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不通)의 꼭짓점, “모든 게 국민의 오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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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不通)의 꼭짓점, “모든 게 국민의 오해입니다”
  • 정대근 기자
  • 승인 2010.08.1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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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만족하는 소통방안 마련으로 뾰족한 오해의 탑에서 내려와야

이명박 정부를 둘러싼 격랑이 지속되고 있다. 어느새 출범 3년차에 접어들었고 오는 8월25일로 임기반환점을 맞이하지만, 안정의 기미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더구나 혼돈과 갈등을 동반한 그 위협의 실체가 내부에서 유발되고 있다는 점은 더욱 큰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 의한 불법사찰을 선두로 각종 구시대적 사건·사고들이 잇따라 터져 나오는 중이고, 계파갈등과 권력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여권의 분열양상도 심상치가 않다. 한편에서는 한 공영방송사 내부에 반정부 유명인사들의 출연금지를 엄포하는 검은 문건이 존재한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돈다. 물론 일련의 불행한 사태들이 이 대통령의 구체적인 의도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발생했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하지만 ‘탈이념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현 정부가 지극히 이념적이며 비효율적인 의혹들에 자꾸 휩싸인다는 점은 그가 가진 정치적 의미와 한계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국민은 얼마나 관대했던가?

2007년 12월19일 밤, 대권의 향방은 일찌감치 결정됐다.

 

일부에서 기대했던 반전의 조짐은 감지되지 않았고,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한 스릴도 없었다. 어찌 보면 어느 때보다도 싱겁고 밋밋한 대통령선거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입주한 여의도 한양빌딩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은 실로 대단했다. 당사 앞길에는 밤이 늦도록 지지자들과 축하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들이 자아내는 열기로 밤새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튿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선거결과를 통해 압도적인 승리를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 최종 득표율은 과반에 가까운 48.7%였고, 2위인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의 표차는 자그마치 531만여 표에 달했다.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최다 표차였다.

이명박 당선인은 “낮고 겸손한 자세로 국민을 섬길 것이고, 위기에 빠진 우리 경제를 반드시 살려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편,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은 “좌파에 의해 잃어버렸던 10년을 되찾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된 이유에 대한 분석은 아직도 분분하다. 그를 지지했던 진영은 “10년에 걸쳐 집권했던 무능한 좌파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 했고, 한편에서는 “前 정권의 실정과 대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당시 여권의 미숙함이 빚어낸 이변일 뿐이다”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수많은 이유 속에 ‘국민의 관대함’ 또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부터 그와 친인척의 재산형성과정에 관한 좋지 못한 소문과 의혹들이 난무했다.

도곡동 땅 실소유주 논란, 위장전입, 직계가족의 위장취업을 통한 탈세, 소유한 빌딩에 입주한 업소의 불법 성매매영업 논란 등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중 일부가 사실로 확인된 가운데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던 ‘BBK 주가 조작사건'에 그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은 논란의 정점을 이뤘다.

이를 유력 대선주자에 몰린 ‘막무가내 식 흠집 내기’로 보기에는 의혹의 양이 너무 많았고, 해명은 빈약하거나 궁색하기만 했다. 특히 BBK 주가조작 연루의혹의 경우 관련 증언자가 나타나고 각종 문서와 영상자료들이 속속 공개됐지만 “모두 조작된 것이다”며 이들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았거나, 침묵으로 응수했다. 야당은 물론 그가 소속된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의혹에 대한 문제제기와 공방이 치열하게 달아올랐다.

상황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관대했다.

