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인의 영웅들’ 국민 가슴속에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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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의 영웅들’ 국민 가슴속에 영원히
  • 박희남 기자
  • 승인 2010.06.0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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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실종자 수색 나섰던 금양호 침몰, 고귀한 희생 결코 잊지 않을 터

지난 5월2일 전국적으로 맑고 따듯한 날씨 속에 도심 공원 등에는 모처럼 찾아온 봄 날씨를 만끽하려는 나들이객들이 몰렸다. 같은 날 오후 인천시 서구 경서동 신세계장례식장에 마련된 금양98호 희생자 추모분향소 앞엔 한 남자가 삼삼오오 봄나들이를 떠나는 가족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이맘때엔 형님이랑 봄꽃 축제 가곤 했는데’, ‘형님 어서 오세요. 바다랑 결혼했다고 하더니 진짜 결혼한 거요’, ‘대체 언제 올 거예요. 저 기다리고 있어요. 이번에 형님 돌아오시면 다시는 속 안 썩이고 잘할 테니 어서 오시요’, 금양98호 선장인 김재후 씨의 동생 재홍 씨는 연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난 4월2일 바다에 빠진 천안함 실종자들을 구하러 간다며 대문 밖을 나섰던 형은 한 달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영웅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형. 2010년 4월2일, 대한민국은 재홍 씨의 형을 빼앗아 갔다.


“조국이 부르면…”
지난 4월2일 천안함 실종자 수색작업을 도와달라는 해군의 협조 요청을 받은 쌍끌이 어선 금양97호와 98호는 천안함 침몰 해역으로 길을 떠났다. 금양98호 선원들은 나랏일이기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구조작업에 착수했다. 오후 3시쯤이 지났을까. 순탄했던 수색작업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 조류가 너무 빠르게 흐르는 탓에 그물이 찢어져버린 것이다. 이후 수색작업은 중단됐고, 금양97호와 98호는 조업구역으로 뱃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어둠이 나직이 깔린 오후 8시 경. 서해 대청도 서쪽 55km 해상에서 금양97호를 뒤따라오던 98금양호가 캄보디아 선박 타이요1호와 충돌했다. 그렇게 그들은 평생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에서 자취를 감췄다. 백령도 해역에서 다른 저인망 어선 9척과 천안함 실종자 수색을 마치고 조업구역으로 출발한 지 3시간여 만에 발생한 비극이었다.
사고 직후 해양경찰청은 함정과 항공기를 동원해 대청도 해역에서 수색작업을 펼쳤다. 그리고 침몰 다음날인 지난 3일 대청도 인근 해상서 故 김종평(55) 씨와 인도네시아 국적의 람방 누르카효(35) 씨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머지 7명의 생사가 오리무중인 가운데 해경은 지난 4월14일 잠수용역 전문기업인 ‘언딘’을 수색업체로 선정한 후 실종자를 찾기 위한 수중수색을 추진했다. 하지만 바다 밑으로 사라져 버린 실종자를 찾는 일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민간 잠수팀이 기상악화로 대청도 근해까지 피항했다 돌아오기를 수십 번. 침몰 19일 만인 지난 20일과 23일, 실종자 7명을 찾기 위한 선박이 사고 해역인 백령도 앞바다로 출발했다. 하지만 역시 실패였다. 덕분에 실종자 가족들의 합동 분향소 마련도 금양98호 인양 후로 미뤄졌다.
정부의 도움은 딱 여기까지였다. 지난 4월23일 해경과 잠수전문업체 ‘언딘’ 관계자는 인천해경 대회의실에 모인 실종자 가족 10여 명 앞에서 금양98호 수중수색을 잠정 중단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이유인 즉 금양호가 깊이 80m의 심해에 가라앉아 잠수사들의 안전이 우려되고, 선체 입구에 어망과 밧줄 등이 쌓여 있어 내부 진입이 어렵다는 것. 이후 정부의 태도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잠정 중단의 뜻을 밝힌 후 수색에 참여했던 작업 선박 3척은 금양98호 침몰해역에서 아예 철수를 했고, 사고 발생 이후 싸늘한 주검만이라도 찾을 수 있게 해달라는 유족들의 간절한 바람은 당국의 무관심 속에 처참히 묻혀 버렸다.

