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림사건, 민청학련, 김형욱실종, KAL기폭파, 중부지역당사건 등
과거 중앙정보부에 의해 자행된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과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온 동백림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대한공식 진상조사가 최초로 시작된다. 국가정보원과 시민, 종교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과거사위, 위원장 오충일 목사)는 지난달 3일 오전 서울 세곡동 국정원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향후 조사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과거사위가 이날 발표한 우선조사 대상에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동백림 사건' 외에도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및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1962) ▲인혁당 사건(1974)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1979)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 ▲중부지역당 사건 등 모두 7건이다. 사건의 진상이 공개될 경우 한국 현대사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직 생존해 있는 사건 관계자들에 대해 책임론이 제기될 수 있어 정치적,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혁당, 민청학련사건 의혹
당초 조사에서 제외될 것으로 알려졌던 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 사건은 지난 5.16 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부산 지역 기업인 고(故) 김지태씨 소유의 부일장학회를 강제로 국가에 헌납토록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으로 이번에 치열한 내부 논란 끝에 포함됐다. 5.16 장학회 후신인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현재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맡고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지난 1973년 8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 주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일본 도쿄(東京)에서 서울로 납치한 사건이다. ‘동백림사건’은 지난 1967년 중앙정보부가 고(故) 윤이상 씨를 비롯한 예술가, 학자 등 지식인들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해왔다며 발표한 사건으로 당시부터 조작 의혹이 제기됐고 한, 독 양국간 외교적 갈등을 초래했었다.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은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저지른 사건으로 발표됐지만 일부 유족들은 대통령선거용으로 정부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해 왔다.
인혁당 사건은 김근태 복지부장관 등에 의해 고문조작 의혹이 제기돼 왔으며 김형욱 실종사건은 김 전 중앙정보부장이 해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다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으로 아직까지 그 진상이 미궁에 갇혀 있다. 중부지역당 사건은 남파간첩 이선실이 관련된 노동당의 남한 내 지역당으로 판결이 난 사건으로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과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 등 여야 정치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어 정치적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기자회견에서 과거사위 오충일 위원장은 “조사대상 사건은 모두 중앙정보부 출범 이후 발생한 것으로 관련 단체나 시민사회로부터 많은 의혹이 제기됐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거나 인권에 관련된 사건들을 우선적으로 선정했다”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진상을 밝힐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인 10명과 국정원 5명 등 15명으로 구성돼 지난해 11월 출범한 과거사위는 그동안 약 90건의 사건을 추천받아 20여개 사건에 대한 기초조사를 마친 뒤 이번에 우선조사 대상을 확정해 이날 발표했다. 과거사위는 우선조사 대상 외에 나머지 80여건의 다른 의혹 사건들에 대해서도 단계적으로 기초조사를 진행, 내년 11월까지 진실 규명을 계속할 계획이다.
인혁당, 민청학련사건은 1974년 4월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배후 조종해 국가 변란을 꾸몄다는 혐의로 180명이 구속 기소돼 이중 8명이 사형에 처해진 사건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도예종 여정남 등 인혁당계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시간 만에 사형 당해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비난받아왔다.
비상식적인 사형집행에 대해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으며 유가족 등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위기에 빠진 박정희 정권이 64년 검찰 파동까지 불러일으켰던 인혁당 사건을 재조작해 만든 날조극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002년 9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사건 발생 20여년 만에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하면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왔다.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에서 그동안 끊이지 않았던 의혹은 인혁당이 실재로 존재했었는지와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 여부다. 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검사 3명이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썼을 정도로 인혁당의 실제존재 여부는 의문 투성이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시인하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당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인혁당이 실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인혁당의 실재 여부는 10년 뒤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의 조작여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반드시 밝혀야 할 대목이다.
