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불의 해’ 뜨거웠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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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불의 해’ 뜨거웠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 최연화 기자
  • 승인 2010.11.2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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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고통의 한 해, 그래도 내년이 오기에 희망이다

2010년도 총결산 - 정치·사회를 돌아보며

세상에 멈춰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느린 속도라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화살이나 총알에 비유되는 세월은 오죽한가. 굵직하고 민감한 이슈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가운데 다사다난했던 경인년도 역시 저물어 가고 있다. 이에 본지는 정치, 사회 분야에서 뜨거운 논란을 낳았던 10대 뉴스를 선정해 독자들과 함께 되새겨 보고자 한다.

   

① 천안함 침몰

3월26일 오후 21시22분경 서해 백령도 남쪽 1.5km 부근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우리 해군 소속의 천안함이 침몰했다. 당시 천안함에는 승조원 104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사건 당일 58명이 구조됐다. 민군합동 구조대가 즉시 구조활동에 나섰으나, 거센 물살과 고르지 못한 날씨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사고 발생 사흘 뒤인 29일 침몰한 함수와 함미의 위치가 최종 확인되었다.

   

4월3일 故 남기훈 상사의 시신이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실종자들이 속속 발견되기 시작했다. 4일부터 함미와 함수의 인양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으며 12일에는 실종자 전원 또는 대다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함미 부분이 백령도 연안으로 부분 인양되었다. 그러나 실종자 가족은 물론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15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된 함미 부분 인양 결과 나머지 실종자 46명 중 36명이 사망한 상태로 발견됐다. 이어 21일 연돌에서 실종자 1명이 추가 발견되기도 했다.

24일 오전 8시부터 함수 부분 인양에 착수해 정오 무렵 완료하였으며 지하2층 자이로실에서 실종자 1명이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어 총 실종자 46명 중 40명을 운구했다. 끝내 찾아낼 수 없었던 실종자 6명은 산화자로 처리되어 유해 대신 생전 유픔으로 29일 영결실이 거행됐다. 민군합동조사단이 구성돼 조사를 펼쳤고, 이 결과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것으로 최종 결론을 냈다.

5월24일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사건 관련 담화문을 발표해 북한의 무력 도발 시 엄중 대처하고 남북 간의 교역 단절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회 일각에서는 사건 발생 10개월이 넘도록 사건정황과 증거 등 각종 의혹과 논란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 역시 자신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며 극구 부인하고 있다.

② 북한 3대세습

북한은 9월28일 노동자 대표자회를 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했다. 사실상 이를 통해 후계자로 확정을 공식화했다. 또한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경희에게도 대장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3대 세습’을 위한 친족지도체제 구축을 완료했다. 그동안 김 위원장 건강악화가 사실로 확인된 가운데 급변사태에 대한 내부의 우려를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또한 대외적로는 김 위원장의 유고상황이 발생해도 체제가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공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정은에 대해 알려진 내용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름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김정운’으로 알려졌다가 지난해 하반기경 김정은으로 확인됐을 정도다. 1983년생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1912년과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인 1942년, 그들이 선언한 강성대국 달성해가 2012년이란 점에서 그가 1982년에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은의 후계자 지명설은 2008년부터 소문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장남인 김정남이 아버지 김 위원장의 눈 밖으로 말려났으며, 셋째아들인 김정은이 후계자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1월 초, 김 위원장이 노동당조직지도부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확정한다”는 ‘교시’를 하달하면서 소문은 진실로 확인됐다.

북한 후계구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갖가지 억측도 수그러들었다. 최측근에서 김 위원장을 수행하며 존재감을 높였고, 공식적 등장에 대비한 ‘업적 쌓기’에도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의 우상화 작업이 본격화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김 대장을 따르자’는 내용의 우상화 가요인 ‘발걸음’이 북한 전역에 퍼졌고, 가사가 적힌 포스터도 평양시내에 나붙기 시작했다.

③ 與野, 울고 웃은 선거전

6월2일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됐다. 지방의회 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장을 뽑았던 이 선거에서 지방자치단체의 교육감 및 교육의원이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선거였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공공부문 30만 개 일자리 창출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고,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연합은 정권심판론을 앞세워 4대강사업의 부당성 등 여권을 향한 공세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무상급식 정책 등 각종 서민정책을 통해 표몰이에 나섰다.

