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분단은 다분히 물리적이고 한시적인 것이었다. 이념을 달리했던 열강들이 38선을 그었고, 그것은 분명 그네들의 이해관계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의 판단이나 의지가 아니었던 까닭에 그리 견고하지 않았다.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전쟁 전까지 민간인의 왕래가 자유로운 편이었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도 심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통일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절차와 수순에 관한 형식적인 과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6.25전쟁이 이 모든 것을 뒤섞어 버렸다. 3년이 넘는 지루한 전쟁. 그 끝에 그어진 휴전선은 화학적이고 영구적인 분단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60여 년의 세월이 더해 더욱 심각하고 견고해졌다. 특히 남한은 대륙과 닿아있는 한반도의 일부임에 틀림없지만 배와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는 대륙과 통할 수 없는 섬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까지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렀다. 참전한 외국병력을 포함해 약 200만 명이 사망했고, 한국인 사망자 100만 명 중 85%는 민간인이었다.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그리고 교통시설이 파괴됐고, 정부건물의 75%가 손상을 입었다. 민간가옥의 절반 이상이 완파되거나 반파됐다. 한반도 전체가 폐허로 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야는 포연과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정치겙姸쫨사회적 암흑기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렇듯 뼈저린 희생을 치른 전쟁이었지만, 3년 1개월에 걸친 공방전에도 불구하고 승부는 끝내 가리지 못했다. 1953년 7월27일 널문리(현재의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국 총사령관 M.W.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이로써 전쟁은 멈췄으나 국토는 휴전선으로 분단됐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여기에 남한 정부는 없었는 것이다. 국제연합군을 대표한 미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군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는 전쟁발발 한 달여 만에 이승만 정부가 작전권을 미국 측에 이양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당사국임에 틀림없었지만 전쟁을 수행하고 휴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결정권은 미국이 쥐고 있었다.
당시 이뤄진 협정은 일반휴전이었다. 교전 당사국이 전투지역 전부에 걸쳐 적대행위를 전면적으로 정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쟁과 관련해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며, 사실상 전쟁의 종료와 동일한 효력을 가지게 된다. 그래도 완전한 전쟁의 종식을 뜻하는 평화협정과는 차이가 있다. 이런 이유로 휴전선을 기준으로 한 남북의 군사적 대치상황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후 남북은 통일에 앞서 평화협정체결을 지속적으로 시도해 왔고, 평화통일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이념과 사회체제가 각각 다른 양측의 입장 차이로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1950년에 발생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참화와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남북 간의 국지적 교전이나 북한에 의한 도발은 끊임없이 반복돼 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주로 무장 게릴라와 무장간첩의 침투가 잦았고, 1980년에 들어서는 아웅산 테러와 KAL기 폭발과 같은 테러 방식의 도발이 있었다. 그러다 1990년대 북한은 해상침투에 주력해 왔다. 1999년 6월에는 1차 연평해전이 발생해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규군이 연평도 앞바다에서 교전을 벌였고, 이는 2차 연평해전으로 이어졌다. 또한 올해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사태와 이번 연평도 도발에 이르기까지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과 북한의 대담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이번 연평도 도발사태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과거 북한에 의한 도발이 대부분 해상이나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우리 군을 상대로 벌어진 것이라면, 이번엔 해상이 아닌 우리 영토에 직접 포격을 가했다는 점 때문이다. 더구나 이로 인해 군뿐만 아니라 민간인 피해까지 발생했다.
무장 게릴라나 간첩, 또는 테러로 인해 우리 민간인이 희생된 적이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처럼 북한의 영토에서 우리 영토를 직접 공격해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6.25전쟁 이후 처음이다. 이번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와 우리 정부의 대응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반도는 국제사회 휩쓰는 태풍의 눈
면적 22만 1,336㎢, 인구 약 7천300만 명, 동경 127도 30분, 북위 37도 00분, 남과 북으로 분단된 국토. 한반도는 여느 선진국에 비해 국토도 그리 넓지 않고 인구 또한 많은 편이 아니다. 끊임없는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동지역처럼 석유를 비롯한 자연자원에 관한 이권이나 종교문제가 걸려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빈약한 자원에 비좁은 국토를 둘러싼 세계인의 관심과 우려는 중동지역 못지않게 뜨겁다. 국제사회에서 한반도는 비단 남북 간의 국내 문제가 아닌 셈이다. 이는 지정학적 위치의 특이성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대륙과 태평양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잇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냉전시대부터 오늘날 경제패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가지는 지정학적 의미는 매우 크고 중요한 것이다. “한반도에 대해 어느 국가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가”가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물론 세계패권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땅을 불법 점령했던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카이로회담 이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각각 진주함으로써 분단의 씨앗을 뿌렸다. 이후 각각의 군대는 남북 간의 왕래는 물론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서로의 이념과 체제에 부합하는 통일정부를 주장하면서 미소 양국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는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의도와 적대정부의 출현을 원하지 않았던 미국의 입장의 정면 충돌양상으로 번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었다. 유엔은 1947년 개최된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31일 이전에 실시하기로 결의했지만, 소련 군정당국이 이를 거부하며 유엔이 선거감시를 위해 구성한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급기야 미국은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 단일정부 수립 정책을 포기하고,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분단의 고정화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1948년 2월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 실시’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그 해 5월10일 남한지역에서 유엔의 감시 하에 총선거가 실시돼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8월15일 현재의 대한민국을 건국하게 됐다.
