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북파공작원) 후원회/최승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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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북파공작원) 후원회/최승민 회장
  • 취재/이종철 기자
  • 승인 2005.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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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해 바친 젊음,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할 때
국가를 위해 충성한다는 소명 아래 권익 보호에 앞장서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북파공작원의 존재가 알려진지 이제 5년이다. 이후에도 그들은 국가로부터 외면당해 왔다. 이사를 갈 때조차 정부 측에 신고를 해야 했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흉악사건이 터지면 가장 먼저 조사대상에 오르기 일쑤였다.

밝혀지는 H.I.D의 실체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치루고 민족분단의 아픔만을 남긴 채 1953년 7월 27일, 전쟁 발발 3년 만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 3년간의 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후에도 많은 내부적 갈등과 문제점을 떠안아야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북파공작원, 즉 H.I.D문제이다. 한민족 간에 서로 총구를 겨누고 공작원을 보내야 하는 고통스런 상황에서 어쩌면 가장 큰 피해자는 국가를 위해 충성한다는 소명 아래 젊은 날,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진 H.I.D 대원들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몇 십 년을 침묵 속에 숨어 지내야 했던 그들의 존재가 이제야 도마 위에 올려졌다는 것은 분단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아픈 현실을 들여다보는 거울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1953년 7월27일, 유엔군 수석대표 W.K.해리슨 중장과 공산군측 대표 남일이 3조 63항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함으로써, 한국국민들의 통일열망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한국전쟁은 결국 정전으로 끝맺게 된다. 전쟁은 중단됐지만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각각의 물밑작업은 발 빠르게 돌아갔다. 그런 과정에서 북쪽에서 내려 보낸 간첩, 남파공작원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군에서도 1951년 본격적으로 북파공작원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주로 북한 출신들로 구성했는데 자발적이거나 때로 강제 동원되기도 했다. 60년대 와서는 육군부대 정보부 산하 물색조에 의해 국가에 충성을 하면 북파공작원들에게 군장교로 예우를 해주거나 사회에 나오면 취직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며 속임을 당하였다. 간혹 우범자, 전과자, 매혈자, 생활빈곤자 등도 선발되었다. 80년대에 와서야 공식 경로를 통해 지원자를 선발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에 의한 청와대 습격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들의 존재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본격적으로 북파공작원 인권문제가 수면 위로 나온 것도 영화 ‘실미도’ 등이 만들어진 근래에 와서다.

수면 위로 떠오른 북파공작원의 존재
얼마 전 우리 영화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 시대를 연 영화 ‘실미도’를 기억하는가. 그 영화에서 다뤄진 것이 1968년 김신조 등에 의한 청와대 습격사건이다. 영화를 통해 그 동안 수면 아래로 잠겨 있던 북파공작원들의 존재감이 일반인들에도 분명하게 각인됐다. 한낱 사형수들의 반란으로 오인돼 명분을 얻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그들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영화에 무관심한 장년층을 극장으로 끌어 모으는 저력을 보여주며 잊혀져갔던 하나의 사건을 다시 현재진행중인 문제로 도마 위에 올려놓기에 이른다. 그러나 영화는 픽션에 지나지 않아서 실제 북파공작원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H.I.D 특수임무 국가유공자협회 후원회 최승민 회장은 그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 모두가 전과자나 성격이 포악한 인물들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그들 내에는 엘리트도 많았다”는 것이 최승민 회장의 설명이다.



H.I.D 대원들의 실질적인 삶을 위한 후원
8천여 명의 북파공작원 중 7800여 명이 사망했고 200여명은 그 생사조차 불분명한 상태다. 나머지 얼마 되지 않는 생존자들조차 살아가면서 숱한 불이익에 직면해야 했다. H.I.D였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북파공작원 출신 대원들의 현실이다. H.I.D라는 배경이 정상적인 직업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대원들이 본의 아니게 사실을 숨기고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몇 년째 후원회를 맡고 있는 최승민 회장은 국가최고유공자에 속하는 H.I.D 대원들이 정부에서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 현실이 안타까워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후원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H.I.D 대원과 유가족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과 같이 사회 그늘진 곳에서 비슷한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웃들에게까지 그 도움의 손길을 넓히고 있다.
근처 초등학교 앞에서 대원들이 교통봉사를 하고 있고 부근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어려운 분들을 돕기 위해 점차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H.I.D 대원과 최승민 회장은 이미 불우이웃, 무의탁노인, 소년소녀가장 돕기 등의 사업을 해오고 있다. 보다 원활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 후원회에서는 많은 수익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는 최 회장은 정상적인 업무절차에 의해 인, 허가를 받아, H.I.D 대원과 유가족을 주축으로 전기통신, 청소, 경비용역, 경호업무, 무대영상사업 등 다수의 사업을 운영 중이다.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사회의 밝은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보다 많은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최 회장은 밝혔다.

시급한 보상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길
이번에 특수임무 국가유공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수급시기가 다소 늦춰지고 있어 H.I.D 대원 당사자나 유가족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이미 생사를 달리한 대원이나 보상에 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유가족들도 있어 정부차원에서 꾸준한 관리와 노력이 요구된다. 특수임무 국가유공자들의 사후처리문제 또한 애매한 기준으로 유가족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부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북파공작원이라는 이유로 국립묘지에 안장을 못했었다. 이번에 일부 유공자의 유골이 1, 2차로 나뉘어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이 되기도 했으나 아직 많은 위패들이 국립묘지가 아닌 다른 곳에 안치돼 있는 실정이다.
북파공작원의 존재가 알려진지 이제 5년이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이사를 갈 때조차 정부 측에 신고를 해야 했다.
최승민 회장은 “같이 생활하다보면 누구보다 정도 많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인데 지금까지도 일반인들은 거부감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을 열어주길 바란다.”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길 희망했다. 더불어 H.I.D 대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더 열중할 생각이라고 말하며 H.I.D 대원들에게 “일단 본인부터 마음을 열어야 남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법이다. 환한 곳으로 나와 같이 좋은 일하며 살자”며 더불어 살기 위해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사회적으로 큰 차별을 받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특수임무국가유공자협회 후원회 최승민 회장의 뜻이 아름다워 보인다. 조속히 보상 문제가 해결되어 유공자와 유가족들의 마음에 진정한 봄이 찾아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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