고문 여부도 국정원 과거사 진상규명위가 밝혀야 할 중요한 문제다. 이미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중정이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조서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파견 경찰관을 동원해 구타, 몽둥이 찜질,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자행했으며 이같은 고문으로 사형이 집행됐던 하재완씨 등 관련자들이 탈장과 폐농양증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고 밝혔다. 당시에도 당국은 사형집행 후 송상진씨 등 2명의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지 않고 벽제화장터에서 강제로 화장한 뒤 유골상태로 인계, 고문흔적을 감추기 위한 조치였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김대중납치, 계획적 살해 음모설
김대중납치사건은 지난 1973년 8월 8일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대중씨가 투숙중이던 호텔에서 괴한들에 의해 납치된 사건으로, 당시 김대중씨의 반독재 활동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그를 계획적으로 납치해 살해하려 했다는 의혹을 샀다.
이 사건은 일본영내에서 납치사건이 벌어졌다는 점 때문에 한일관계에도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미국이 김대중씨의 구명에 주요역할을 했다는 설이 알려지는 등 국제적 파장을 낳았다. 지난 1998년 김대중대통령시절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져 박정희 정권 핵심관계자와 중앙정보부의 개입사실이 일부 드러나는 등 사실규명에 진전이 있었으나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사실확인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후 김대중씨는 일본에 체류중이었는데, 김영삼 양일동 송원영 의원 등 당시 야당 인사들은 국내로 귀국했으나 김대중씨는 일본에서 반유신 운동을 계속했다. 73년 7월에는 미국에서 한민통이 조직되었고 일본에서도 김대중 노선?지지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한민통 결성이 준비되는 등 반 유신투쟁이 해외에서 조직화됐다. 이때를 전후해 김대중씨가 납치됐다.
최근까지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김 전대통령은 당시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에 투숙중 6명의 한국인 괴한에 의해 납치된 후 오사카의 한국 총영사관 숙소로 옮겨졌다. 이후 ‘용금호’라는 배를 통해 부산으로 옮겨지던 중 미국측의 압박을 받은 납치자들이 5일 만에 김 전대통령을 동교동 자택에 내려놓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근 진상규명 과정에서 박정희정권 당시 만들어진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암호명 ‘케이티 사건’으로 명명한 뒤 ‘케이티사건 행동별 관계인사 일람표’라는 문서가 79년 만들어졌고,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사인이 들어있으며, 이 문서에 “박정희대통령 보고필”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는 것 등이 새로 발견된 문서의 주요내용이다.
납치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철희 전중앙정보부차장(이후 장영자사건 연루)이 이와 관련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후락 정보부장, 하태준 중앙정보부차장, 김기완 전주일공사 등이 연루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남아있는 의문점의 핵심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직접개입 여부다. 미국과 일본 등 주변국의 역할 등도 관심사항이다.
◆동백림사건, 서유럽 유학생 간첩사건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진 ‘동백림 사건’은 관련자 임석진(당시 34세, 철학박사)이 귀국하여 자수한 것이 계기가 됐다. 검찰 공소장에 의하면 북한은 1957년부터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대남공작 경험자인 박일영을 동독대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조선노동당 연락부 대(對) 유럽 공작총책인 이원찬을 상주시키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하여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재학 중인 유학생 및 각계각층의 장기체류자들을 상대로 공작을 시작하였다.
