDRT협회 명예의 전당에 종신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ING생명의 박경석 FC. 美 LPGA 협회 명예의 전당에 박세리가 속 해 있는 것처럼 박, 경, 석 그의 이름 석 자가 전세계 MDRT협회 명예의 전당에 종신회원으로 기록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ING생명 박경석 FC
■ 경력
*‘96년초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05년 하반기 동양그룹공채합격 입사 (’95.12~’96.11 근무)
*‘96년 하반기 기아그룹공채합격 입사 (’96.11~’99.11 근무)
* 현대차그룹 현대캐피탈 경력사원 입사 (’96.11~’05.3 근무)
*‘05년 4월 ING 전직, 05년 5월부터 현재까지 ING생명 강동지점 FC활동 수행 중
 
■ 수상내역
*‘05년 ~‘10년 MDRT 달성
* ‘05~‘10년 ING-cup 컨벤션 수상 및 ING summer festival 2회 달성
 
■보유자격
쪾 변액보험판매관리사 (’05년7월 취득)
쪾 펀드투자상담사 (’06년9월 취득)
쪾 증권투자상담사 (’09년9월 취득)
쪾 파생상품[선물,옵션]투자상담사(舊선물거래사) (’10년1월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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