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형 1인 1적(1人1籍) 편제방안' 검토
헌법재판소가 지난 2월 3일 호주제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림에 따라 그동안 호주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회적 논란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과거 헌법 제정 당시부터 가부장적인 봉건혼인 질서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표현했다"며 "남녀차별이 명백한 호주제를 미풍양속을 이유로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헌재의 이번 결정으로 국회에서 계류중인 호주제 폐지와 새로운 개인별 신분등록제도를 뼈대로 한 민법 개정안, 호적법 개정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이 제도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은 정치권 내부에서는 별다른 저항 없이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림단체는 "전통 가족질서를 해치는 최악의 평결"이라며 반대투쟁 방침을 밝히고 나서는 등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아 진통이 예상된다.
어려운 경제에 단물 빠진 '가족'
경제가 어려우면 가족이 등장한다. 1970년대 신보수주의 물결 속에 가족위기 논쟁이 치열했던 서구의 경험, 험난한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시절 "가족만이 희망이다"라고 목소리 높이던 우리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2005년 새해 들어 가족이 다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TV 광고에서 가족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자폐아 문제를 포함해 가족 간 사랑을 그린 KBS 2TV "부모님 전상서"와 홀어머니와 자식 간 화해를 담은 MBC "한강수 타령" 등 주말극은 모두 가족을 주제로 삼고 있다. CF도 마찬가지다. IMF 때 교사 한수성씨가 만든 동요 '아빠 힘내세요'는 한 TV 광고에 소개돼 전국의 아빠들을 울렸다. 이 드라마와 영화들은 살면서 겪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가족이라는 점을 보여주었기에, 고달픈 세상에서 가족으로 위로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어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언제까지 가족이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시점에서 가족을 근간으로 하는 호주제가 헌법재판소에서 '뇌사 판정'을 받았다. '부모성 함께쓰기'로 폭발한 사회여론을 기회로 여성연합은 99년에 호주제 폐지를 주요사업으로, 2000년부터는 중점사업으로 설정하여, 전국 50여개 단체에서 '호주제 불만 및 피해사례 신고전화' 운영, 거리캠페인, 서명운동, 사이버 호주제폐지운동 전개, 국정감사 모니터 등을 통한 국회 압박에 박차를 가했다. 무엇보다 호주제는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전체의 문제이며, 우리 사회가 성평등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확장시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이하 '호폐연') 발족시켰다.
특히 호폐연의 주요사업이었던 '주제 위헌소송' 민변의 이석태, 강금실 변호사가 처음으로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될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국회의원들에게만 민법개정을 맡기기보다는 국회 의결과 관계없이 호주제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전술이라는 판단으로 시작됐다. 예상대로 이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5차례의 변론 때마다 뜨거운 공방을 거쳐 지난달 3일 드디어 '불합치' 결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요 속의 외침, 남녀평등 > 전통
호주제 폐지 문제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읽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논란의 종착역이 실행을 염두에 둔 어떤 '입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호주제는 국가보안법, 새만금 간척사업,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등과 함께 이 시대의 '경계'를 가르는 주요 화두다.
사실 법률제도 가운데서 호주제도 만큼 많은 국민의 큰 관심 속에서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안도 드물 것이다. 우리의 가족법은 그 동안, 다른 나라의 그것과 구별짓게 하는 특질이자 또한 우리의 순풍미속(淳風美俗)이므로 이를 유지, 존속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외래(外來)의 제도로서 현실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녀를 차별하는 등 헌법에 반하는 낙후된 것이어서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아왔다.
이러한 가운데 헌재는 결정문을 통해 호주제가 전통 가족제도라는 주장에 대해서 헌법이 정하고 있는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 실현에 장애를 초래하는 전통은 용납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번 결정을 통해 헌법이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성평등' 가치가 그 어떤 관습과 전통, 이념에 의해서도 침해받을 수 없는 천부의 가치임을 확인한 셈이다.
정현백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씨는 "한국의 가족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혼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현재 가족의 모습은 남성(남편)부양자와 피부양자인 여성(아내)과 자녀로 구성된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와 기능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이번 호주제 폐지안의 주요골자를 보면 호주 관련 조항을 전부 삭제하고, 자녀의 성은 아버지 성을 윈칙적으로 따르되 부부합의시 어머니성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재혼가족의 경우 계부의 성으로 성을 변경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헌재 후폭풍 호주제 폐지 굳히기
헌법재판소는 1997년 현행 호주제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고, 호주제 폐지를 뼈대로 하는 정부의 민법 개정안은 17대 국회 개원 이후의 처리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헌재가 위헌이라고 판단한 부분은 민법 788조, 781조1항 일부분, 826조 3항 일부분 등 3개 조문이다. 788조는 '일가의 계통을 계승한 자, 분가한 자 또는 기타 사유로 인해 일가를 창립하거나 부흥한 자는 호주가 된다'면서 호주를 정의한 부분으로 호주제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핵심조항이다. 781조 1항은 '자(子)는 부가(父家)에 입적한다'며 자의 입적, 826조 3항은 '처는 부의 가에 입적한다'며 부부간의 임무를 규정한 부분으로 이들 조항 역시 호주제 유지를 위한 골격에 해당된다.