그의 당선이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고, 이후 얼마간 지속됐던 높은 국정운영 지지율이 대변하며, 취임한 지 한 달여 만에 치러졌던 18대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첫 번째 오해는 여기에서 출발하게 된다. 당선 직후 의혹과 관련된 거의 모든 수사가 흐지부지 되고, 여론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것은 유독 승자에게 유리한 세상의 법칙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가 내세웠던 ‘탈이념 실용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였고, 경제위기 극복과 성장 재개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이 이를 가능케 했다. 하지만 총선 직후 정부와 여당이 보여줬던 지나친 자신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그들을 과반수 거대 여당으로 밀어준 국민들의 의도를 제대로 해석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해 발생의 메커니즘

오해란 서로가 소통하는 가운데 본의가 곧게 전달되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 내용보다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그럴 경우 대개 어느 한 쪽에서 전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는 드물어서 팽팽한 대립양상이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취임 이후 정부와 여론 간에 빈번히 발생한 오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해 4월13일 공개된 중앙일보와 서울방송의 공동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대통령이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 대해 66%의 응답자가 반대를 표명했다. 대선 직후 실시됐던 동일 문항의 여론조사에 비해 찬성의견은 43.1%에서 25.5%로 급격히 줄어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 대한 국민들의 오해”를 운운하며 강행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또한 “21세기에 걸 맞는 전략적 동맹”을 표방한 가운데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한미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발생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에서도 그랬다. 촛불을 든 채 연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한미동맹 복원의 대가로 지불된 불합리한 조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 대통령은 이 역시 “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과 우리가 놓인 외교상황에 대해 잘못 판단한 데에 따른 오해”라고 규정했다. 오히려 임기를 겨우 한 달 남짓 남기고 있던 17대 국회를 향해 한미FTA의 조속한 비준을 주문하기도 했다.

 

결국 이 일이 정부와 국민 사이에 깊은 오해의 골을 팠다.

과반의석을 장악했던 총선 대승의 여운이 가시기 전이었고, 집권한 지 채 100일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침 문화방송(MBC)의 PD수첩이 방송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실태’가 논란을 더욱 구체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5월2일, 서울 청계천 소라광장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벌였다. 이는 사실상 그 해 초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그 이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그런데 당시 일부에서는 “정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상황”이라는 전망까지 내놨음에도, 정부는 경찰버스를 동원해 광장을 봉쇄했고, 이른바 ‘명박산성’으로 불렸던 거대 컨테이너박스를 쌓아 청와대로 향하는 모든 길을 차단했다.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로 곤두박질쳤고,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비롯한 그의 역점사업에도 잇따라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결국 청와대 앞에 쌓인 컨테이너박스 벽은 정부가 우려했던 ‘폭력 시위대’만 차단했던 것이 아니라, 초기 정부의 숨통과도 같은 국민과의 소통통로까지 막았던 셈이 됐다.

‘사상 최대 표차’와 ‘총선 압승’의 함정

청와대와 여당으로서는 그 갑작스럽고 급격한 민심이반현상을 겪으며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파동’이라는 단일 사안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여기기엔 그 시기와 지지율 하락폭이 심상치 않았다. 대선 사상 최대 표차로 당선된 뒤 채 100일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지지율은 어느새 반 토막이 났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에게 힘을 실어줬던 48.7%의 관대한 지지자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이에 지난 대선결과를 면밀히 분석한 전문가들은 “531만 표로 상징되는 대선 사상 최대의 표차에 그 함정이 숨어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를 압도적인 승리자로 만들었던 수치가 도리어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다.

 

먼저 이 대통령이 얻은 득표율의 실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2007년 12월19일 실시됐던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총 23,732,854표 중 11,492,389표를 얻어 48.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위로 낙선한 정동영 후보가 얻은 6,174,681표(26.1%)에 비해 5,317,708표를 앞섰다. 단순 수치상으로는 역대 대선사상 최대의 표차 당선이 확실하다.

하지만 당시 선거의 총유권자가 37,653,518명이라는 점과 당시 투표율이 역대 최저(63%)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총유권자 대비 득표율은 30.5%로 하락하고, 이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실시 이후 최저의 득표율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를 지지했던 유권자는 총유권자의 1/3수준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다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2/3 모두를 반대세력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겠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파동 직후 나타난 지지율 변동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적어도 이 대통령의 지지자가 아니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 낼 수 있다.