북한은 1948년 9월9일 북한지역의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승인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 해 12월12일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는 남한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결의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해줬다.
이렇듯 해방과 정부수립 과정에서 남북 각 정부의 독자적인 협의나 결정은 거의 배제되다시피 했다. 또한 뒤이어 발생한 6.25전쟁에서는 중공과 소련이 북한을 지원하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남한을 지원했다. 이러한 연유로 사실상 6.25전쟁은 동구권을 대표하는 소련과 서구권의 미국에 의한 대리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 이후에도 남과 북은 열강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은 현재의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통해 전후 경제재건과 군사기반을 닦았고, 남한 역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지원을 통해 일어설 수 있었다. 특히 남한은 6.25전쟁 기간 중이었던 1950년 7월 군대의 전겿識?작전통제권을 미국에 이양했는데, 김영삼 정부시절이었던 1994년 12월 평시작전권이 환수될 때까지 독자적인 군사행위를 결정할 수 없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는 노무현 정부시절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으나, 안보 공백 및 한미동맹의 훼손 등을 우려한 보수 세력들의 강력한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발생한 연평도 도발사태의 해법이 복잡한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남북이 극단적인 대결양상으로 치닫고 있지만, 당사국인 남한과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반도 주변국들은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로 나뉘어 외교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공격을 강력히 규탄하며 경제제재는 물론 군사적 타격까지 염두에 둔 대북 압박을 높이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외견상 중립을 보이고 있지만, ‘무력사용 반대’라는 입장으로 사실상 북한을 비호하고 있는 모양새다. 천안함 사태에 이어 발생한 연평도 도발사태를 통해 냉전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한겧?일과 북겵?러 간의 대결구도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흘러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을 증폭시켜 외교력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분명한 것은 우리 정부가 이번 사태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남북의 대화단절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은 상황인 데다 북한이 너무 큰 무리수를 둔 바람에 양국의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입장이다. 이들 열강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갈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그 운명이 소용돌이로 요동치는 비극이 될지, 새로운 평화의 시발점이 될지에 대해 우리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이 참담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위키리크스 폭로문건 속 MB정부의 대북관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1월29일 연평도 도발 사태와 관련한 대국민 담화에서 “더 이상 북한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국민의 정부 이래 10년 이상 지속돼 온 ‘햇볕정책’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대화와 타협이 아닌 강경봉쇄와 압박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중국이 제시한 ‘6자회담’이 무의미해졌음은 물론 남북정상회담 등 담판의 여지도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날 미국의 폭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 공개한 미 외교전문에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관이 언급되어 있어 주목을 끌었다.