이들 관련자는 서신, 문화, 주민의 남북교류와 미군철수, 연립정부수립, 평화통일이 불가능할 때의 무력남침 등에 대비한 간첩교육을 받았다. 그 중 11명은 평양에 다녀온 후 해외유학생, 광부, 간호사 등의 명단을 입수하여 평화통일방안을 선전하고, 국내 민족주의비교연구회와의 연계 및 각계 요인들에 대한 포섭, 선거에서의 혁신인사 지지 등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1967년 12월 3일 선고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간첩죄), 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조영수, 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 강빈구, 윤이상, 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 모두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상주장학관을 급파하여 유학생 및 해외인사들의 반정부활동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공소장의 내용과는 달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건 당사자들은 관련자들을 처음 만났으며, 평양을 방문한 적도 없고, 북한으로부터 간첩활동을 하라는 지령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간첩단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현재 재평가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 사건 역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한 재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KAL기 폭파, 김현희 범인 진실의문
KAL기 폭파사건은 대선을 한달여 앞둔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사라진 사건이다. 한국인 해외근로자 93명과 외국승객 2명, 승무원 20명 등 115명이 탑승한이 여객기는 오후 2시 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 무선보고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당시 정부는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필 지령을 받아 KAL기를 폭파했다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항공기 사고 분석의 핵심인 블랙박스 수거와 기체 잔해 수거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 발생 열흘만인 12월9일 현지조사단을 철수시키는 등 정부의 수사과정과 결과 발표에 많은 의문점이 제기돼왔다. 특히 대선전날 김씨를 전격 입국시킨 정부의 행동은 의혹을 증폭시키는 단초를 제공해왔다. 핵심적인 의문은 과연 당시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처럼 북한 공작원인 김현희에 의해 KAL기가 폭파됐느냐하는 점이다. 북한 지령에 의해 폭파됐다는 수사결과는 김씨의 진술이 유일하지만 김씨 말에는 허점이 많다.
김씨가 87년 수사과정에서 밝힌 주소인 ‘평양시 문수구역’은 83년 3월에 없어진 주소이고 부친이 앙골라 무역대표부 수산대표 김원석이라고 했지만 그런 직책과 근무자는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김씨가 87년 11월 12일 이르츠크 경유 비행기를 이용했다고 밝혔지만 이날 비행기는 평양~모스크바 직항이었고 경유노선은 87년에는 폐지된 상태였다. 김씨가 탔다던 모스크바~부다페스트 항공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부다페스트의 비밀 아지트 전화번호라고 안기부가 발표했던 ‘164635’는 유치원 전화번호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안기부가 공개했던 김씨의 화동사진도 사실여부를 놓고 논란이 여전하다. 안기부는 바레인에서 음독자살한 김승일이 소지한 일본위조여권을 재일교포 북한공작원 미야모토가 만들어 준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일본수사당국은 미야모토가 KAL 사건 발생 2년전 간암으로 죽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사고발생 2년 4개월만에 발견된 동체와 고무보트에서 폭파 흔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115명이나 되는 탑승객의 유해 또는 유품이 발견되지 않는 점도 의문이다.
◆중부지역당, 여간첩에 포섭된 조직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은 최근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의 노동당 가입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면서 주목을 받은 사건이다. 당시 사건에 연루됐던 당사자들은 “국가안전기획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 여부가 풀어야할 의문의 핵심이다.
안기부는 92년 10월 전국 조직원 300명 규모의 대형 간첩단 사건인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을 발표했다. 당시 남로당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 사건으로 불렸던 이 사건으로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씨 등 총 6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300여명이 수배됐었다.
당시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남한조선노동당은 북한권력서열 22위인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거물 남파여간첩인 이선실(여)씨가 서울, 인천 등 전국 24개 주요도시의 46개 기업과 단체 등 각계 각층으로 구성된 300명의 조직원을 확보한 가운데 북한 노동당과 남한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온 지하조직으로 소개됐다.
이선실씨에 의해 포섭돼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황인오씨가 91년 7월 강원도 삼척소재 모 여관에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했으며 산하에 강원도당, 충북도당, 충남도당 및 편집국을 뒀다는게 당시 발표내용이었다.
이 의원은 중부지역당 지역조직의 하나인 강원도당 춘천지역책으로 지목돼 구속기소,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의원은 “잠 안재우기, 엎드려 뻗치기 등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안기부의 각본대로 당했다”며 “사건 자체가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부지역당의 총책으로 지목됐던 황인오씨 역시 “안기부에서 취조당하면서 수사관들에 의해 '중부지역당'이 만들어졌다. 나는 ‘중부지역당’을 작명하거나 그 이름으로 활동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부지역당뿐만 아니라 남한 조선노동당과 이를 조직한 이선실씨의 실체 역시 조사 대상이다. 이선실씨는 80년 3월 쯤부터 90년 10월까지 10년 이상을 서울, 전주, 안양 등지에서 숨어지내면서 남파 공작원 10여명을 수하에 거느리고 대남공작을 총지휘해온 인물로 발표됐다.제주도 출신으로 이선화, 이옥녀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80년 이전에도 66년과 73년 두 차례에 걸쳐 남파됐었고, 78년에는 조총련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입국하기도 한 베테랑 공작원이라는 것이다. 당시 안기부는 이선실씨가 90년 10월17일 강화도 해안에 대기중이던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귀환했다고 밝혔다.