현 정부 출범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파동 사이에 실시됐던 18대 총선결과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듬해 4월9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던 이 선거는 역대 최악의 투표율(46.1%)을 기록했다.

   
 

 

이 같은 투표율은 2004년 17대 때(60.6%)보다 14.6%나 급락한 수치였고, 이전 최저 기록인 2000년 16대 총선의 투표율 57.2%보다도 11.2% 낮다. 당시 중앙선관위가 “역대 총선뿐 아니라 정부 수립 이래 치러진 모든 전국 규모 선거(대선·총선·지방선거) 투표율 중 가장 낮은 수치”라고 밝혔을 정도였다.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과반에서 3석이 많은 153석을 차지했고, 이를 압승으로 평가하여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또한 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10년의 좌파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며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무한한 지지”로 보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많았다. 한나라당의 압승은커녕 심각한 표심 유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얘기다.

“심판의 대상”으로 단정 지었던 통합민주당이 81석을 차지했고, “의심할 바 없는 좌파정당인 민주노동당”은 강기갑 의원이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었던 이방호 의원을 꺾는 대이변을 만들어내며 총 5석을 지켜냈다.

 

   
 

한편 한나라당 공천과정에서 발생한 친이계(친이명박계)와 친박계(친박근혜계) 사이의 갈등은 ‘친박연대’라는 전대미문의 급조정당을 만들었는데, 이들 역시 비례대표 8석을 포함한 14석의 성과를 냈다. 보수계열의 자유선진당도 17석을 이뤘으며, 보수성향의 무소속 당선자도 16명이나 됐다. 결과적으로 보수진영 200석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렇듯 보수의 승리는 분명해 보였지만, 이를 두고 한나라당의 압승을 운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모든 상임위원회에서 과반을 차지할 수 있는 안정과반의석(17대 상임위 수 기준 158석)을 달성하지 못한 데다, ‘한반도 대운하’에 반대하는 당내 친박계에도 상당 의석을 내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브레인들이 선거결과의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당정은 각각 다른 이유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갓 출범한 정부로서는 모든 사안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애썼을 것이고, 이런 점에서 역대 최저 투표율이 만들어낸 역대 최다 표차의 실체에 대해 굳이 매달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편 여당은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불거진 계파갈등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에 허비(?)할 시간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당정 모두 표면적인 수치에 고무된 채 각종 수치에 내포된 여러 시사점을 간과해 버렸다. 그리고 청와대가 “과도한 의욕과 자신감”으로 국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가운데 2/3에 달했던 부동층을 지지층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한나라당이 계파갈등에 휩싸여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는 동안 확고했던 1/3의 지지층마저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참여정부 심판론”을 내세워 집권했던 현 정부가 지난 6.2지방선거에서 도리어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이유는 자명해진다. 현 정부와 여당의 고질적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소통의 부재’는 정책과 여론의 거대한 정면충돌이 아니라, 민심을 세세하게 읽어내지 못한 당정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탈이념 실용주의 노선’의 맹점

이명박 대통령은 가난한 목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 경제사의 한 획을 보탠 CEO로 성장했다. 또한 ‘정치 1번지’라 불리는 서울종로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서울시장 재임시절에는 대중교통 시스템 개혁과 청계천을 복원을 통해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렇듯 빈민층과 상류층, 재계와 정계를 넘나들며 그의 ‘탈이념 실용주의 노선’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활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소년”을 대통령으로 만든 최대 공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거침없이 내달리던 그의 신화는 대통령 취임 이후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현 정부의 최대 정책카드였던 ‘한반도 대운하’는 ‘4대강 정비’로 이름을 바꾼 뒤 힘이 많이 빠져 버린 상태이고, 정운찬 총리를 내세워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폐기수순을 밟아야 했다. 굴지의 기업과 수도 서울을 멋지게 이끈 바 있는 그의 리더십이 총체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이 내세우는 ‘탈이념 실용주의 노선’이 저간에 일어났던 불통사태의 근원일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실용주의’는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의 사상에서 비롯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존 듀이(John Dewey) 등의 철학가를 통해 다듬어진 이론이다.