이는 2009년 1월12일 주한 美 대사관이 청와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자국 국무부에 보낸 외교전문으로 알려졌다. 이 문건에는 “이 대통령이 자신의 대북정책에 매우 만족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임기 말까지 남북관계를 현재 상태로 남겨 놓을 각오가 돼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美 국무부는 “이 대통령의 보좌진과 지지자들은 현재의 대치상태가 벼랑 끝으로 치닫더라도 북한을 몰아붙이며 더 약화될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기회로 보고 있다”고 평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올해 2월 주한 美 대사관이 작성한 전문에는 천영우 외교안보수석이 외교통상부 제2차관으로 재직 당시 캐슬린 스티븐슨 주한 美 대사와 만나 “북한은 이미 경제적으로 붕괴됐으며, 김 위원장 사망 후 2~3년 내에 정치적으로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
정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후 북한 내부변화에 대한 대응방안을 미국, 중국 등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으며 중국의 차세대 당 지도자들 사이에서 “북한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동맹국이 아니다”라는 말이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우리 정부나 주변국들이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이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도 확인됐다. 지난해 5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직전 미국의 인공위성이 북한 핵실험 시설에서 이상 징후를 포착했으나,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 위협이 얼마나 심각한지 확실하지 않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6월에는 중국 외교부 당국자들이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북한의 우라늄 농축이 초기단계에 불과하다”고 보고했지만, 실상은 우라늄을 농축하기 위한 공장을 건설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파악됐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
북한이 도발, 테러 등 소위 ‘사고’를 칠 때마다 우리 정부와 미국은 강력한 경제, 외교적 제재를 통해 압박해 왔다. 이번 연평도 도발사태 이후 우리 정부와 미국은 또다시 대북 강경조치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 역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사건 이후 동원 가능한 모든 압박수단을 모두 써 버린 탓이다. 현재로서는 북한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카드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섣부른 군사적 조치 역시 쉽지 않다. 연평도 도발사태 직후 무력시위 차원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진행했음에도 북한의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면전’을 운운하며 위협의 수위를 높였다. 개성공단에 상주하고 있는 남측인력이 700여 명에 이른다는 점 역시 부담으로 작용한다. 심각한 국지전이나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고스란히 인질로 붙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제재가 마땅치 않은 것은 무엇보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방법이란 것이다. 6.25전쟁 이후 지난 60여 년 간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을 수포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최악의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경제적 제재를 통한 타격도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박왕자 씨 피격 사망사건 이후 금강산 관광을 중단시키고, 천안함 사건 이후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간의 교류협력사업을 전면 중단함으로써 이미 북한의 자금을 틀어막은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인도적 지원이 대폭 줄어 이를 중단한다고 해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를 통한 규탄 역시 선뜻 꺼내기 어려운 방안이다. 천안함 사태 당시 우리 정부가 엄청난 외교역량을 쏟아 부었음에도 만족할 만한 결의안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중국과의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빚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한반도 정세는 천안함 사건 직후의 모습 그대로 돌아간 상황이다. 다만 천안함 사태에서 상당한 제재카드를 소진해버린 까닭에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한미 당국의 고민이 깊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더구나 북한이 각종 제재조치에 내성을 보이며 더욱 대담하고 강력한 도발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더욱 큰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연평도 도발사태를 통해 북한이 보여준 군사행동의 유형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을 비춰볼 때 이후에 더욱 강력한 추가도발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에 천암함 사태 이후 사실상 완전히 단절된 남북 간 소통통로를 뒤흔들려는 단기적 협상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고강도의 충격요법을 통해 협상테이블 자체를 보다 크게 키우려는 의도마저 보인다. 실제 북한은 연평도 도발 사태 이후 조선적십자 중앙위원회 보도를 통해 “남쪽의 대결광신자들과 이제 무슨 화해와 협력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느냐”며 “더 이상 인도주의 문제해결에 연연할 생각이 없다”며 남북대화의 파탄을 선언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무리수가 ‘3차 핵실험’으로 절정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북한은 6자 회담이 아닌 남북미 간 3자회담을 줄곧 요구해 왔는데, 거듭된 협상 제의에도 한국과 미국이 끝내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이 공언한 위협들을 단계적으로 실행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핵실험은 엄청난 비용과 상당 분량의 원료를 소진해야 한다는 점에서 북한으로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변수로 남는다. 또한 동북아시아 정세 전반에 끼칠 수 있는 파급효과가 예상 외로 커질 수 있다는 것 역시 북한의 발목을 붙잡는 대목이다. 결국 북한 역시 핵실험 이외에 쓸 수 있는 카드가 거의 없는 셈이므로 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사용어 TIP - 휴전의 종류
일반휴전, 부분휴전 그리고 정전6.25전쟁 이후 체결된 것은 일반휴전
휴전(休戰)은 전쟁 당사국들이 적대행위를 중단하는 행위를 말한다. 정전은 일시적으로 제한된 장소에서 군사행동을 중단하는 것인데, 대개는 휴전협상을 하기 위해 먼저 정전을 선언하게 된다. 휴전협정은 잠정협정으로 평화조약과는 구분된다. 6.25전쟁은 휴정협정만 조인되고 전쟁의 완전한 종결을 선언하는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현재 한반도 상황은 쌍방에 대한 적대행위의 정지에 불과하므로 중립국에 대한 교전당사국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는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휴전은 일반휴전과 부분휴전 그리고 정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휴전은 교전당사국 사이의 전투지역 전부에 걸쳐 적대행위를 전면적으로 정지하는 것이다. 이는 전쟁 정체에 관련된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교전국 정부나 군총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진다. 일반휴전은 사실상 전쟁의 종료와 동일한 효력이 있으며 통상 강화의 전제가 된다.
부분적 또는 국지적 휴전은 일반휴전과 같이 전군의 전쟁구역에 걸친 적대행위의 중지가 아니라, 일부 군에 한하여 또는 일정한 지역에 한하여 일시적으로 적대행위를 멈추는 휴전이다. 예를 들자면 식민지에서 적대행위의 정치, 해군의 적대행위 정지 등이다. 일반휴전과 같이 정치적 중요성과 정치적 효과를 가진다. 정전은 교전 당사국 간 군대의 합의에 의해 단기간의 부분적, 일시적인 적대행위 중지이다. 부분적 휴전과의 차이점은 정전에 정치적 목적이 없고 일시적인 국지적 의미밖에 없다는 점이다.