◆김형욱실종, ‘反박정희’ 망명…행불
‘김형욱 실종사건’은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둔 후 박정희 대통령과 사이가 나빠져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씨가 지난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건이다. 미국으로 망명한 후 미 의회 청문회에 나가 ‘반(反) 박정희’ 발언을 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표적이 됐던 만큼 그의 실종에는 국가권력이 개입됐다는 의혹이 제기돼왔다.
김씨는 역대 중앙정보부장 가운데 가장 오랜기간인 6년 3개월 동안 막강한 자리를 지키다가 전격 경질당한 뒤 73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김씨는 77년 6월 미 의회 청문회에서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사건’ 등과 관련 박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계속하며 3공화국과 유신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 집필에도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막기 위해 77~79년 윤일균 당시 중정차장(해외담당), 이용운 전 해군제독 등 그와 친분이 있던 인사들을 밀사로 미국에 보내 150만달러 제공, 여권 보장 등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막후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79년 10월7일 당시 54세였던 김씨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실종 6일 전 뉴욕에서 항공편으로 파리에 도착해 특급호텔인 리츠호텔에 묵다가 ‘키 큰 동양인’과 함께 2류호텔인 웨스트엔드 호텔로 옮긴 뒤 카지노에 들렀다가 행방불명이 됐다. 그 후 80년 12월 일본에서 ‘권력과 음모’(부제․전 K CIA 부장 김형욱 수기)라는 김씨 회고록이 출간되자 82년 3월 검찰은 이 책의 내용이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고무, 조했다며 김씨를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국가권력의 개입이 있었다면 중정부장인 김재규씨에게 1차 혐의가 돌아가지만 산하에 정보업무를 수행하는 조직을 운영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김재규씨는 김형욱을 인간적으로 신뢰해 끝까지 협상을 통한 온건한 해결책을 주장한 반면 강경론을 펼쳤던 차지철씨가 김형욱씨를 제거함으로써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의 충성경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정수장학회, 재산헌납 中情개입 의혹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와 지은 정수장학회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어 정치권에서 계속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문제의 핵심은 정수장학회가 MBC 주식의 30%와 부산일보 주식의 100%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중 한사람인 유력 정치인이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어도 되느냐”는 데 있다. 이번에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에 정수장학회가 포함된 것은 재단출범의 모태가 된 재산형성 과정에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개입됐다는 의혹 때문이다.
정수장학회는 박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 다음해인 1962년 부산의 유력사업가였던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를 모태로 ‘5.16장학회’로 출범했다. 삼화고무와 부산일보를 운영하던 기업가면서 2, 3대 국회의원도 지냈던 김지태씨는 62년 3월 재산해외도피 혐의 등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두달 정도 구금생활을 하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쓴 며칠 뒤 공소취하로 풀려났다.
정수장학회에 대한 조사의 핵심은 김지태씨가 부일장학회를 포기하는 과정이 법률적으로 하자가 없는 ‘기업가의 자진헌납’이냐, 아니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인들의 강탈이냐’에 맞춰질 전망이다. 김지태씨의 유족들은 김씨가 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62년 5월25일 부산 군수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수갑을 찬 상태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며 명백한 강탈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박근혜 대표는 그동안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일장학회의 재산포기가 자진헌납이라는 인식을 보여왔다. 한동안 박 대표는 “정수장학회 형성과정에 잘못이 없기 때문에 이사장에서 사퇴할 이유도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최근 한나라당 내에서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유산을 털고 가는 게 낫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박 대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에서 사퇴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간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국정감사 등에서 “사실상 부산일보와 MBC가 낸 돈으로 40년간 정수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인원은 4만명에 달하며 4인가족 기준으로는 16만명이나 된다”며 “97년 대선때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간 표차이가 19만표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제1야당의 대표가 ‘장물장학회’의 이사장으로 있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공격해왔다.
