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판소리 명창으로 살아오신 세월이 만만치 않습니다. 얼마나 되셨으며 어떤 계기로 시작하신 건가요?
A. 11살에 시작했으니 2012년이면 판소리 인생으로만 60년, 소리꾼으로서 환갑을 맞이하는군요. 판소리 명인이시자, 진도에서 판소리를 가르치며 한 평생 소리와 함께 하셨던 신치선 선생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 분이 바로 제 부친이시거든요. 그런데 제가 16살 되던 해에 돌아가셔서 부친으로부터 긴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후 안기선, 장월중 선생님께 판소리를 전수 받으며 본격적인 소리꾼 인생을 시작했지요. 23세 때 서울아시아민속대회에서 1등을 받기도 했고, 1975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이셨던 김소희 명창(1995년 타계)을 만나 한 집에서 2년 거주 후 20년 동안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름이 ‘희’ 돌림이란 게 인연이 됐죠.
Q. 1987년 KBS의 간판 코미디프로그램이었던 쇼비디오자키 ‘쓰리랑부부’ 코너에 등장하면서 대중적 명성을 높이셨습니다. 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A. 처음 출연 제의를 받고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계시던 선배님들의 걱정과 질타도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 소리’를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을 통해 보다 많은 이들에게 판소리의 매력을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1990년 코너가 폐지될 때까지 4년 동안 그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땐 ‘쓰리랑 남매’였는데 기대했던 인기를 끌지 못해 ‘쓰리랑 부부’로 이름과 구성을 대대적으로 바꾸게 되었죠. 이 프로에서 제 역할은 쓰리랑 부부의 알콩달콩한 갈등을 소리로 중재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부인은 남편을 더욱 품 넓게 사랑하라는 게 주된 충고였습니다. 이 코너가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우리 것’을 가미했던 까닭에 일본 NHK와 영국 BBC 방송과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죠. 이를 테면 그때 이미 한류 열풍이 시작된 셈입니다.(웃음) 여전히 국악계나 선배님들의 걱정이 높았지만 소신 있게 방송을 이어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그 코너를 계기로 1992년 오정해의 ‘서편제’가 인기를 더할 수 있었고, 박동진 선생의 “우리의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유행어에 더욱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결과적으로 우리 소리, 즉 국악을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알리게 된 것입니다.

A. 판소리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검증받은 우리 만의 문화유산입니다. 이를 굳이 구분하자면 남성적이고 절도 있는 동편제와 여성스러운 서편제 그리고 거의 평행선성을 이루는 중고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판소리는 자연의 소리에 가까운 까닭에 빗소리, 낙엽소리, 번개소리 등과 잘 어우러지게 됩니다. 또한 인생의 희노애락을 오직 소리로만 표현해 청중을 울리고 웃겨야 하는 것이죠. 특히 5대 판소리는 다 어렵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산에 올라 혼자 소리 공부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적어도 30년 이상 수련해야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랍니다. 깊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에 걸친 수련과 훈련이 필요한 것이지요. 저 역시 60년째 소리를 하고 있는데, 이제야 그 맛을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득음’을 할 수 있는 것은 생이 끝날 때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소리꾼 옆에는 언제나 고수(鼓手)가 자리를 지키며 장단을 맞춰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판소리에서 고수의 역할은 어떠한 것입니까?
A.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란 말이 있을 만큼 고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고수와 명창이 합해져야 제대로 된 소리가 완성되는 셈이지요. 이 과정에서 고수는 소리를 다스리는 역할을 합니다. 소리꾼의 비위를 맞춰 소리의 완급을 조절하고, 호흡을 맞춰주는 것이지요. 단지 박자를 맞추는 데 그치지 않고 소리꾼이 전달하는 감정의 깊이를 함께 맞춰줘야 하는 중요한 역할자입니다. 그리고 하나 빠진 게 있습니다. 고수와 명창 그리고 청중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판소리가 완성됩니다. 듣고 즐기는 이들도 판소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예전 청중들은 소리꾼이 마칠 때까지 박수는 자제하고 추임새만 넣어주는 반응을 보였지만 오늘날에는 중간중간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하는 등 그 반응이 뜨겁습니다. 이렇듯 시대흐름에 맞춰 소리꾼 역시 청중의 박자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Q.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닐 것이라 여겨집니다. 더구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그 탓에 여건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직접 소리를 가르치시기도 하는데 교수님이 체감하는 변화는 어떤 것입니까?
A. 예전처럼 죽기 살기로 배우려는 의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게 아쉽습니다. 그 중 일부는 남들과 다른 음악을 한다는 멋 부리기로 배움에 나서기도 하고요. 그런 학생들은 뭐든 대충대충 하게 마련이거든요. 가뜩이나 대학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일 년이라 해도 방학을 제외하면 몇 달 남지도 않거든요. 그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전해주려 하다 보면 버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 소리에 대한 인식이라도 바꿔 놓으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글로벌이라는 개념이 무조건적인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일수록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자기 문화화 시키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전통문화를 지루하고, 고루한 영역으로 여기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는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가 자국에서 받고 있는 대접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나라의 큰 행사가 열릴 때마다 그것을 알리려고 애씁니다. 국민들도 이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보내주지요. 이에 비하면 우리는 조금 소홀한 것 같습니다. 대접은 고사하고 방송에서조차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나, 연예인이 사망했을 때는 온갖 미디어에서 대서특필하지만 한 평생 우리 소리와 함께 살아온 명창이 세상을 떠났을 땐 일간지 부고 란에 깨알만한 글씨로 보도되는 모습. 어쩌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Q. 적지 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 앞으로의 전망이나 계획해 두신 일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A. “소신 있게 열심히 살아가자”라는 신념을 되새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현실에 대한 허황된 기대를 가지지 않고, 현실에 맞춰 재미있게 살아가자는 게 제 인생관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더욱 재밌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2012년에는 60년 소리인생을 간추려 보는 무료 공연을 계획 중인데, 이 때 복지관의 어르신들을 초대해 즐거움과 행복을 나눌 생각입니다. 또한 해마다 정부의 지원 없이 지인들의 지원과 사비를 털어 잊혀 가는 명인들의 무대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성우향 선생님을 비롯해 박송화, 조순애, 남애성 선생님 등 80이 넘은 명인들을 모시고 공연을 연출, 기획, 제작하고 있습니다. 판소리의 격을 높이기 위함과 명인들의 설 자리 제공, 이 두 가지의 취지를 갖고 있으므로 여러분들이 많은 성원을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영희 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무대연출학과 졸업
*現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음악예술학부 교수
*한국 판소리보존회 이사
*~1953 안기선, 장월중, 김준섭, 박봉술, 강도근, 김상룡 판소리 사사
*~1975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김소희 선생 전수학생 선정
*~1976 중앙 국립창극단 입단
*~1977 남원 춘향제 명창부 최우수상
*1982~1983 ‘주라기의 사람들’, ‘달아달아 밝은달아’ 등 순수연극
*1987~1990 KBS 코미디프로 ‘쇼비디오자키‘ 쓰리랑 부부
*~1992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준문화재 지정
*2005 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