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행성에서 온 인간, 여기 달에 걸음을 남긴다
상태바
지구 행성에서 온 인간, 여기 달에 걸음을 남긴다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0.07.09 13: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美 아폴로 11호 달 착륙 성공, 태초 이래 인류의 역사에 신기원 장식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인 1969년 7월20일. 전세계 35억 명의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간은 처음으로 지구 아닌 다른 천체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로써 미국의 아폴로 11호의 닐 선장 닐 암스트롱,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달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에 발을 디딘 첫 번째 우주비행사들이 되었다.

[1969년 7월20일] 아폴로 11호 달 착륙
아폴로 11호 우주선은 이들을 태우고 7월16일(지역시각으로) 9시32분에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출발했다. 76시간 후 달 궤도에 진입한 직후 암스트롱과 알드린은 착륙선인 이글로 들어갔고 사령선인 콜롬비아에서 분리되었다.
암스트롱은 이글호를 달 표면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착륙선의 컴퓨터가 잘못 경보를 울렸고, 나사의 발표에 따르면 7월20일 오후 4시 17분42초(미국EST 기준)에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을 때 연료가 30초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암스트롱은 “휴스턴 이쪽은 고요의 기지, 이글호 착륙했다”라고 무선을 보내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10시56분 드디어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첫 발을 내 디뎠다.
당시 이 작은 한 걸음이 인류를 위한 거대한 도약이라고 암스트롱은 말했다.
알드린은 몇 분 후에 암스트롱과 합류해서 두 시간 반 동안 몇 가지 활동을 수행했다. 월석 샘플을 모으고 태양풍에 대한 테스트를 실시했다. 또 미국 성조기를 달 표면에 꽂았고 아폴로 1호 승무원들을 기리며 휘 장 하나 남겨 두었으며 아폴로11호 임무를 기념하는 작은 패도 남겨두었다.
두 우주비행사는 달 표면에 체류한 2시간 반 동안 과학관측장치 설치와 암석채집 등을 마치고 비행사 클린스가 홀로 기다리던 사령선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착륙 나흘 만인 7월24일에 3명 모두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이를 계기로 달에 장치한 과학 장비들에 의해 달의 기원 구조 등이 부분적이나마 밝혀졌으며 기상 우주 체계 등의 연구 진공우주 관측에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이들이 가지고 온 월석의 일부는 세계 9개국 142명의 과학자에게 나누어 주어 연구케 하였는데 우리나라에도 분배 되었다.

[1958년 7월7일] 서울야구장(동대문야구장) 건설
1958년 공사비 4억 8,000만 환을 투입한 서울야구장이 건설되었다. 그 후 1959년 8월20일에 관중 2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스타디움으로 재개장된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1966년에 야간경기를 할 수 있도록 조명도 갖춘다.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이전(1960년대~1980년대 초)까지 학생야구대회의 메카로 군림했다. 이곳에서 고교야구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관중석이 만원사례를 이룰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이 당시에는 TV 뉴스를 중단하고 야구 중계를 속개할 정도로 고교야구의 열기가 대단했다.
그로부터 2년뒤인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고 그해 3월27일 한국 프로야구의 첫 시즌 개막전이 이 구장에서 열렸다(MBC 청룡 11-7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서울을 연고로 하는 MBC 청룡이 이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었고, 그 해에 잠실야구장이 완성되면서 홈구장을 잠실로 옮겼다. 그리고 잠실야구장이 완성됨에 따라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이름은 동대문야구장으로 개칭되었다. 1985년에는 대전광역시에서 서울로 OB 베어스가 이전해 오면서 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이용했었고, 이듬해에 홈구장을 잠실야구장으로 변경했다.
그 이후에 아마추어 야구 전용구장으로서 한국의 4대 메이저 고교야구 전국대회(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대통령배)나 대학야구 대회의 개최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2006년 10월 야구장을 포함한 동대문운동시설이 전면적으로 철거되면서 재개발이 결정되면서 50여 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 당시 한국프로야구선수회와 아마추어 야구단체는 같은 해 10월25일에 공동 성명을 발표해 철거 반대의 의사를 나타냈으나 묵살되었고 2007년 12월18일부터 구장의 철거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8년 3월14일 발파, 완전히 철거되었고 이후 대한민국의 아마추어 야구의 주요 대회는 목동야구장과 수원야구장 등지에서 개최되고 있다. 구로구 고척동에 하프 돔이 달린 동대문야구장의 대체 야구장을 지으려고 했으나, 완전 돔 구장으로 중간에 변경되었다.
한편 동대문야구장이 철거된 자리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들어서면서 사거리 이름, 버스 정류장명도 이에 따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거리(정류장)로 변경되었다. 인근의 2호선과 4호선, 5호선이 만나는 환승역인 동대문운동장역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개명하였다. 다만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이 인근에 신설되었다.

