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은 사회에 대한 인식과 평가 그리고 방향을 담은 관념적 신념체계이다. 대표적으로는 진보와 보수가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인류의 문명발전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가장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정치영역에 있어서 유독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며 불행의 역사를 보태 왔던 것도 사실이다. 때론 전쟁의 이유가 되었고, 살육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 길고도 지루한 싸움을 이어오는 동안 이 두 이념은 본질을 잃은 채 형태와 색깔만 남은 거대한 허울로 남게 되었다. “모든 인습과 미신 그리고 위선에서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교육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알렉산더 닐(Alexander Sutherland Neill)
“교육에는 진보와 보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 국민의 정부 출범을 시작으로 그 허울의 균열이 시작됐다. 감격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균열은 가속화 되었으며, 참여정부 출범을 거쳐 지난 6.2지방선거가 보여준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이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회를 가로 막고 있던 인습과 미신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육현장을 두고 이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드뭅니다. 소통, 배려, 창의력, 문제해결력, 다양성 등을 증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에 따라 학교를 바꿔나가는 것이 진보교육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지난 6.2지방선거 통해 연임에 성공하면서 ‘진보성향 교육감’의 선두이자 상징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는 교육계를 정치적 잣대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비록 선거라는 정치적 절차를 통해 교육감으로 선출됐지만, 교육감의 지위와 역할까지 정치적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국 16개 시·도 교육감을 두고 보수와 진보로 나눠 편 가르기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를 자제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교육감들은 우리 교육의 혁신을 위해 애쓰며 교육의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입니다. ‘진보’의 사전적 의미가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서 보다 나은 환경으로 만들어 간다는 뜻인데, 이런 점에서 모든 교육감들은 진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 교육감은 언론계나 정치계 일각에서 정당이나 여야관계와 연관 지어 진보교육과 보수교육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정치적 시각으로 경기도교육청의 정책을 바라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우리의 학교가 좀 더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정책을 차근차근 펼치는 중”이라고 밝혔을 뿐이다.
헌법이 정한 가치실현과 포퓰리즘의 오해 사이에서
지난 9월17일 경기도의회는 제253회 정례회 본회를 통해 학생인권조례와 경기도 내 5, 6학년 학생 2만8,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무상급식 지원예산 192억 원이 포함된 추경예산을 통과시켰다. 7대 의회에서 연이어 세 번 부결됐던 무상급식 예산이 확보됨으로써 학교현장에서 ‘보편적 복지실현’의 기초를 마련했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계기로 학업의 주체인 학생들의 인권이 향상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경기도교육청은 즉각적인 성명을 통해 “학생인권조례와 무상급식 예산 통과를 환영한다”며 “주민의 뜻에 충실한 의회의 모습을 보여줘 경기도민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줬다”고 밝혔다. 또한 김 교육감은 “2014년까지 의무교육대상 학생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향후 중학생들에게까지 무상급식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 ‘학생인권조례’와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참여정부 정책의 연장선이라는 비판과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는 폄하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에 대한 김 교육감의 입장은 담담하면서도 단호했다.
“학생인권조례는 헌법이 정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무상급식은 보편적 복지와 헌법의 무상의무교육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지요. 이를 참여정부의 정책이나 포퓰리즘으로 규정한다면 헌법에 입각해 일하는 공직자 모두가 그렇다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지난 10월 말에는 일본 와세다대학의 기타 아끼토 교육학 교수가 경기도교육청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아동권리협약종합연구소를 운영하며 가와사끼시 아동권리조례 제정에 관여한 인사이다. 가와사끼시 조례는 일본 최초의 아동인권조례로 3년 동안 200회가 넘는 회의를 거치는 등 상당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의 눈에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일본의 조례가 추상적이고 헌장적인 내용인데 비해 우리의 조례는 명확한 지침과 해석 그리고 규정이 담겼다는 칭찬을 하고 돌아갔다. 또한 김 교육감의 손을 잡으며 내년 3월 아동권리포럼에 와서 발언을 해주십사 부탁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 교육감의 신념과 정책은 국내의 적지 않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성향의 교육정책이 주류를 이루는 타국에서부터 그 성과와 진정성에 대한 평가와 검증을 차분하게 받고 있는 셈이다.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혁신학교’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과밀학급 현상에 대한 문제인식과 대안 역시 꾸준하고 차분하게 실현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혁신학교가 인기를 끌면서 학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해당 학교는 주로 학교건물을 증축하고 학급을 늘여 대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한계는 뚜렷했으므로 김 교육감의 대처방안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경기도교육청의 혁신학교는 학급당 25명, 한 학년당 6개 반 등 작은 학교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운영되고 있는 혁신학교는 43개교지만, 앞으로 1년에 50개교씩 증설해 2013까지 200개교로 확대할 예정입니다.”
그가 추진하는 현신학교 정책은 ‘학교구성원의 집단지성으로 미래지향적인 학교를 만들어보자’는 데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러한 정책을 실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체적인 지침이나 매뉴얼 등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존의 교육개혁들이 상명하복 방식을 거치며 본질이 훼손되어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데 주목했기 때문이다.
“저희는 당분간 무대를 만들고 각종 무대장치 지원에 신경 쓸 생각입니다. 그 무대에서 어떤 연극을 할 것인가는 온전히 혁신학교 구성원의 몫입니다.”
논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 있었던 경기도교육청과 김상곤 교육감. 그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 작은 시작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런 점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던 지난 1년은 ‘한 번 해보자’는 분위기 조성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에 덧붙여 경기도교육청과 김상곤 교육감이 생산해낼 정책들은 보다 거친 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랜 세월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지 못했던 이 땅에서 이들은 인습과 미신의 허울을 붕괴시킬 종결자가 아니라, 첫 삽을 뜨는 개척자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