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여야 합의로 개정된 정치관계법 가운데 정치자금법은 역대 법 중 가장 엄격하게 돈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다.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후원회 개최도 금했다. 혼탁한 정치자금 모금과 집행 실태가 드러나면서 국민의 비난이 퍼부어지자 정치권이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책이다. 법 개정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정치권은 '현실을 도외시한 규정'이라며 아우성이다. 사석에서 일부 의원들은 세비(의원들의 봉급)를 집에 제대로 갖다주지 못할 경우도 있다며 생계형 부패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은 이 법을 개정하겠다는 방침이다. 여론이나 시민단체의 의견은 냉담하다.
국민의 돈 더 거두게 해 달라?
◆자기희생 없이 국민의 돈 더 거두게 해 달라(?)
정치관계법 개정의 최대 쟁점은 정치자금법이다. 현행법에는 의원이 모집할 수 있는 후원금 한도를 1억5,000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 전엔 3억원이었다. 특히 '후원의 밤'같은 정치인의 집회성 후원모금 행사를 금지한 건 대면접촉을 중시하는 우리 정치풍토상 의원들에겐 큰 타격이었다.
선거법에서도 선거기간 중 자원봉사자에게 교통비나 식사 제공을 전면 금지해 법과 관행의 충돌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당법에선 '돈 먹는 하마'로 불리는 지구당을 폐지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선 다른 이름의 지역 사무실이 대부분 가동되고 있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치자금법은 돈이 오가는 길을 투명하게 하면서 한도를 늘리자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개정 초안처럼 지방자치단체장 등의 후보자들에게까지 후원금 모금을 허용하는 방안은 "예전에 없던 내용으로 너무 나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은 편이다. 선거법도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힘을 받고 있다. 선관위 개정안도 홍보 어깨띠를 후보만 착용할 수 있게 한 것을 선거 관계자들에게로 확대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의원들 일부는 정치관계법 규제 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어렵게 마련한 정치관계법으로 17대 총선을 깨끗하게 치렀다"며 "시행 1년도 안 돼 정치인들이 자기들 편의에 따라 원래대로 돌아가는 법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반발했다. 민주노동당은 정치자금법 완화 움직임에 당론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노회찬 의원은 "의원들이 고급 승용차 포기 등 자기희생을 하지 않으면서 국민의 돈을 더 거두게 해달라고 하는 법은 설득력이 없다"고 했다.
◆일부의원 “입법활동마저 소홀해져”
16대 국회에서 2,000cc 가솔린 엔진 승용차를 차고 다니던 정장선(열린우리당)의원은 17대 들어 디젤 차량으로 바꿨다. 그는 "1년에 600만원 정도 비용이 절감돼 만족"이라고 말했다.
나경원(한나라당)의원은 장애우와 관련한 입법활동을 활발히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변호사 출신인 나 의원은 "입법활동에 세비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며 "매달 개인 돈을 수백만원씩 썼다"고 말했다. 입법 준비 중인 프로젝트를 교수에게 의뢰하고 싶지만 돈이 너무 들어 자원봉사자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B의원(열린우리당, 서울)은 "초선 중엔 벌써 위축된 의원이 많다"며 "많은 사람을 만나야 다양한 정보를 얻고 폭넓은 의정활동을 펴는데 돈이 들어 포기하면서 자신감을 잃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후원금 규모를 "2,000만원이 조금 넘는다"고 밝힌 다른 의원도 "국회의원이 된 뒤 한 달에 몇번씩 카드 연체금을 갚으라는 독촉전화를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공성진(한나라당)의원은 "상임위 활동과 관련된 토론회나 공청회를 하고 싶어도 돈 때문에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C의원은 "활동 내역을 알리기 위해 목돈을 들여 홈페이지를 만들어 놓고 후원금 통장 번호를 올려놨는데 수개월 동안 10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전여옥(한나라당)의원은 "지난해 총선 직전 당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개인 통장 몇 개를 깨 1억원 정도 썼다"고 말했다.