내용적으로는 모든 관념이나 이론, 이념 등은 현실에서 유용한 결과로 나타날 때 진리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는 관념에 머물지 않고 실천을 통한 유용한 결과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력을 지닌다.

하지만 이 같은 실용주의가 한 국가의 국정이념으로 안착하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따른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실용의 가치는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으로 전제되고, 여타의 상충요소나 부정적 가치가 없을 때 비로소 의미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설득과 조율을 반복해야 하는 정치의 특성은 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렇다면 작은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서울특별시의 수장을 훌륭하게 수행한 바 있는 그의 리더십이 왜 지금에 와서야 이러한 가치 충돌을 일으키는 걸까?

그것은 광역단체장의 역할이 행정가에 가까운 반면, 대통령직의 경우 정치가로서의 특성과 역할이 더욱 강조되는 측면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외교 등 대통령이 수행하는 직무의 범위가 넓은 까닭에 이를 힘 있게 추진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정치적 요소들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정치력이 발휘되지 않으면, 정책추진은 물론 소통 자체에 제동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경제발전을 통한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거의 유일한 시대적 아젠다였던 60~70년대에는 이러한 실용노선 자체가 하나의 정치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다양성의 시대다. 많은 입장과 목소리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폭발적인 다양성을 핵심으로 하는 1인 미디어가 메이저급 종이신문의 권위를 위협하고 있을 만큼 그 영향력 또한 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이러한 시대적 환경을 면밀히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소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홀함은 무능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효율적인 경제성장과 신속한 위기극복에 대한 의욕”이 넘쳤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과도한 의욕이 오히려 한참의 부족함을 불러온 형국이라 할 수 있겠다.

‘국민과의 화해’에 대한 권고

올해 초, 집권 3년차로 접어든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평가가 쏟아졌다. 정치·사회·복지 분야에 대한 부분은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경제 분야에 있어서는 호평이 잇따랐다. 2008년 10월에 발생한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세계경제 위기상황을 발 빠르게 돌파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 일본, EU 등 선진국들이 장기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대규모 추경과 미·중·일 통화스와프 추진 등을 통해 금융시장 안정화를 신속히 이뤄냈다는 것이다.

또한 2008년 4분기 때 전년 동기 대비 -3.4%에 불과했던 경제성장률이 2009년 4분기에 무려 6.0%로 치솟았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로 기록된 수치다. 2008년 말 2,012억 2,000만 달러였던 외환보유액 역시 2009년 말 2,699억 9,000만 달러로 대폭 증가해 세계 6위의 외환보유국으로 등극했다.

이 대통령이 ‘세일즈 외교’를 통해 이룬 외교성과도 주목할 만하다. 2008년에만 13차례에 걸쳐 20개국을 순방했고, 이 결과 G20정상회의 유치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를 이뤄냈다. 특히 400억 달러 규모의 UAE 원전수주는 우리나라의 첫 원전 수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고, 새로운 미래성장동력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이렇듯 경제회복의 청신호를 의미하는 각종 평가와 수치들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이 오히려 증가하는 등 체감경제의 침체는 더욱 악화 중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고용시장의 불안정성이 가중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이 일시적이고 한시적이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이에 정부는 경기회복의 토대가 건실해질 때까지 확장적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 불확실성에 대비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어쨌든 이 대통령이 애초부터 자신감을 표했던 경제정책만큼은 큰 흔들림 없이 순항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그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약속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편 젊은층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인터넷 공간은 정부에 대한 반감과 비판들로 가득하다.

