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대기업 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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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대기업 노조
  • 글/ 정숙경
  • 승인 2005.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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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그들만의 잔치 '권력화한 귀족노조'
기아자동차 노조간부의 '취업장사' 사건이 불거지면서 대기업 노조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가 깊어가고 있다. 몇몇 부도덕한 인사들 때문에 벌어진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대기업 노조의 구조적 문제점에 기인한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대기업 노조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새로운 노동운동의 방향을 모색해봤다.


민노총 홈페이지에 '비판' 쇄도

'쟁점'이란 ID를 사용한 한 네티즌이 지난1월 24일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은 우리나라 노동조합 운동이 얼마나 '그들만의 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예시하고 있다. 자신도 민주노총 조합원이라고 밝힌 그는 "민주노총은 구조상 중소영세기업, 비정규, 여성노동자와의 연대에 적극적일 수 없는 대규모 정규직 기업별노조 중심"이라며 대기업 노조들의 이기주의를 사례별로 고발했다.
그는 ▲한국통신 정규직 노조에 의한 계약직들의 투쟁 방해 ▲하청노동자가 1만명이 넘지만 단 한명도 조합에 가입시키지 않는 현대자동차 노조 ▲청소용역 노동자에게 최저임금(56만원)도 주지않고 방치하는 서울 지하철 노조 등의 사례를 제시한 뒤 "(이들이) 민주노총 최고의사결정구조인 대의원대회의 대의원구성비의 81%나 차지한다"고 개탄했다.
그는 또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 노조는 임금인상투쟁(단협, 구조조정 반대)에만 역량을 집중할 뿐" 이라며 "조직되기도 어려운 비정규, 하청, 파견, 중소영세사업장, 여성노동자(1,100만)는 죽든살든 연대투쟁, 계급투쟁에는 관심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과 중소영세기업 및 비정규직간 임금격차가 50%이상 발생하고 있다"며 "자본측은 대규모 정규직 노조원 200만명은 회유대상으로 삼으며, 비정규직, 중소영세업종 노동자는 탄압의 대상으로 삼는 작전을 펴고 있다"고 덧붙였다.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는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적당히 넘어가고 싶고, 최저임금제도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며, 중소영세업종 노동자의 대규모 사업장노동자와의 차이를 애써 외면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노조 조끼입기가 부끄럽다"
기아자동차 노조 홈페이지에 올라온 한 노동자(ID '기아차 제안')의 글은 '전태일 평전'의 구절을 인용,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고백한 뒤 진지한 자성을 촉구했다. 기아차와는 관계없는 노조간부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 네티즌은 "요즘처럼 민주노총 잠바나 조끼를 입고 다니기가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며 "정파나 권력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들을 죽임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노조간부의 '취업장사' 사건이 불거진 이후 노동계에서는 기존 노동운동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당사자인 기아차 노조는 물론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의 사과성명과 자정결의가 이어지는가 하면 노동관련 단체 홈페이지엔 노조원들의 절절한 자성의 글들이 채워지고 있다.
민주노총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건강하고 투명한 노조로 거듭나기 위해 철저한 자정노력을 펼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앞서 박홍귀 기아차노조 위원장은 대국민 사과문에서 "지극한 도덕적 양심을 바탕으로 사회개혁을 주도해야 할 노조위원장과 지부장의 관리소홀로 이런 불미스런 일이 발생한데 대해 전후 사정을 불문하고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사과했다.
특히 기아차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올라온 노조원들의 글에는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들이 여러명 등장하고 이들의 글이 인용되는 등 노조의 '취업장사'로 인해 받은 심리적 충격이 깊었음을 보여주었다. '레인맨' 이란 ID를 사용한 네티즌은 기아차 노조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해 가는데/ 세상과 자기를 머릿속에 고정시켜/ 미래가 없습니다"라는 내용을 담은 박노해의 시 '준비 없는 희망'을 소개한 뒤 "이제부터는 깨끗하고 정직한 기아차 노조 발전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하부실천 방안에 대한 거침없는 질책과 민주노총 기아자동차 노조의 발전방향에 대한 좋은 생각들을 쏟아내자"고 제안했다.
그는 또 "만시지탄감이 있지만 '호시우보(虎視牛步)', 호랑이와 같은 기개와 소처럼 느긋느긋하게 차근차근 이제부터라도 깨끗하고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하부실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조원들에 대한 시민들의 아픈 조언도 눈에 띄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아내라는 네티즌 '진정녀'는 역시 기아차 홈페이지에서 "그대들은 이것만은 약속해 다오. 한 때 그대들이 존중해 마지않던 민중에게 칼날을 들이대는 일은 하지 말아다오"라는 체게바라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동운동의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그는 민주노총 기아차 광주지부 임원들을 겨냥, "돈에 매몰되어 동지를 팔고, 지금도 헌신적으로 일하는 노도운동가들을 세상에 욕먹이고 그리고 비도덕적 굴레를 씌우고 있지 않은가"라고 꾸짖은 뒤 "여러분이 누리는 그 권리는 여러분 개인의 부와 명예가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학생, 시민, 노동자, 비정규직,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누나, 아버지 가족등의 피눈물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일깨웠다.