   

선거는 민선지방선거가 실시된 후 두 번째로, 15년 만에 최고인 54.4%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특히 젊은세대의 투표 참여율이 두드러져 젊은층의 정치 인식이 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개표결과 민주당 7곳, 한나라당 6곳, 자유선진당 1곳, 무소속 2곳이 승리했다. 특시 서울시장 선거의 경우 개표도중 득표순위가 4번이나 뒤바뀔 만큼 접전을 펼치지기도 했다. 결국 오세훈 후보가 2만여 표차로 한명숙 후보에 승리했다.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으로 여겨졌던 강원도와 경상남도에서 여당이 야권 후보에게 패배하는 등 많은 이변이 속출했다. 광역자치의회의원 선거에서도 야권 후보가 당선된 곳이 많았다. 서울시의회와 경기도의회의 경우 여권 관역단체장이 적은 득표차로 연임에 성공했으나, 이원은 야권 후보가 훨씬 많이 당선되면서 여소야대 의회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뒤이어 펼쳐진 7.28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5곳, 민주당이 3곳을 차지함으로써 여당의 승리로 끝났다. 6.2지방 선거 참패 이후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던 여권은 이를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연이은 선거와 상반된 결과는 이후 각 정당의 정치구도 개편은 정부가 단행한 청와대 조직개편 및 개각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④ 8.8 개각파동 ‘고개 숙인 김태호’

6.2지방선거에서 여권이 참패한 후 야권이 주장했던 ‘정권심판론’에 힘이 실리자 4대강사업 등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주요 국정과제에 제동이 걸리는 상황이 연출됐다.

이에 청와대는 후반기 국정운영의 안정성과 권력누수현상(레임덕)을 조기에 방지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청와대 조직개편과 함께 8.8개각을 단행했다.

하지만 개각 대상자로 거론되었던 상당수 인사가 부적절한 발언 및 처신, 비루연루 등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고, 이후 진행된 인사청문회는 이를 성토하는 장으로 변질되는 등 8.8개각으로 인한 진통이 만만치 않았다.

   

신임 국무총리 내정자였던 김태호 前 경남도지사는 개각발표와 함께 정치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등 차기 대권후보로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과 말 바꾸기에 따른 부정적 여론을 극복한 채 8월29일 자진사퇴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김 후보자의 사퇴 발표 직후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이재훈 지역셩제부 장관 후보자 역시 자신 사퇴 의사를 발표했다. 이들은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의혹 등 갖가지 의혹에 휩싸여 인사청문회 내내 논란이 됐던 인사들이었다.

한편 故 노무현 前 대통령의 ‘차명계좌’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조현오 경찰청장은 정치권 안팎은 물론 국민들의 사퇴여론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는 등 내각 입성에 성공했다.

이후 김황식 前 감사원장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내정되었으나, 이 역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주민등록법 위반, 병역기피 의혹 등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호남출신 국무총리로서 여야 간 극적 합의를 통해 무사히 취임할 수 있었다.

⑤ 여야 전당대회 한 안상수, 민 손학규호 각각 출범

6.2지방선거 이후 여야는 2012년 총선과 대선준비를 위한 본격적인 체제 정비에 나섰다. 특히 한나라당은 지방선거 패배의 충격을 조기에 수습하고 현 정부의 후반기 국정운영 안정화를 지원하기 위해 7월14일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에서 안상수 의원이 신임 대표로 선출됐다.