실종자들 사연 구구절절해
7명의 실종자들 대다수가 변변한 가족도 없이 오로지 생계만을 위해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이 밝혀져 또 한 번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평범했다면 어엿한 가정을 꾸려나갈 30~40대의 남성들이었지만 이들은 자의반 타의반 가족들과 생이별을 선택해야 했다. 부모 또는 홀어머니가 살아계신 경우도 있었지만 부모가 사망했거나 아내와 자녀가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홀어머니를 모셨던 허석희 씨는 지극한 효심의 소유자였다. 쌀밥 한 번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던 허 씨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중학교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그런 허 씨가 제대로 된 일을 할리는 만무했다. 결국 열아홉이 되던 해 허 씨는 바다로 향했다. 배를 타면 목돈을 모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기 때문이다. 당뇨로 오랫동안 편찮으신 홀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기뻐하고 신나했던 허 씨였다. 허 씨는 결국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바다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금양98호 선원 가운데 가장 먼저 시신이 발견된 故 김종평 씨는 사랑하는 삼임 씨를 두고 숨을 거두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피붙이 하나 없었던 종평 씨는 부두 터미널에 노점을 차리고 김밥을 팔던 삼임 씨를 짝사랑했다. 노점에서 인사를 나눈 것이 종평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표현이었지만, 삼임 씨는 이런 종평 씨의 순수함이 좋았다. 그렇게 오갈 곳 없는 삼임 씨와 종평 씨는 서로 의지하며 남은 여정을 함께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종평 씨는 끝내 삼임 씨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한편 삼임 씨는 동거인이라는 이유로 장례절차를 협의할 가족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종평 씨는 인천의 한 병원에 19일이나 시신이 안치돼야 했다. 삼임 씨는 그런 종평 씨의 영정사진을 보며 한 없이 눈물만 흘렸다. “돈 많이 모으고 싶다고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이에요. 그러면서도 매일 노숙자나 어려운 이웃들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 꼭 한푼 두푼 주고 갔던 착한 사람이었는데….” 1955년 5월25일 출생일자가 선명이 적힌 종평 씨의 신분증만이 삼임 씨의 손에 남겨 그녀를 위로하고 있다.
종평 씨 바로 옆에 마련된 람방 누르카효 씨의 빈소도 같은 날 차려진 이후 가족은 물론 조문객이 아예 없었다. 코리안 드림을 꿈에 안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한국을 찾아온 인도네시아 국적의 람방은 집이 없는 떠돌이 방랑자였다. 다섯 살과 세 살 된 아들을 둔 람방은 한국에서 배를 타면 인도네시아보다 월급이 10배가량 많다는 소리에 외로운 타향살이를 선택했다. 한국에 오기 위해 람방은 브로커에게 거액의 돈을 줘야 했다. 때문에 람방은 목돈을 모을 수 있는 저인망 어선을 탔다. 1년이면 1,50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소리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실실 웃던 심성 고운 람방. 람방의 코리안 드림은 딱 거기까지였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지의 땅, 한국에서 람방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실종 선원 모두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몸뚱이 하나 가눌 집은 고사하고 여관과 쪽방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간혹 집을 장만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아도 술값으로 날려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주위 사람들은 막장 인생이라며 손가락질 했지만 1년 내내 배에서 시간을 보내는 뱃사람들인 그들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자 전부였다.


눈물로 보내는 마지막 길
제 풀에 꺾인 실종자 가족들은 사고 28일 만인 4월30일 정부에 요구했던 선체 인양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실종자가족대책위원장인 이원상 씨는 “잠수부들이 심해에 들어가야 하는데, 또 다른 추가 희생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더 이상 정부에 선체 인항을 요구해도 현실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가족들도 많이 지친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심장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가족과의 만남을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희생 선원 가족들은 정부와 의사자(義死者)에 준하는 예우, 서훈 추서, 장례비 정부 부담, 14일까지 의사자 신청 2인에 대한 심사위 개최, 위령비 건립 등에 합의한 후 장례절차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 5월2일 마침내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금양호 실종 선원 7명에 대한 합동 장례를 수협 5일장으로 치렀다. 9명의 선원들이 바다에 빠진지 딱 한 달 만이었다. 금양98호 희생자 추모분향소엔 쓸쓸함을 넘어 적막감마저 돌았다. 4월29일 천안함 순국장병 46명 용사들의 영결식이 경기 평택 해군2함대 사령부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날 이곳에선 천안함 영결식에 참석해 사망·실종자 46명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눈물을 흘렸던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 정치권 유력 인사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천안함 순국 장병 전원에 추서된 화랑무공훈장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꿈마저 소박했던 이들에겐 따뜻한 관심과 진실 된 위로의 한마디가 화랑무공훈장보다 백배는 더 값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 직원만 바삐 움직일 뿐 이곳을 찾는 조문객의 발길은 뜸했다. 영정사진 앞에 놓인 국화 몇 송이가 더욱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살아생전 이들이 어느 곳에 가서 꽃치장을 받아보았을까. 오후가 되면서 비로소 일반인과 해군장병들의 발길이 이어졌지만 천안함 승조원 경우와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사회 고위층 인사들의 조문도 간간히 눈에 띠었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이날 오전 조문을 마치고 “의사자 신청 등 유족들의 요구사항이 정부와 협의가 원활하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며 장례가 끝난 후 후속조치가 최대한 빨리 이뤄지도록 하겠다”며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어 오후에는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이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은 그동안 해군이 금양호 선원과 가족들에게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선원 유가족들이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하며 강한 불만을 표출해 장례식장에 한 때 긴장감이 휩싸이기도 했다.