'정치인 모금 집회' 1년만에 부활 추진
◆지역구 의원은 이중고 '돈이 가장 큰 스트레스'
개정된 정당법은 지구당은 없앴다. 하지만 많은 의원은 연락사무소 형태의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수도권 D의원은 유급직원 3명을 두고 있다. 지역관리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들의 인건비에 대해 "세비가 조금 넘는 규모"라고 했다.
지방의 E의원은 "전화 업무를 처리하는 인턴 직원 1명만을 두고 있는데도 1년에 사무실 운영비가 5,000만원이 넘게 든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지역사무실을 폐쇄하고 국회에 등록한 보좌관 1명이 사무실 없이 지역구를 챙기는 사례도 있다.
전북 익산의 한병도(열린우리당)의원의 서울 거주지는 보증금 500만원, 월세 60만원인 8평 오피스텔이다. 한 의원이 당선 후 지금까지 받은 후원금은 2,000만원이 안 된다. 현재의 통장 잔고는 0원. 가정의 생계는 약사인 부인의 몫이다. 그는 "친구들 만나서 밥 한 끼 사는 것도 부담을 느낀다. 지금은 과거처럼 국감 때 돈 받지 않는다. 이젠 의원들에게 돈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예 의원회관에서 먹고 자거나 친구나 친척 집에서 기거하는 의원도 있다.이 때문에 김원기 국회의장이 2월 임시국회 개회사에서 "지방출신 의원들에게 국회 차원에서 숙소를 마련해 주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기업들의 후원금이 아예 없어져 중앙당도 고전하고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현행 후원금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중앙당은 폐쇄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10명의 의원들이 세비의 일부를 갹출해 당 운영에 보태고 있다.
반론도 있다. 강기정(열린우리당)의원은 지난해 1,400여명으로부터 1년 한도액인 1억5,000만원을 거뒀다. 10만원 이하의 소액 후원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한국기계연구원장을 역임한 공학박사 출신의 서상기(한나라당)의원도 1억5,000만원을 소액기부로 채웠다. 이처럼 소액기부 세액공제 제도를 활용하고 주변 연고를 동원해 '활로'를 찾는 경우도 있다.
◆여당, '정치인 모금 집회' 1년만에 부활 추진
열린우리당이 현행 정치자금법에 금지된 정치인의 정치자금 모금 집회를 허용하는 법을 추진하고 있다. 또 광역과 기초 자치단체의 의원, 단체장과 그 예비 후보자에게도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게 한다는 방침이다.
열린우리당 정치개혁특위(위원장 이강래)가 마련한 정치관계법 개정 초안에 따르면 '정치개혁 5대 목표와 12대 개혁방향'에 따라 규제를 대폭 푸는 쪽으로 정치자금법.선거법.정당법을 손질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7대 총선을 앞두고 엄격하게 개정된 현행 정치관계법이 개정 이전의 법안으로 상당 부분 회귀할 가능성이 커졌다. 여당이 정치관계법을 손질키로 한 것은 현행법이 너무 현실을 외면한 채 규제 일변도로만 돼 있어 일반 유권자의 정치참여를 어렵게 하고 신인들의 정치권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정치자금법과 관련, 정치자금 모금의 상한선은 현행대로 유지하되 모금 방법은 현실화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를 위해 정치인의 후원회 행사를 부활하는 방안과 함께 법인과 단체의 기부 행위도 가능토록 했다. 또 후원인의 기부한도도 현행 연간 2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특히 광역.기초 단체의 장과 의원 및 예비 후보자의 정치자금 모금은 지난해 정치관계법 개정 전에도 없었던 조항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선거법의 경우 '포지티브 방식'으로 돼 있는 현재의 선거법을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면 개편한다는 구상이다. 예를 들어 후보자만 찰 수 있는 어깨띠를 선거 관계자들도 착용할 수 있도록 하고 공개 장소에서의 연설과 대담도 자유롭게 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정당법에선 폐지된 지구당제 대신 시도 당 아래에 당원들의 집합체인 지역 조직을 마련키로 했다. 당 관계자는 "사무실이 있는 법적인 기능을 가진 지구당이 아니라 당원 간 상호 연락 등을 위한 자발적인 당원들의 모임 형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액 정치후원금 모금의 양면
지난해 3월 정치자금법 개정에 따라 17대 국회의원들의 후원금 모집방법이 확 달라졌다. 고급 승용차가 줄을 잇던 대규모 후원회 행사가 없어졌고, 기업들이 내던 법인 후원금도 '정경유착' 우려 때문에 금지됐다. 대신 10만원 세액공제를 무기로 한 소규모 정치후원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줄어든 정치자금에 쪼들리고 있고,일부에서는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도 나타났다.