안 대표의 최대 경쟁자였던 홍준표 의원과 접전을 벌인 끝에 462표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홍 최고위원은 여론조사에서 안 대표에 앞섰으나 대의원 투표에서 따라잡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정형 인사인 안 대표의 당 대표 선출로 지방선거 전후로 극심하게 불거졌던 당내 계파갈등이 어느 정도 안정됐다는 평가와 함께 그가 대표적인 친이계 인사라는 점에서 당청 간에 존재하던 소통부재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6.2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후 한 달여 만에 열린 7.28재보선에서 참패한 민주당은 10.3전당대회를 열고 손학규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다. 사실상 2012년 차기 대권을 위한 전초전이었던 까닭에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등 이른바 ‘빅3’가 총출동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흥행몰이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대중성에서 앞서는 손학규 대표는 취임 직후 지지율이 급상승해 1위로 독주하고 있는 박근혜 前 대표에 이어 차기 대권주자 2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전당대회 효과가 끝난 후 가파른 지지율 상승세는 한 풀 꺾인 상황이다. 현재 비슷한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국민참여당 유시민 원장과 박빙의 2위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함께 주목할 만 한 점은 당초 중도성향이 짙었던 민주당 내에 ‘진보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⑥ ‘몸통 없는 사건’ 민간인 불법사찰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촉발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영포게이트, 대포폰 사용 등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중이다. 권력의 핵심부가 개입했다는 정황증거 및 물증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검찰은 이에 대해 소극적인 수사로 일관해 지탄을 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사법 처리된 관련자는 모두 7명이었다. 불법사찰을 주도한 혐의로 이인규 前 공직윤리지원관 등 관계자 3명을 구속한 것을 시작으로, 파견근무 당시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의 부인을 뒷조사한 혐의로 경찰청 소속 김모 경위를 기소했다. 그리고 진경락 지원관실 前 기획총괄 과장 등 전직 관계자 3명을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하지만 주요 관심사이자 핵심의혹이라 할 수 있는 ‘몸통’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수사결과 발표 직후 검찰은 약식 브리핑을 열고 “김종익 씨 사찰사건과 관련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며 이번 사건을 이끌었던 “특별수사팀장 오정돈 부장도 법무부 감찰담당관실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깃털’도 제대로 뽑지 못한 용두사미식 수사였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이번 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이 자주 거론됐다.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영포게이트’마저 불거졌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입증하지 못해 수사는 조기 종결 처리됐다. 하지만 검찰수사와는 별개로 정치권에서는 ‘배후’를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한나라당 소장파로 분류되는 정두언, 정태근, 남경필 의원 등이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겠다며 의지를 다지는 중이다. 이들은 이번 불법사찰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특히 정태근 의원은 9월1일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을 직접 거론하며 이번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⑦ ‘김길태 사건’ 극악무도한 범죄의 확산

지난 2월 부산에서 발생한 여중생 납치 살해사건이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빠뜨렸다. 집에 혼자 있던 여중생이 이웃 청년이었언 김길태에 의해 납치되었고, 경찰은 2월27일을 기해 공개수사를 펼치다가 3월2일 김길태에 대한 공개수배령을 내리고 검거에 나섰다.

이어 7일 실종된 여중생은 집 부근의 가정집 물탱크 안에서 나체로 숨진 채 발견됐다. 물탱크 안에는 석회가루가 뿌려져 있었고, 벽돌 등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경찰은 발견된 여중생 시신에 목이 졸린 흔적과 성폭행 흔적이 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부산지역에 갑호비상령을 발동하고 헬기와 부산지역 전 경찰서 형사 48개팀 288명, 전의경 등을 동원해 사상구 일대를 정밀수색하며 검거에 주력했다. 또한 김길태를 전국에 공개수배하면서 신고포상금을 500만 원에서 2,000만 원으로 올렸다. 피살된 여중생은 3월9일 장례식을 치르고 모교인 사상초등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부산영락공원에서 화장됐다.

   

그 후 김길태는 3월10일 오후 3시 부산 사상구 덕포시장 인근 주차장에서 경찰에 의해 검거됐다. 빈집에서 은신하던 중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도주를 시도했으나, 부근을 수색하던 경찰과 격투 끝에 체포됐다.

김길태는 검거 전부터 검거 후까지 이례적으로 얼굴이 모두 공개됐다. 6월25일 열린 1심 재판에서 “과거에도 성폭력 범죄 전력이 있는 데다 반인륜적, 반사회적 범죄를 거듭하는 점, 오로지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어린 피해자를 잔혹하게 살해한 점,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점, 폭력적인 성향”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외에도 올해는 유난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극악무도한 성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한 학교운동장에서 납치돼 성폭행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마련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⑧ 연예인 자살

3월29일 탤런트 최진영 씨가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팬들을 충격 속에 빠뜨렸다. 직접적인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였다. 지난 2008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 최진실 씨의 동생으로, 누나에 대한 그리움, 연예계 활동과 관련된 부담 등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31일 발인식을 갖고 모교인 한양대학교에서 노제를 거쳐 경기도 양평 갑산공원 내에 있는 누나 최진실 씨 곁에 안장되었다.

