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13일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앞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이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리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분신 자결한 전태일. 헌신적으로 노동자 인권운동을 펼쳤기에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0년 11월13일] 스물 두 살의 노동자 전태일 분신
전태일은 1948년 8월26일 대구의 한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1954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1960년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였으나, 같은 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학교를 중퇴하고 이때부터 동생과 함께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1965년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기술을 바탕으로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보조로 취업해 하루 14시간씩 힘겨운 노동을 하고 일당으로 당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받았다.
이듬해 직장을 옮겨 미싱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이 무렵 함께 일하던 여공이 직업병으로 인해 폐렴 3기 진단을 받고 강제 해고되는 등 사업주의 노동착취와 비인간적인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여공들의 어려운 일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968년 우연히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인 노동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 법의 내용을 이해한 뒤, 이때부터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6월 드디어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고 회원들과 평화시장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설문을 통해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나고 평화시장에서도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전태일은 한동안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1970년 9월 평화시장의 노동환경 개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켜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당시 노동실태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를 수합하고,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노동조건 개선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평화시장 근로개선 운동에 나섰고, 10월8일 2명의 동료와 함께 평화시장(주) 관리사무실을 찾아가 사업주 대표들과 임금·노동시간·노동환경의 개선,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해줄 것 등을 협의하였다.
이즈음 정부의 태도도 바뀌어 회유를 통해 일을 무마하려는 쪽으로 돌아섰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약속을 하였으나 번번이 지켜지지 않는다. 이에 분개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분신사건 당일인 11월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火刑式)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를 준비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평화시장 주변에는 시위 소식을 들은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경찰들은 평화시장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주위를 향해 소리 높여 그들의 요구를 외쳤으나 플래카드를 경찰에게 빼앗기고, 시위 역시 경찰의 방해로 무위로 끝나갈 즈음, 전태일은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하였다.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70년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만 전국에서 2,500여 개에 달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두가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에 자극을 받아 출현하였다. 그 결과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오늘날에도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1918년 11월11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전 세계를 전쟁으로 끌어들인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11일 미국과 독일이 휴전협정에 서명함에 따라 마침내 막을 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의 점령지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시찰하러 온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인 가브리엘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는 사건을 계기로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어 이 사건을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이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1개월 만에 선전포고를 한다. 곧이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 유럽이 3일 만에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갔다.
1914년 베른 전투와 솜전투로 200만에 가까운 군사가 죽었으며 러시아와 독일의 타넨베르크 또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계속 되었다. 영국은 해상봉쇄를 통해 독일로 들어가는 물자를 통제하였고 1917년 독일은 이 해상 봉쇄를 뚫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펴 중립국 선박까지 공격했다. 그 중 미국도 피해를 보아 결국 미국이 연합국으로 참전, 전세는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 독일과의 전쟁을 중단하였다. 이로써 동부전선에서 싸울 필요가 없는 독일은 서부인 프랑스를 총공격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연합국인 미국이 총공격을 시작하니 여러 동맹국들은 항복하고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결국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전쟁 중에 일본도 연합국에게 참전 중국도 전쟁 말기에 참전했다.
1914년 발발 이래 4년 동안 무려 2,0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1978년 11월18일] 짐 존스의 인민사원 집단 자살
남미 가이아나 정글에 자리 잡은 짐스타운! 1978년 11월18일 사이비 교주인 미국인 짐 존스와 그를 추종하는 미국의 광신도 900여 명의 시체가 발견됐다. 가이아나 짐스타운에 세워진 이른바 인민사원에서 발생한 이 최악의 집단자살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당시 어린이 276명을 포함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청산가리를 탄 음료를 마셨고 저항한 일부는 총살된 것으로 조사 됐다.
교주 존스(46세)와 그의 애인 마리아 카차리스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튿날, 가이아나 군대가 현장을 조사하고 생존자를 찾았다. 11월20일까지 아이들 5명과 어른 30명이 정글에서 나왔다.
현장에서 탈출한 교주의 고문변호사에 따르면 존스가 “종단투쟁의 일환으로 집단자살하는 아름다움”을 역설했다고 한다.
교주 짐 존스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가이아나로 떠났던 레오 라이언 미 하원의원과 NBC방송 기자 등 5명이 피살된 채로 발견됐다. 미국의 국민들이 사이비 교주를 추종해서 외국으로 건너가고 아무런 저항 없이 집단자살의식에 동참했다는 사실에 미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목사 출신의 짐 존스는 한때 샌프란시스코 주택국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정치수완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이용해 빈민박해와 계급차별 타파를 주장하며 교인을 모았다. 캘리포니아 레드우드계곡, 샌프란시스코로 사원을 옮기며 신도 수를 늘리고, 특히 백인 중심의 미국 교회를 비판, 흑인 신자를 끌어들였다. 신자들의 헌금으로 존스 목사는 로스앤젤레스에도 교회를 세우고 경호원과 일단의 열성스런 수행원을 거느리고 나라 안을 비행기로 날아다녔다. 신자들을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버스를 구입했다.
이탈신도의 비리 폭로가 이어지자 1,200명 신도와 함께 가이아나로 떠난다. 포트카이투마 인근 정글에 정착한 그는 3,000만 평 규모의 ‘존스타운’을 건립했다. 존스는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칼 마르크스와 히틀러, 스탈린 등에 심취했고 “세상이 핵전쟁으로 멸망할 것”이라며 자신이 구세주임을 자처하다가 가이아나에 존스타운을 건설했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인종화합의 거룩한 이상향을 표방했지만 존스타운의 이면에는 노동착취, 재산약탈과 성폭력, 이탈 위협이 존재했다. 사원을 하렘으로 이용한 그는 여성신도들로 하여금 30여 명의 아이를 낳게 만들었다. 한 때 짐 존스를 추종했던 사람들은 교주 짐 존스는 성도착 환자로 자신을 신으로 믿길 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도 어떻게 집단 자살이 결정되고 왜 수많은 신도들이 이 참극에 순수하게 동참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