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DJ는 최근 민주당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간만에 정치적 발언을 내놓았다. DJ 스스로도 '오랜만의 정치 이야기'라고 했다. 여당 초선의원들이 그동안 철이 없었다는 투의 이야기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여권에 대한 질타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내용. 특히 열린우리당과의 합당 문제로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민주당 핵심 인사들과의 대화 중에 나온 이야기란 점이 의미심장하다.
여권내에선 '박지원 살리기 나섰다'분석 제기
DJ는 "민주당이 창당된 지 50년이 넘었는데 지금같이 어렵게 된 적은 없었다"며 "뼈를 깎는 자성을 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 한 인사는 "(DJ가) 민주당이 (열린우리당과의) 합당 쪽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저런 발언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DJ는 민주당이 열린우리당과 성급하게 합당하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주문 한 것"이라고 말했다. DJ의 '정치 발언'이 있은 며칠 뒤, DJ의 방북 의지가 소개되면서 정치권은 DJ역할론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DJ는 또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통해 DJ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초청하면 방북 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북핵문제 해결에 DJ가 일정의 역할을 하겠다고 자임한 점에 정치권은 주목하고 있다. DJ의 역할 범위에 따라 국내 정치판도에 적지 않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이 있어야만 움직이겠다는 단서가 있긴 했지만, DJ는 인터뷰 자체만으로 북측에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 셈이라고 언급해 자신의 활동이 이미 시작됐음을 시사했다.
정치권에서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손수 나서겠다는 점에서 DJ 존재의 가치를 새삼 느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을 '정치적 계산'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권은 DJ의 입장에 대해 일단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북송금특검 부분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DJ '내 챙기기' 효과 노린 듯
DJ는 대북송금특검에 대해 "굉장히 잘못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DJ는 인터뷰에서 "국가의 책임자가 최고 기밀사항 취급 해놓은 것을 그렇게 까발리면 앞으로 어느 나라가 우리를 신뢰하고 대화를 하겠나"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의원은 "DJ가 단단히 화가 났었던 모양"이라며 "(DJ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뼈 있는 이야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북관계에 대한 사명감이 큰 DJ로서는 북측과의 관계 진작을 위한 일환으로 대북송금특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냉정하게 짚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DJ가 '내 사람 챙기기'를 차원에서 예전에 없었던 감정 표현까지 동원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런 종류의 발언이 나온 시점이 의미심장하다"며 "(대북송금특검 문제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DJ 측근들에 대한 사면복권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경우를 거론할 때는 "굉장히 불행한 일"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DJ는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현대로부터 150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특검의 임무도 아닌 것을 그렇게 박해를 가했는데 대법원에서 무죄취지의 판결이 나왔다"며 "이런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중진 "당시특검 시시콜콜"
DJ의 대북송금특검 발언과 관련, 열린우리당의 한 3선 중진 의원은 "대북 문제와 관련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파헤치다 보면 누가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김 전 대통령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적국이라고 명시된 북한과의 관계 문제는 매우 특별한 사안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론 관계 개선을 해나가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며 DJ가 지적하는 대북송금특검 문제 인식에 공감을 표했다. 그는 이에 덧붙여 "여권 내 많은 인사들이 당시 특검이 정치적인 이해에 얽힐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감히 DJ의 발언에 토를 달겠느냐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지금 DJ의 발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정도의 배짱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으로 보냐"며 "청와대나 당은 현재 DJ에 대해 트집잡을 처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사실 재·보궐 선거를 치러야 하는 당의 입장에서 지나간 문제(대북송금특검)로 DJ와 대립각을 세울 이유가 전혀 없다. 자칫 DJ를 흠집 내는 결과를 초래할 경우 4월에 있을 재보선에서 엉뚱하게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당이 본격적인 당권경쟁 상태로 들어간 점도 DJ 발언을 듣기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라는 시각도 있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 시작과 동시에 시작한 대북송금특검에 대해 DJ가 강도 높게 비판을 하고 있지만 열린우리당에서는 어느 누구도 선뜻 노 대통령을 감싸며 나서지 못하고 있다. 노 대통령을 감싸려다가 DJ에 반기를 드는 모양새로 비칠 때는 감당하기 힘든 당내 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열린우리당의 당권경쟁이 '친DJ-반DJ' 구분까지 보이는 이 시점에서 DJ의 발언이 등장해 당에서는 아주 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제 아무리 정치판 통뼈라 해도 이 시점에서 DJ에게 트집 잡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거사진상 사실 그대로 밝혀야"
대북송금특검에 대한 DJ의 강한 어조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DJ는 라디오 인터뷰가 있었던 다음날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특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DJ는 인터뷰에서 "국가의 책임자가 최고로 기밀사항 취급해놓은 것을 그렇게 까발리면 앞으로 어느 나라가 우리한테 신뢰하고 대화를 하겠냐"며 특검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현정권의 대북정책 첫 단추가 정치적 논리에 휩싸였다는 지적이었다.
DJ는 또 과거사진상규명에 대해 사실 그대로 밝힐 것을 주장, 정치정점에도 접근했다. 그는 "사실은 사실 그대로,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국민 앞에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며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 발언과 관련, 몇 일 전 민주당 인사들과의 대화에서 언급했던 대목을 감안하면, 과거사진상규명 작업을 밀어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뜻을 내비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DJ는 인터뷰에서도 "이제 세월이 흘러 감정?어느 정도 정리되었으니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 역사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고 본다"며 객관성 유지를 강조한 바 있다.