이런 위헌 의견은 재판관 9명 가운데 6명이 찬성했고 나머지 권성 재판관은 모두 합헌, 김영일 재판관, 김효종 재판관은 일부 합헌이라는 소수 의견을 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경제력 향상과 이혼율 증가로 여성이 가장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호주제를 고수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호주제가 현실과 유리된 제도라는 점을 적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헌재의 판단은 시대적 추세와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회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마찰을 빚던 정치권도 이미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을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과반수가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 전반에서 호주제 폐지를 대세로 인식하고 준비작업을 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호주제 폐지 격돌이 시작된다
그러나 여전히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호주제를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호주제도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으로 가족을 유지하는 뿌리라고 보고 있으며 부계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자녀성은 아버지성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몇가지 질문에 진지하게 응답해볼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부작용은 없을까 하는 것과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가족제도가 종래의 제도가 떠맡았던 역할을 무리 없이 이어받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호주제의 역할은 과연 어떤 것이었으며, 오늘날 그 유용성은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에 대한 검토는 필요조건이다.
더욱이 정부가 작년 호주제 폐지방침을 결정한 후 잠정적으로 예시했던 호적제 대안과 올해 대법원이 공개한 혼합형 1인1적 가족부 편제 방안을 놓고 가장 두드러지게 일었던 비판이 가족해체 담론이었다. 기왕에 부모와 본인?배우자, 자녀의 3대가족 관계를 나타내면서 본인 형제자매의 인적사항은 왜 기록을 안 하는가, 결혼한 여성의 등록부에 시부모가 표시되지 않으니 이게 가족해체를 촉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까지 나왔다고 한다. 결국 이런 지적이 수용돼 정부의 최종안은 배우자 부모의 인적사항, 형제 자매의 인적사항까지 기재하게 되었고 부부와 미혼자녀는 원칙적으로 동일본적을 유지하도록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족'이란 과연 무엇이고 신분등록제도를 가족부제로 하기로 했다고 해서 '가족'해체는 완화될 것인가란 의문이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제도에 관계 없이 '가족'해체론자들이 말하는 '가족'은 이미 해체되었거나 해체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신분등록제, 1인 1적(籍)으로 하자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호주제는 폐지를 위한 큰 산을 넘었다. 그러나 '걸림돌'은 남아 있다.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국회의원들이 호주제 폐지가 골자인 민법 개정안의 실명제 투표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또 기존 호적을 대신할 신분등록제를 두고 관련 부처와 국회의 합의과정에서도 진통이 예상된다.
대법원과 법무부에서 논의되는 큰 줄기는 '개인별 신분등록제'와 '가족부제'다. 개인별 신분등록제는 각자가 별개의 '신분등록부'를 갖는 1인1적제를 기본으로 하되 별도의 원본에 부모와 자녀 등 1대 직계 가족과 배우자의 인적 사항도 포함시킨 형태다.
1인1적제는 개인의 신분변동사항을 담은 신분등록부와 별도로 배우자 부모 자녀의 정보를 관리, 필요에 따라 가족증명 혼인증명 등의 공부(公簿) 증명을 발급하도록 한 것이 장점이다. 호적제도의 폐단인 개인의 프라이버시 노출을 막는 동시에, 국민 생활과 법률관계 등에 필요한 사실확인은 지금보다 간편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행정 전산화에 따라 국가적 기록관리 수준을 높인다는 점에서도 반길 일이다.
국회에 제출돼 있는 가족법개정안의 핵심은 호주제도의 폐지이지만, 이 개정안은 그 밖에도 자녀의 성(姓) 취득 및 변경, 근친혼 금지의 범위, 친생부인의 소(訴)의 원고적 격 및 제소기간, 친양자 제도, 부양상속분 제도 등 가족법 전반 에 걸친 많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자녀의 성(姓) 변경 문제와 친양자 제도는 오랜 관습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호주제 폐지는 오랜 세월에 걸쳐 국민의식과 사회환경이 크게 변화한 데 따른 것이다. 가족부제를 취한다고 해서 가족의 연대가 강화되고 1인1적제를 취한다고 해서 가족의 해체가 촉진되는 것은 아니다. 변화에 따른 가족해체는 낡은 제도에 의지해 막을 수 있는 게 아닌개인과 사회가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고민하는 것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문제다.
사회 일각에서 신분등록제의 개편에 대한 이견 내지 합의의 지연을 빌미로 호주제 폐지를 지연시키려는 시도가 있지 않나 하는 우려의 시각이 있지만, 신분등록제도는 개인의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신분관계의 변동을 공인, 공시하는 기술적 제도이므로, 큰 마찰 없이 적절한 합의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가족은 지금 엄청난 책임으로 과부하에 걸려 있다. 이젠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도덕운동이 아니라 가족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사회정책으로 과부하를 풀어야 한다. 호주제 폐지는 다양한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든 것에 불과하다. 호주제 폐지에 대한 헌재의 판결 이후에도 한동안 혼란과 갈등은 지속될 것이며, 정책방향에 대한 혼선도 여전할 것이다. 호주제 폐지가 가족해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흘려들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하되 급격한 변화를 지양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호주제도의 폐지는 산적한 입법 여정의 한 터널을 지나는 것일 뿐이다. 그 동안 존폐를 둘러싼 대립의 앙금을 털어내고 모두 힘을 합쳐 이혼 자녀의 양육, 노인부양 문제 등 새로운 입법과제의 해결에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