이는 정부와 국민이 빚어온 불통의 결과가 적극적 의사표출의 공간인 인터넷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장기간 지속된 소통의 부재가 이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치명적인 이미지 손상을 불러일으켰고, “무엇을 해도, 그가 하면 다 밉다”는 식의 불합리한 비난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젊은층이 여론을 형성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대통령과 정부를 감싸는 게시물을 올리는 것이 “지각없고, 교양이 부족한 행위”로 간주되거나 “여당이 운영하는 여론조작팀의 아르바이트생이 올린 영리행위”로 매도되고 있는 지경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외양적 이미지만으로 정책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감정적인 비난이 우리 정치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난이 생산적인 비판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과(功過)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필요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의 성과를 걸러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우호적 여론형성의 열쇠 역시 이 대통령과 정부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년 전, 범국민적 저항으로 확산될 뻔한 ‘촛불사태’에 대해 현 정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돌아보면 이 대통령이 쥐고 있는 열쇠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촛불집회에 참가했다가 불법행위를 저지른 이들은 대부분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져야했다. 심지어 인터넷 카페 회원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유모차 부대’ 역시 끝까지 추적해 처벌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과 원칙에 의한 질서 확립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상식이지만, 비폭력 저항운동에 가한 강력대응은 감정적인 서운함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 역시 이 대통령의 구체적인 의사와 지시가 반영된 것이라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들이 현 정부를 “옹졸하고 속 좁은 소인배” 이미지로 고착화시킨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현 정부가 생산적이고 객관적인 비판 여론에 힘입어 국정운영의 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민과의 화해가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결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상에 가까운 무책임한 대안로 받아들여서도 곤란하다. 국민과의 화해가 쌍방향의 소통으로 완성된다고 볼 때, 이를 위해서는 단지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중단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시대흐름’을 위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7월초, 국정기획수석을 폐지하고 시민사회 담당 사회통합수석과 서민정책 담당 사회복지수석 신설을 골자로 하는 청와대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소통과 세대교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국정쇄신의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같은 달 17일에는 임태희 대통령 실장을 비롯한 신임 수석비서진의 임명장 수여식을 진행했다.

이번 개편은 여당의 참패로 끝난 6.2지방선거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했기에 이명박 대통령의 절박함이 배어 있다. 이 대통령의 튼실한 동반자였던 이동관 홍보수석, 박재완 국정기획수석, 박형준 정무수석까지 내보냈던 것이다. 더욱이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파동 당시 안팎의 거센 요구에도 단행하지 않았던 조직 개편이라는 점에서 더욱 결연한 느낌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불통 해소에 대한 적극적인 시도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개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후반기 최대 이슈로 부각될 ‘4대강 정비사업’ 등 주요 정책과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이러한 새 진용이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소통을 위해 단행한 개편이 또 다른 불통을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국정쇄신의 열쇠를 나눠 쥐고 있는 한나라당의 행보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 정부가 국민과 단절된 가운데 고군분투해 온 데에는 계파갈등과 당정갈등으로 시간을 허비했던 한나라당의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상수 신임 대표체제를 바라보는 눈길에 기대와 우려가 상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안상수 대표가 친이계의 핵심리더라는 점이 안도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청와대와 여당 사이에서 표면적인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지만, 오히려 갈등을 완화시키는 차원을 넘어 당정 간의 밀실교착을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소통의 재개가 시급하지만, 결국 ‘투명한 소통’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시원하게 흐르는 물길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흐르는 물이 탁하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대는 강물처럼 거대하고 또한 거세게 흐르는 법이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뜻밖의 홍수는 그 흐름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게을리 할 때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를 외면하거나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손바닥으로 길어 올린 한 줌의 물일지언정 끊임없이 시대의 수위와 탁도를 확인해 봐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이에 국민과의 소통 재개를 최우선 목표로 선정한 이명박 정부의 후반기 과제는 뚜렷해진다. 대국민담화나 라디오 국정연설과 같은 일방적 소통을 강화할 게 아니라, 보다 크고 넓은 시각으로 시대와 여론을 길어올릴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쌍방이 만족하는 소통통로를 준비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며, 또한 이 시작은 오해가 쌓아올린 뾰족하고 비좁은 불통의 꼭짓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내려오게 할 또 다른 통로가 되어 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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