1953년 6.25전쟁 당시 맺어진 것은 일반휴전이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M.W.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간에 서명 되었다. 이로써 6.25전쟁은 정지되었으나 국토는 휴전선으로 분단됐다.
정부차원의 대북심리전 본격화
전단지 살포, 확성기 설치, 라디오 방송 등으로 전개
최신가요, 시사뉴스 방송으로 귀순 유도…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으로 기대
지난 12월7일 군 관계자는 “대북 심리전의 일환으로 추진된 대북전단지 살포를 연평도 도발 이후 계속 실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단, 정확한 시간과 살포 위치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올해 3월 천안함 침몰사태 이후 군 당국은 전단지 살포, 확성기 설치, 라디오 방송 등 3가지 방식의 대북 심리전을 준비해 왔다. 심리전 계획이 공개될 당시 북한의 추가도발이 있을 경우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류제승 국방부 정책기획관은 지난 7월 안보강사 대상 천안함 조사결과 설명회 자리에서 “대북 확성기를 11개소에 설치했고, 추가 도발이 발생하면 제재수단으로 활용할 계획”이며 “전단지 살포는 6개 기지에서 준비를 완료했으며 11종, 총 123만 장을 제작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심리전 전개는 천안함 침몰사태 이후 연이어 발생한 연평도 도발에 대한 계획된 작전전개인 셈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생활과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전단지를 지속적으로 살포해온 시민단체에 따르면 풍선에 띄워 보내는 대북 전단지는 황해도 지방을 포함해 평남 남포와 평양까지 날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디오 방송은 휴전선 일대에서 전파를 송신할 예정이다. 이는 1962년 이미 시작됐으며 FM방식으로 확성기를 통해 휴전선 일대에서 방송돼 왔다. 그러다 2004년 6월15일, 남북장성급회담에서 합의를 이뤄내 42년 동안 이어왔던 대북 라디오 방송을 중단했다.
이번에 재설치 된 방송용 확성기는 최대 출력 시 야간에 약 24km, 주간에는 약 10km 거리에서 청취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대북심리전방송은 FM에서 AM방식으로 전환해 더욱 먼 거리까지 전파가 닿을 것으로 전망된다. 군 관계자는 “주로 최신가요와 시사뉴스 등을 방송하며, 귀순을 유도해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북한 주요 도발 일지
▲1976.0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유엔군 소속 미군장교 2명 사망
▲1983.10.09 아웅산 테러. 17명 사망, 14명 부상
▲1987.11.29 중동에서 귀국하던 대한항공 858기 폭파. 한국인 승객 93명 등 115명 사망
▲1996.09.18 25명 탑승한 북한 잠수함 강릉 앞바다 좌초
▲1997.10.17 북한 무장군인 12명 대성동 주민 2명 납치
▲1998.06.11 북한군 GP(경계초소)서 아군 GP 방향 자동소총 4발 발사
▲1998.06.22 속초 동방 11.5마일 해상서 북한 유고급 잠수정 1척(사체9구)발견
▲1998.07.12 동해시 해안서 무장간첩 사체 1구, 침투용 수중추진기 1대 발견
▲1998.12.18 여수 앞바다 침투 북한 반잠수정 1척 격침
▲1999.06.15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1차 연평해전 발생
▲2001.11.27 북한군 파주군 장파리 DMZ서 아군 초소에 기관총 2∼3발 발사
▲2002.06.29 북 경비정 NLL침범, 2차 연평해전 발생
▲2003.02.20 북 미그-29기 1대 연평도 NLL 13㎞ 남하. 아군 전투기 대응출격
▲2003.07.17 북한군, 경기 연천 DMZ서 14.5㎜ 기관총 4발 발사. 아군 경고사격
▲2004.10.10 북 잠수함 동해침투 첩보(아군 폭뢰 투하)
▲2004.10.26 연천군 GOP 철책선 2곳 절단
▲2009.11.10 북 경비정 서해 NLL 침범해 남하하다 함포 50여발 발사. 아군 대응 사격해 교전(대청해전) 발생
▲2010.03.26 백령도 서남방 2.5㎞ 해상에서 해군 1천200t급 초계함인 천안함 침몰. 승조원 104명 가운데 58명 구조. 46명 실종
▲2010.08.09= 북한군 백령도 북방 해상에 해안포 10여발 발사
▲2010.11.23=북한군 연평도에 해안포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