李대통령 추모사 중 금양98호에 대한 언급 없어 아쉬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천안함 침몰 사건이 일단락 됐다. 일단 급한 불은 끈 정부는 금양호 실종자 가족들 달래기에 나섰다. 하지만 금양98호 침몰 실종사고에 대해 책임지는 이들은 없었다. 해경, 선박회사, 인천시 등에 문의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누구 하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 급급한 모습이었다. 다른 한편에선 故 김종평 씨의 안치비용과 실종자 가족들의 인천 체류 비용 부담을 둘러싸고 실종자 가족과 선박회사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랏일 하다 죽었으니 나라에서 보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다. 우리가 따로 지시한 적도 없는데 왜 돈을 지불해야 하나’, 죽은 사람만 불쌍할 뿐 참으로 영양가 없는 싸움들이었다.

금양호를 바라보는 여론의 시선도 차갑긴 마찬가지였다. KBS 공영방송은 방송을 통하여 천안함 순직 장병을 위한 성금을 모금했다. 하지만 정작 성금이 더 급한 사람들은 바로 민간어선 금양98호 유가족들이었다. 한 푼이 절실한 이들에게 돈은 말 그대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편이었다. 천안함 실종 사건 때문에 국가가 뒤숭숭한데, 어떻게 본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할 수 있겠냐며 성금 모금 방송을 씁쓸히 지켜보던 금양98호 유가족들.
때 마침 TV방송을 통해 금양98호 유가족들의 빈소가 방영됐다. 이날 방송된 빈소의 모습에선 의로운 죽음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향이 꺼질 때면 상주가 직접 향을 태웠고 밖에서 작은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리나케 문지방으로 달렸다. TV를 시청한 국민들은 정부의 무관심한 태도에 뿔이 나기 시작했다. 네티즌들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골프치고 사람 접대하는 곳에 쓰이는 돈은 아깝지 않으면서 남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고 했던 9명 선원에게는 왜 지원을 하지 않느냐’, ‘정부는 금양98호 사건이 마무리 되는대로 그들 모두를 의사자로 처리해주길 바란다’ 등의 의견을 잇달아 올렸다.
날이 갈수록 정부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거세졌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정부가 이번엔 채찍대신 당근을 선택했다. 지난 5월3일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던 정부는 금양98호 희생자 9명에게 보국포장을 수여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여기엔 인도네시아 국적의 2명도 포함돼 있었다. 보국포장이란 국가 안정보장과 사회 안녕질서 유지에 공적이 뚜렷한 사람으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인명 등을 구조한 사람에게 수여토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4일 인천 서구 신세계장례식장을 찾아 희생자들을 조문할 예정”이라며 “정 총리는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정부의 서훈 추서 방침에 따라 희생자들에게 보국포장을 수여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바쁜 와중에도 내 동생이고 내 아들이기에 무보수로 목숨을 걸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정작 조국은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다. 국가애도기간까지 정해지며 온 국민의 관심을 받았던 천안함 침몰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금양98호. 사회 각계각층의 비난이 이어지자 그제야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바쁜 정부와 조국. 9명의 고귀한 목숨을 내다 버린 것은 46명의 용사들도, 어려운 가정형편도 아니었다. 결국, 내가 태어나 한평생을 자라온 땅 바로 이곳 ‘조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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