이로부터 석 달 뒤인 6월30일, 대표적인 한류스타인 탤런트 박용하 씨가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발견 1시간 전 후배에게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술을 마신 상태로 귀가한 것으로 보아 순간적인 충동으로 목을 맸던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우울증 등 병력은 없었다”며 “부친의 암투병, 사업활동과 연예활동에 따른 어려움에 스트레스로 술을 마신 뒤 충동적으로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그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한국팬들 못지 않게 일본팬들의 애도물결도 높았다. 그의 장례식에 많은 일본팬들이 참석했고, 그 후에도 애도 분위기가 한 동안 이어졌다. 일본의 한류 전문지 ‘한 칠리 페이퍼’는 박용하를 추모하는 특별판 ‘용하 포에버’를 7월 30일 발간하기도 했다.

연예인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제 불황과 나날이 각박해지는 사회분위기로 인해 마음의 위안을 받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이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고 있는 만큼 대안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⑨ 재계에 부는 사정바람

2010년 후반기, 검찰은 대기업을 대상으로 사정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한화그룹과 태광그룹을 거쳐 C&그룹으로 수사가 확대되면서 서울서부지검에 이어 대검찰청 중앙수사본부까지 나서 본격적인 수사에 뛰어든 것이다. 대검 중수부가 직접 수사에 나선 것은 ‘박연차 로비사건’ 수사 이후 14개월 만이란 점이 더욱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검찰의 움직임에 정치권과 재계는 거센 사정 바람이 불어닥치는 것 아니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또한 수사대상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기업들은 모두 “우리는 아니다”며 이른바 ‘폭탄돌리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재계는 물론 정치권 안팎에서는 구체적인 의혹과 함께 기업의 실명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흐름에 국세청과 공정위원회까지 가세하는 양상이다. 국세청장은 대기업의 과세에 대한 태도변화를 직접 주문했고, 공정위는 태광그룹 계열사인 동림산업개발의 골프장 회원권을 태광산업을 비롯한 계열사들이 비싼 값에 사들인 의혹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렇듯 검찰과 국세청 그리고 공정위 등 사정기관의 움직임이 ‘대기업 손보기’가 아니냐는 의혹도 불거져 나오고 있다.  앞서 논란이 됐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의 무능과 봐주기식 사수 의혹이 불거지자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대안용 수사라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지난 광복절에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사회론’을 들고나오며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지난 9월13일 대기업 총수들과 만난 자리에서 “공정사회가 기업사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지만, 이후 사정 기관의 수사와 조사가 맹렬히 이어지면서 재계의 불안감은 해를 넘겨 계속될 전망이다.

⑩ G20정상회담 개최

지난 11월11일부터 12일까지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상회의 폐막 직후인 12일 오후 코엑스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회의 통해 상당한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고 밝혔다.

또한 이 대통령은 “이번 회의에 대해 앞으로 많은 언론들과 국제사회가 평가하게 될 것”이라며 “한국은 서울 정상회의를 통해 새로운 주제를 내고 과거에 합의되지 않은 것을 합의하는 의장국 역할을 다했다고 자신했다.

가장 문제가 됐던 ‘환율전쟁’은 일단 임시봉합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지난 10월 경주에서 열린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기준을 만들자는 원칙에 합의했지만 언제 어떻게 하자는 약속은 없었다. 이에 내년 상반기까지 기준을 만들고 평가하는 절차를 밟아 세계 환율문제 안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힘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나라가 제안했던 ‘개발의제’에 대한 특별한 성과도 있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G20 회원국들은 타 국가들의 개발의제에 대해 활발히 토론하고 참여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뿌듯하고 보람있는 성과라 할 만하다.

정상회의 내용과는 별개로 우리나라가 의장국이자 개최국으로서 이번 G20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이에 시민들의 자발적 승용차 2부제 운행참여와 자원봉사자들의 열정적인 활동 등 우리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이번 회의의 성공적 개최에 큰 몫을 해냈다는 것이다.

또한 당초 우려됐던 대규모 폭력시위나, 테러 등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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