강재섭 대망론 빅4 진입
한나라당 향후 대권주자군에 '강재섭' 이름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최근 원내사령탑으로 선출된 강재섭 원내대표가 대선가도에 불을 붙이고 있다. 공공연하게 '대망론'을 내세우는 모습에서 전에 없던 자신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라는 별칭이 있지만 강 원내대표는 이를 발판으로 대선까지 직행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한나라당 '빅3' 구도도 '빅4'로 변하는 분위기다. 정치권에서는 "여태껏 기회를 엿보고 기다려온 강 원내대표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란 이야기가 쉽게 들린다.
'차세대 주자'라는 호칭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그에게 당 서열 2위의 지위는 '날개'나 다름없다. 특히 행정도시법 파동 이후 박근혜 대표의 리더십이 타격을 입으면서 강 원내대표는 한나라당의 실질적인 리더로 급부상할 기회까지 잡았다. 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여건이 조성된 셈. 이 시장, 손 지사도 내년 6월 임기를 마칠 때까지는 적극적인 당정 참여를 하기엔 불편하다. 그의 대망론이 어떻게 진행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정치를 너무 어렵게 할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흥분돼 있다. 그 동안 비정규직 비슷했는데 오랜만에 일자리 하나 찾았다. 담배도 끊었다. "강 원내대표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자신감 넘치는 행보가 주목을 끈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각들은 대략 비슷하다. 차세대주자로 줄곧 거론돼 오면서도 그 동안 당을 이끌만한 자리에 올라보지 못한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투다. 실제로 그의 최근 행보를 보면 정치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과거 은근히 들추기 시작
그는 원내대표에 선출된 후 기자간담회에서 "당을 위해 한 몸 헌신하겠다는 마음만 먹었다"면서 이어 "나는 당의 '적자' 아닌가"라고 강조했다. 또 "과거에 탈당 유혹도 있었지만 한 번도 탈당을 안 했다"며 탈당 경력이 있는 박근혜 대표의 '과거'를 끄집어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그의 '적자론'이 정치권에서는 의미심장한 이야깃거리로 회자됐다. '대권야망의 본색을 예상보다 빨리 드러냈다'는 뒷이야기가 많았다.
그의 대망론은 올해 초 이미 공개 됐다. 지난 1월 한 인터넷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승부를 낼 때가 오고 있다"면서 "마라톤으로 보면 30km는 뛰었다고 보는데 이제 선두그룹에서 뛰어야 한다"고 야심을 밝힌 것. 그는 구체적으로 "금년 혹은 내년 중 그런 기회가 올 것이라고 본다"면서 "당내 분위기를 볼 때 원내대표 경선도 있고 내년 당 대표 경선도 있고 찬스가 오면 잡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강 원내대표는 자신의 예상과 계획대로 기회를 정확하게 잡은 셈이다. 그의 대망론과 관련 한 당직자는 "(강 대표가) 겉으로는 부드러운 이미지로 보일지 몰라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양반"이라면서 "현재 거론되고 있는 대권 후보감들과 비교할 때 우위에 있다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강 원내대표는 얼마전 기자들과의 사석에서 이 시장과 손 지사의 대권행보와 관련 "지금은 시장, 지사 신분이라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임기를 마친 후에 당에 들어오면 예전처럼 힘 못 쓸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는 후문도 있다.
강 원내대표의 대망론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쪽도 물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강 원내대표의 최근 발언들에 대해 "한나라당에 누구보다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적자' 운운하는 것은 결국 자신만이 제대로 된 후보감이라는 이야기 아니겠느냐"며 "그가 '잠룡'으로 구분되는데 대해 토다는 사람은 없겠지만, 당이 분란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원내대표 자리를 대권 도전의 발판으로 삼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강 대표의 '영남색채'가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유력 대권후보로 안착하기 힘들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영남정서는 한나라당 아니냐"는 영남후보론도 여전히 만만찮다.
강재섭 등장, 빅3 "반갑다(?)"
자타가 공인하는 차세대 주자인 강 원내대표가 영남권 내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점만으로도 빅3측은 충분히 긴장할 만 하다. 하지만 오히려 각 후보군에서는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해석도 제법 나오고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박 대표 측은 강 원내대표의 대망론이 달가울 리 없겠지만, 아직 예민한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행정도시법 파동으로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추스르는 데 강 원내대표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 원내대표가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당 안팎에서는 "실제로는 박 대표 개인의 구원투수이기도 하다"는 해석도 많다.
이 시장 측에서도 강 원내대표의 대망론을 '희망적인' 구경거리로 보는 눈치다. 아직 "지켜볼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크게 나쁘지 않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박 대표와 강 원내대표가 의기투합 할 경우 '영남권 대표론'이 대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긴 하지만 강력한 라이벌인 박근혜 대표와 강 대표가 TK(대구 경북)라는 점에서 겹치기 때문에 반사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해석이다.
손 지사 쪽에서도 강 대표의 등장에 대해 "문제될 것 없다"는 느긋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박 대표, 강 대표, 이 시장 모두 영남인사들이라는 점 때문에 '영남권 대 비영남권' 구도가 돋보일 수 있다는 관점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