과거사 후폭풍 ‘시계(視界)재로’
정치판 예측불허…엄청난 정치적 파장 가능성
국가정보원 진실위원회가 정수장학회를 비롯한 7건의 과거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함에 따라 본격적인 '과거사 정국'이 시작됐다. 특히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직접 관련된 정수장학회를 포함,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사건이 주요 조사 대상이 됨으로써 정치적 공방이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이번 임시국회에서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 처리 여부로 여야간 전운이 감돌고 있다.
◆정치적 대충돌=7개 조사 대상 중 정수장학회, 동백림, 김대중 납치, 인혁당․민혁당, 김형욱 실종 사건 등 5건이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 발생한 사건이다. 한나라당은 정치적 의도가 짙다고 비판했다. 여권의 과거사 청산 작업이 박 전 대통령 딸인 박근혜 대표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주장이다.
박 대표는 "국정원 조사위원들이 과연 이런 문제를 공평하게 판단할 위치에 있느냐"며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과거사를 조사하는 것 자체도 곧 과거사가 된다. 정권이 이렇게 한 데 대해 국민이 판단할 것"이라고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당연히 과거사법 처리를 놓고 임시국회에서 여야간 격돌이 예상된다. 과거사법은 지난해 말 여야 합의로 2월 중 처리키로 했다. 열린우리당은 지난달 중 처리를 선언했지만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는 "뒤로 미루자"는 입장을 밝혔다. 과거사 정국이 시작됨에 따라 여권의 과거사 규명 작업은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비례해 한나라당의 반발 강도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상생과 민생'을 내건 올해 첫 국회가 과거사 정국에 휘말려 좌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각종 과거사 규명 활동 시작=국정원의 과거사 조사는 신호탄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여야 합의로 통과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친일법)'에 따른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조만간 구성된다. 역시 지난해 초 통과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달 초부터 피해자 신고 접수를 받는 중이다.
여기에 과거사법이 통과돼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면 해방 이후 각종 의문사건과 의문사,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등이 전부 조사 대상이 된다. 경찰, 검찰, 국방부의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에도 정치적 폭발성이 강한 조사 대상이 적지 않아 올 1년 내내 과거사 정국이 이어질 수도 있다.
◆언제까지 조사하나=국정원 진실위원회의 활동 기간은 2년(2006년 11월)이다.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경우 1년 연장(2007년 11월)이 가능하다. 친일조사위원회는 4년6개월(2009년 예상) 동안 활동하고 과거사법이 통과될 경우 역시 4년(2009년 예상)에 2년(2011년 예상)을 더 연장할 수 있다. 국방부와 검찰, 경찰의 조사위원회도 국정원 사례를 따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2007년까지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와 2008년 18대 총선까지 정부기관과 국가기구에 의한 과거사 규명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경우 선거를 앞둔 야당의 반발은 격렬해질 것으로 보이고, 과거사 조사 자체가 타격받을 가능성도 크다.
◆예상키 어려운 후폭풍=국가 차원의 과거사 규명이 본격화되고, '진실 규명'이 이뤄짐에 따른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기 어렵다. 정수장학회만 해도 경향신문, MBC와 부산일보 등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걸려 있다. 또한 각종 과거사건들이 규명되고, 새로운 사실들이 확인되면 희생자로 밝혀진 사람들과 유족들에 의한 '줄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바로세우기 작업'에 따른 찬반 논쟁과 조사 과정에 불거질 각종 인권침해, 위헌 논란 등도 예측하기 어렵다. 이럴 경우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