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외동딸인 덕혜옹주가 37년 만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13살에 일본으로 끌려가 쓰시마섬 귀족과 결혼했고, 1962년 1월26일 귀국할 때까지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는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였다. 딸마저 결혼에 실패하고 자살하는 등 고국 땅을 밟기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은 계속됐다.
[1962년 1월26일] 덕혜옹주 일본서 환국
1912년 5월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난 덕혜옹주(德惠翁主). 고종의 고명딸로서 5살때 준명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 당했으며 그해 1월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서울에서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인 히노데 소학교에 다니던 덕혜옹주는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 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 받았다. 그리고 1925년 3월28일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13살 때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던 덕혜옹주는 항상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그런 후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된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 <흘러가는 데로>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마저 1956년 결혼하였지만 실패하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을한 기자에 의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에 귀국하였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방자 여사와 만난 자리에서 덕혜 옹주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치며 “그런 분이 있었냐”고 말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제창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으로 구황족에 포함된 그녀는 마침내 1962년 1월26일 덕혜옹주가 우여곡절 끝에 37년 만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열린 환영식에 의친왕의 며느리 등 많은 왕실인사들이 참석했다. 덕혜옹주는 행사가 끝난 뒤 창덕궁의 낙선재에 찾아가 순종의 계비(繼妃)인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윤씨를 만났다.
하지만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21일 낙선재에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1924년 1월3일]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발굴
1924년 오늘,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박사가 고대 이집트왕 투탕카멘(BC 1333~1323 재위)의 묘를 발굴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귀중한 유물들이 3,000년이 넘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모두 네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묘 앞방에서는 사자모양의 침대를 비롯한 가구 여러 점이 나왔고 관을 들여놓는 현실(玄室)에서는 키 168㎝ 왕의 미라가 여덟 겹으로 싸인 채 안치돼 있었다. 맨 안쪽의 매장실에는 네 겹의 금박을 입힌 나무상자 안에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관이 있으며 이 안에는 세 겹의 관이 들어 있다. 투탕카멘 왕의 미라는 3중 관 속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특히 맨 안쪽의 관은 110kg의 순금으로 제작되었고 색유리, 라피스 라줄리, 터키옥, 홍보석 등으로 상감처리한 정교한 조각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 관안에서 미이라가 발견되었고 머리 부분에는 무게 11kg의 황금가면이 덮여 있었다. 왕의 미이라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시신의 부검결과 뇌의 치명적인 손상으로 즉은 것으로 판명되어, 암살 등의 비극으로 후계자도 없이 통치를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 덕분에 투탕카멘은 그보다 오래 살았거나 훌륭한 치적을 남긴 어떤 전임자나 후임자보다도 유명해졌다.
투탕카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최초의 파라오의 무덤으로서 완벽하게 보존된 고대이집트의 유물들은 당시 이집트의 예술성, 기술을 직접 접할 수 있으며 당시의 왕권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파라오의 묘를 통하여 이집트 왕권의 황금기(세티, 람세스) 시대의 왕조의 장례식과 무덤은 얼마나 화려할지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투탕카멘의 존재를 보증하는 유물로서 그 시대의 역사적 기록의 사실여부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제일 큰 의의다.
카터가 카이로박물관에 소장시킨 발굴품은 1,703점.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예술,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1913년 1월10일] 티베트 독립선언
중국에서는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라고 부른다. 약칭하여 ‘짱(藏)’이라고도 부르며 주도는 라싸이다. 중국의 서쪽 끝에 있으며, 인도·네팔·부탄·미얀마 등의 국가와 맞닿아 있어 개방확대와 및 변경무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대에는 창족과 융의 영토였으며, 당나라와 송나라 때는 토번(吐蕃)으로 통일된 국가를 이루었다. 원나라 때는 선정원에 직속되었고, 청나라 때는 전장(前藏)·후장(后藏)·객목(喀木)·아리(阿里) 4개 부로 나뉘었으며, 1663년(강희 2년)부터 티베트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티베트는 13~14세기에는 원나라의 간접적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청나라의 느슨한 지배를 받던 티베트는 20세기 남아시아의 전략적 기지를 차지하기 위해 침공에 나선 영국의 손에 들어간다. 영국 정부는 티베트에 문호 개방과 통상, 외교관 상주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티베트 정부가 이를 거절하고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자 무력 침공을 단행했다.
영국군은 1904년 8월3일 라싸에 입성했고 9월7일 강압적으로 라싸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2년 뒤인 1906년 영국은 청나라와 베이징조약을 체결하면서 라싸조약의 권리를 상당부분 포기했다. 이후 영국은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는 청 왕조가 붕괴된 틈을 타 1913년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티베트는 독립국가로 존재했던 탓에 중국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1950년 인민 해방군이 진주하면서 다시 중국에 강제 편입됐다. 이후 티베트는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는 고난의 길을 걷고 있다.
[1901년 1월22일] 빅토리아 영국 여왕 사망
영국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5.24~1901.1.22)이 사망했다.
하노버왕가의 마지막 군주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공(公)과 독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빅토리아 여왕은 백부(伯父)인 윌리엄 4세가 죽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하노버왕가에서는 여자의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버왕가가 성립한 이후로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일군주 관계는 끝나고, 그녀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은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가(家)의 앨버트공(公)과 결혼했고 앨버트공은 고결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으로써 여왕에게 좋은 조언자와 이해자가 되어, 공사(公事)와 가정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다. 이기적인 데가 있던 그녀가 국민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여왕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여왕의 치세(治世)는 빅토리아시대로서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64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자본주의의 선두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디즈레일리와 W.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2대정당제(二大政黨制) 의회정치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외교면에서도 영광스런 고립을 지키면서 그 동향(動向)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국내에서는 중류계급이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의회제민주정치가 발달했다. 도덕을 강조하고 체면을 존중하는 ‘신사의 나라 영국’에 어울리는 문화도 이 때 이룩됐다.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녀는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랐다. 그리하여 강한 개성으로 강경하게 적극 외교를 밀고 나가는 H.J.파머스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보수주의로 기운 후반기에는 글래드스턴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분을 지킬 뿐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영국 군주의 패턴을 확립하였다.
[1968년 1월23일] 북한,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
승선인원은 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 총 83명을 태운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납치됐다. 납치된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 수집 보조함으로 중량 906톤, 길이 54m, 너비 10m, 시속 122노트에 구경 50㎜ 기관포 2문을 갖춘 비무장 함정으로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나포됐다.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 비정규군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가 일어난 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이날 푸에블로호는 동경 127° 54′, 북위 39° 25′ 공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1시45분경,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 2대의 위협하에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되었다. 미 해군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8년 1월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첫 공격을 받았으며 14시32분에는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최종보고를 송신하였다.
푸에블로호는 1월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였으며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하였다. 사건 다음 날인 1월24일, 미국 측은 오전 11시 판문점에서 군 사정전위원회 본회의를 열어 1.21 사태와 함께 이 사건을 신랄히 규탄했다. 미국은 소련을 통한 외교교섭과 함께 판문점회담을 추진했으나 소련이 중재를 거부하고 북한도 강경한 태도를 보여 푸에블로호의 송환교섭은 난항을 거듭하게 된다.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만 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고조됐다.
결국 이 사건은 28차례에 걸친 비밀협상 끝에 미국은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23일,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구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됨으로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은 매듭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