전태일 열사와 박노해 시인, 체게바라, 괴테. 노동운동가들은 어려울 때 누구를 생각할까. 기아차 노조간부의 '취업장사' 사건이 불거진 이후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자성이 깊어지면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동운동의 큰 획을 그은 역사속 위인들을 많이 찾고 있다.
기아차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올라온 노조원들의 글에는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홈페이지의 네티즌 '기아차 제안'은 체게바라를 거론하며 "원래 시작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요"라며 "노조간부들 전체가 모여 반성하는 의미에서 모두 현직을 사퇴하고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기자회견을 하라"고 주장했다.
'레인맨' 이란 ID를 사용한 네티즌은 기아차 노조 홈페이지에서 박노해의 시 '준비 없는 희망'을 소개했다. 그는 "준비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처절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 닦아/ 저 거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넘을/ 진정한 자기 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라는 박 시인의 글을 소개한뒤 새로운 노조 건설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자고 촉구했다.
레인맨은 또 기아차 노조 홈페이지에 괴테를 등장시켜 '노동권력의 부패'를 경계했다. 그는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한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좋은 철학과 정치 사상을 토대로 한 정치집단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 때문에 기아차 사태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라고 분석했다.

◆"원칙-시스템 바로서야 부패근절"
"기아차 광주공장 채용비리 사건은 단위기업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전근대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건전하고 투명한 노동조합의 거듭남을 위해서는 몇몇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부도덕과 부패를 비난하는데 몰두하는 것보다 새로운 시스템 정립을 위한 노력을 해야합니다"(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박사)
기아차 사건을 통해 대기업 노조의 검은 이면이 드러나면서 노동조합운동의 새 틀을 짜야 한다는 노동 전문가들의 주문과 처방이 이어지고 있다. 노조 회계의 투명성 확보, 내부의 자정운동, 부적절한 노사유착의 근절 등 다양한 방법론이 개진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의견은 대체로 '시스템을 바꿔라', '원칙을 정착시켜라', '대화로 풀어라' 등으로 정리된다.
▲시스템을 바꿔라=기아차 노조의 '취업장사'는 분명히 대기업 노조의 도덕적 해이를 드러낸 사건이지만 '시스템의 누수'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무게를 얻고 있다. 배규식 박사는 "기아차 문제를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부도덕성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근본적인 원인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며 "현재의 단위기업 노조 형태로는 사회의 공익보다는 임금인상 등 개인적인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조직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배 박사는 "우리나라 노조가 비정규직 보호나 제조업 공동화 등 사회적 책무를 고민하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산별노조 형태로 조직을 확대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산별형태로 조직이 확대되면 국가적 차원으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고, 조직의 규모에 따른 자체 감사등을 통해 대외적 투명성도 확보된다는 것이다.
▲원칙을 정착시켜라=검찰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이번 사건은 기업의 낡은 노무관리 관행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노조는 파업권 등 힘을 바탕으로 사측에 압력을 행사하고, 사측은 적당히 눈감고 타협하는 관행 때문에 기아차 사태가 불거졌다는 것이다.
단국대 김태기 교수는 "우리나라 노조는 파업권과 노사협의권 등을 무기로 사측의 힘을 빼는 '내부 보호막'과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를 배후로 한 '외부 보호막' 등 두가지 형태의 보호막을 두르고 있다"며 "이런 보호막속에 둘러싸인 노조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이제까지는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배 박사는 "사용자들이 노조에 당당할 필요가 있다"며 "임금인상이나 채용 등에서 노조와 적당히 타협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보다 분명한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노사간 신뢰를 쌓는 길"이라고 말했다.