◇"의외로 괜찮네"=열린우리당 강기정 의원은 지난해 1,400여명으로부터 1년 한도액인 1억5,000만원을 거뒀다. 세액공제가 가능한 10만원 이하 후원자가 94%에 달했다. 지인들이 발벗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세액공제 기부'를 권했고, 입소문이 퍼져서 1,400여명이 후원금을 냈다. 전재산을 4,600만원이라고 신고했고, 오피스텔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는 강 의원은 1년도 안돼 전 재산의 3배 가까운 돈을 정치 후원금으로 거뒀다. 주변에서는 '세액공제의 승리'라는 평도 나왔다. 한나라당 서상기 의원도 1억5,000만원을 소액기부로 채우고, 후원회 계좌를 폐쇄했다. 공학박사로 한국기계연구원장을 역임한 서 의원은 제자, 학생, 연구원, 기업체 등 학연을 총동원했다. 올해는 10만원이 아니라 1만5,000명으로부터 1만원씩 후원받는다는 '10,000원 의원'이 되겠다는 목표다. '인터넷 스타'인 우리당 유시민 의원도 소액 후원자들에 힘입어 일찌감치 마감했고, 이종걸 의원은 고교 동창들의 후원으로 한도액을 채웠다. 판사출신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도 학교 동문, 판사시절 동료,고향 지인들에게 부지런히 전화를 돌려 한도액 가까이 모금했다.
◇"너무 힘드네"=우리당 우상호 의원은 설 연휴가 끝난연후 "지금 의원 회관에서 빈통장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3,000만원을 거뒀다는 그는 "지난해는 빚을 내서 살았는데 올해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우 의원은 "주변에 선후배들이 많지만, 세액공제되니 돈달라는 얘기를 못했다"고 말했다. 노조나 회사, 전문직 등 '배경'이 있는 의원이 아니고서는 손벌리기가 쉽지 않다는 하소연이다.
같은 당 정청래 의원은 현재의 국회의원 후원금 제도를 '물속에서 코막고 오래버티기'라고 표현했다. 지난해 2,000만~3,000만원을 거뒀다는 정 의원은 "어제는 A은행에서 카드 연체됐다는 독촉전화를 받았다"며 "국회의원이 된 뒤 1주일에 한번씩 연체 독촉전화를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정 의원은 특히 "한달에 며칠만 투자하면 지인들에게 10만원씩 후원금을 거둘 수는 있을 것 같다"며 "그러나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 2만3,000원을 넣고 열흘을 버틴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5,000만원을 거둔 우리당 박기춘 의원은 "10만원까지는 세액공제해서 돌려준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 돈달라는 소리인데 쉽게 할 수 있느냐"고 했다.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은 아예 후원금을 모금하지 않고 세비로만 생활하는 '세비정치'를 실천하고 있는 경우다.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은 지난해 5,000여만원을 거뒀는데,9,000만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김 의원은 "지난해는 처음이라 부탁했는데 올해는 어떻게 부탁해야 할 지 걱정"이라며 "한도액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4,000여만원을 거둔 한나라당 진영 의원은 4,000만원 적자를 기록했다. 진 의원은 "그나마 지난해 말 대표비서실장을 했기 때문에 개인약속이 줄어들어 적자폭이 작았다"고 했다.
지난달 발족한 국회의장 자문기구인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가 후원회 제도 등 정치자금법 개정을 검토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다. 우상호 의원은 "법인 기부금을 300만원 정도까지는 허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우리당 김현미 의원은 "후원회 집회 정도는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4,000여만원을 거둔 한나라당 김정훈 의원은 "현 제도는 모금하기가 너무 힘든 비효율적인 제도"라며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이해하지만, 후원회 모금하느라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국회 상임위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