[1453년 7월17일] 영국-프랑스 ‘백년전쟁’ 종결
백년전쟁(百年戰爭)은 1340년 6월에 영국과 플랑드르 연합함대가 라인강의 하구에 있는 브뤼주(지금의 브루게) 슬뢰이스항에 대한 프랑스 함대의 봉쇄를 저지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하였고, 이후 도버 해협의 제해권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116년이라는 기간 동안 프랑스만 전쟁터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백년전쟁은 1360년의 브레티니-칼레 조약의 체결까지를 제1기, 1415년의 아쟁쿠르 전투 또는 1420년의 트루와 조약의 전과 후를 제2기·제3기로 나눈다.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家)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당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羊毛) 공급을 중단했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했다.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宗主權) 아래에 있었지만,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면서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1997년 7월1일] 홍콩, 중국 영토로 복귀
1997년 오늘,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이후 155년 동안 영국의 통치를 받아 온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다. 이날 자정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주권 반환식에서 찰스 영국 왕세자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대신해 고별사를 낭독했다.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은 환영사를 통해 ‘홍콩의 자치를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반환식에 이어 둥젠화(董建華) 초대행정장관을 수반으로 하는 홍콩특별행정구 출범식이 열렸다. 또 중국 인민해방군 4,000여 명이 홍콩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광장에서도 1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홍콩 반환을 축하하는 경축행사가 펼쳐졌다. 홍콩특별행정구에서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는 반환 이전의 자본주의가 그대로 존속돼 1국2체제가 이뤄지게 됐다.
홍콩의 역사는 1840년 청나라와 영국간의 아편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나라의 폐쇄적, 불공평한 무역정책으로 영국과의 무역에서 청나라는 큰 이익을 남기게 된다. 그러자 이에 화가 난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사다가 청나라의 민간인들에게 몰래몰래 팔아서 큰 이익을 남긴다. 결국 청나라의 많은 돈이 나가고, 사람들이 아편을 피우면서 나라가 쇠약해지자 청나라는 영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하자 영국은 이를 빌미삼아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1840~1842년 동안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영국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1842년 8월 청나라는 ‘난징조약’에 의해 홍콩이 할양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을 들인 후 두려움을 느낀 자본가들이 홍콩으로 대이주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홍콩은 번영을 이루게 된다. 1972년 중국과 영국간의 국교가 수립된 후 1982년부터 홍콩반환협상이 시작, 1985년에 반환이 공식발효 되었다. 이후 1996년 12월 둥젠화 행정장관이 선출되고 임시입법회의가 구성되고 그 다음해 7월1일 홍콩이 중국에 정식 귀속된다.

[1972년 7월4일] 7·4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 7월4일 오전 10시 7.4남북한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천명한 이른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북간의 정치적 대화 통로 마련과 한반도 평화정착 정책 추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의 첫 합의 문건이다. 이 성명이 나오게 된 배경은 적십자예비회담과는 별도로 비밀실무자 접촉을 제의하여 제9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다음날 별개의 남북간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한 데 있다.
당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양측은 공동성명을 통해 상호 중상비방과 무력도발의 금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 실시 등에 합의하고 이 합의사항을 추진하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약속했다. 이 공동성명의 발표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두 달 전인 5월2일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했고, 북측의 박성철 제2부수상도 5월29일 서울을 방문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공동성명은 당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던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즉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획기적인 통일의 3대 원칙을 발표했던 것이다. 공동성명에서는 이밖에도 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금지와 무장도발 금지, 민족적 연계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한 다방면의 제반 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실시를 위한 적극협조, 서울과 평양 사이의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 중요한 합의사항들이 발표되었다.
이 성명은 대한민국이 주도하여 남북간의 정치적 통로를 마련한 이외에도 고위급 정치회담을 통해 공동성명을 합의 발표함과 동시에 상호 방문을 통하여 쌍반의 당국최고책임자를 만나 남북문제를 허심탄회하게 거론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