▲대화로 풀어라=법과 원칙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는 노․사․정간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김 교수는 "일자리 나누기나 비정규직 문제 등 법으로 풀기 어려운 이슈들을 논의하기 위해 노사정위원회가 설치돼 있지만 제대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며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성숙된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노사정위 차원에서도 해결되지 않으면 국회가 나서 당사자와 전문가를 불러 청문회를 여는 등 단계적인 절차를 밟아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배 박사는 "요즘은 노사정간 대화에서 노동계가 과거처럼 들러리 역할을 하는게 아닌 만큼 적극적으로 동참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며 "민주노총이 계속 노사정 대화의 장에 나서는 것을 거부한다면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계 환골탈태 없이 한국경제 미래 없다
노동계에 고질적인 악령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기아차 노조의 채용비리 사건에 이어 민주노총 조직내 극렬 폭력양상이 발생하며 한국 노동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두 사건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국 노동계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구조적인 '후진성'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 재계는 그간 노동계의 혁신적인 변화 없이 재도약은 불가능하다며 목청을 높여 왔다. 과감한 투자 확대, 실적 및 해외신인도 향상의 최대 걸림돌로 강경 노조를 지목해 왔고 이제 이 같은 주장은 재계를 넘어 국민 속에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노동계의 환골탈태 없이 한국 경제 미래 없다'는 주장은 이제 거부할 수도 더 이상 늦출 수도 없는 핵심과제로 떠올랐다.

◆견제받지 않는 성역 ‘한국 노조’
국내 노조는 유일하게 견제받고 있지 않은 성역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노무담당 임원은 "국내 노동계는 한국 사회에서 마지막 남은 성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정부, 기업,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은 채 그동안 자신들의 이익 향상에만 매달려 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노조의 이기주의 만연은 당연한데, 한국 노조는 이기주의를 통해 성장해 왔고 그 속에 매몰돼 있다"며 "이제 한국 노조는 과거의 정당성도 갖고 있지 못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지도 못하는 시대착오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대기업 노조위원장을 지낸 A씨(현재 자영업 영위)는 노동계를 평가해 달라는 요구에 특유의 '천적론'을 개진했다. 그는 "천적이 없는 동물은 호주의 코알라에서 보이듯 나태함에 빠지기 쉽다. 한국 노조도 마찬가지다. 타성에 젖어 자기혁신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다. 시대는 변했고, 다른 투쟁을 요구하는데 기존 투쟁방식에 안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자신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침해받으면 순간적인 저돌성을 보이며 즉흥적인 대응에 나서는 한계를 벗어던지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권력화와 비리, 동전의 양면
전문가들은 권력화와 기득권 형성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비리가 자행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한 노무 담당 임원은 "대기업 노조는 크게 대내 대외 권력을 갖게 된다. 대규모 노조원을 통해 파업 등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대외 권력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생산과 관련한 각종 권한으로, 이는 대내 권력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현대차 노조 등 상당수 대기업 노조는 생산 경영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생산량 조정, 생산라인 가동, 작업 배치 및 전환 등과 관련해 사측과 협상해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런 가운데 높은 근무외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라인으로 옮겨가려는 민원 등이 줄기차게 제기되고 있고, 때로 극명한 노노 갈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노조의 협상력과 경영참여 범위가 넓어지면서 권력화 현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고, 이를 통해 은밀한 이권 등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는 선거를 통해 지난 1년간 공과를 평가 검증받는다. 하지만 노조 선거에서 파벌간 갈등 이면에는 교묘한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 적당한 선에서 각종 이권을 파벌간 배분하는 '황금률 찾기'가 상식화돼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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