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비극의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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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비극의 6월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0.06.0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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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주년, 전쟁 회고보다는 참전용사에게 감사하고 세계평화에 기여

분단 비극이 낳은 동족상잔 6.25전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로부터 5년 뒤 1950년 6월25일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려 퍼진다.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퍼부으며 기습공격을 함으로써 6.25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1일), 국회의원 선거(5월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며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 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
국군은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하고 서울은 곧바로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UN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구한다. UN안보리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고 16개 나라, 30만여 명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한반도에 투입된다. 같은 해 9월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해 전세를 반전시킨다. 6.25전쟁은 발발 2년 뒤인 1953년 7월27일 북한군과 유엔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막을 내린다.


1989년 6월4일 중국 톈안먼(천안문)사건
1989년 6월3일 밤 10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 광장을 뒤덮은 100만 명의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한 무력 진압은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당시 중국정부는 300여 명, 외신은 1,500~2,000명의 시민과 학생이 무력 진압에 의해 숨졌다고 발표했다. 처참한 ‘피의 일요일’로 만든 이 사건이 바로 ‘6·4 톈안먼 사건’이다.
시위는 4월15일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한 후, 팡리즈[方勵之]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학생들은 노동자·지식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층을 대표하여 5월13일 이래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과 함께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계속했다. 5월15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7일 발생한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시위로 일정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한편, 학생들의 요구에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그의 해임설이 떠도는 가운데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국무원 부총리 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6월3일 밤 인민해방군 27군을 동원, 무차별 발포로 톈안먼 광장의 시위군중을 살상 끝에 해산시켰으며 시내 곳곳에서도 수천 명의 시민·학생·군인들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죽거나 부상했다. 이 사건은 당시 중·소 수뇌회담 취재차 입국했던 외국 기자들에 의해 즉각 전 세계로 보도되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는 이와 같은 비인도적 처사에 항의, 강력한 비난성명을 냈다. 이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는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 지도부는 반혁명분자에 대한 숙청, 개인숭배 조장, 인민들에 대한 각종 학습 등 체제굳히기와 함께 개방정책 고수를 천명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는 등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여 왔으며, 특히 동유럽의 민주화 물결을 극복하는 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1968년 5일 로버트 케네디 피격
1968년 6월5일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LA에 있는 엠배서더호텔에서 피격됐다. 캘리포니아주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자축 연설을 하고 나오는 순간 로버트 케네디는 머리에 총탄 4발을 맞고 쓰러진다. 저격범은 요르단계 이민자.
케네디가 암살된 후 그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됐던 그는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형인 존.F.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지 4년5개월 만에 암살당해 형의 비극적 전철을 밟았다. 그의 나이 마흔세살, 그의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의 형 옆에 묻혔다. 하지만 암살의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에 변호사가 됐다. 1960년에는 형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관장했다. 이후 법무부 장관과 상원의원을 지냈다.
미국의 ‘정치 가문’으로 미국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케네디가문은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 이후로 1명의 대통령, 3명의 대통령 후보, 3명의 상원의원, 2명의 하원의원을 배출해냈다. 하지만 후손 중 8명이 사망하는 등 잇따른 비운을 겪었다.

1944년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1년 독일·소련 개전(開戰) 이래 독일의 주력부대를 맞아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던 소련은 영국·미국 양측에 북프랑스에 제2전선을 구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영국 수상 W.처칠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신중론 때문에 실현이 지연되었다. 1943년 11월 말 미국·영국·소련 수뇌들은 테헤란 회담에서 1944년 5월1일까지 북프랑스에서 상륙작전을 실행할 것을 확인하였다. 1944년 6월6일 미국의 D.D.아이젠하워 대장의 총지휘하에 미국 제1군, 영국 제2군, 캐나다 제1군 등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이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이날 상륙 당일은 수송기(輸送機) 2,316대와 많은 글라이더를 동원하여 공수부대 병력 3개 사단을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거점을 확보하고 함정 수천 척의 호위 아래 수송선으로 보병과 기갑부대 7개 사단을 5개 지점에 상륙시켰다. 그 엄호 아래 항공기 총 1만 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하여 7개 사단이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7월2일까지 연합군 병력 100만여 명, 군수물자 57만여 톤, 각종 차량 17만 량이 상륙했다.
상륙 초기 3주 동안 연합군측은 전사 8,975명, 부상 5만 1,796여 명의 인명피해를 봤고 독일군 4만 1,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쟁 초기 서부전선에서 패해 유럽대륙에서 퇴각한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72년 역사상 최대의 정치 워터게이트 스캔들
1972년 6월17일 오전 2시 반 닉슨 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5명의 괴한이 침입했다. 이들은 한 달 전 설치해 놓았던 도청장치를 바로잡기 위해 이곳에 몰래 들어갔다. 순찰을 돌던 워터게이트 빌딩 경비원이 비상구 잠금장치가 벗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이른바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진다. 현장에서 체포된 괴한 5명은 당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동원된 비밀공작원들이었다.
처음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워싱턴포스트지의 신참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딥 스로트’라는 익명의 고위 관리의 결정적 제보에 따라 집요하게 사건을 추적,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도청을 지시했음을 밝혀냈다.
이 사건으로 관련자 제임스 코머드 등 7명이 체포되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중에 미첼 재선 위원장, 홀드먼 보좌관 등 닉슨의 측근도 관련되었다는 사실과 백악관의 은폐조작 이전부터 행해진 정적에 대한 불법적 정보활동 등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닉슨 대통령은 1973년 4월 홀드먼, 엔릭먼드 두 보좌관, 딘 법률 고문, 크라인딘스트 사법장관을 사임하게 했다.
그리고 1973년 5월 아치볼드 콕스가 특별검사로 임명돼 사건의 전모와 은폐 의혹을 규명하였고 이 과정에서 콕스는 백악관의 보복을 받아 파면됐다. 하지만 하원 사법 위원회에서 대통령의 탄핵 결의가 가결됨에 따라 닉슨 자신도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애초 닉슨은 도청사건과 백안관과의 무관함을 주장했으나 대통령 보좌관 등이 연루되고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됨에 따라 결국 1974년 8월 의회에 탄핵결의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됐다.
1974년 8월4일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에 사실상 관여했으며 사건 발생 후 수일 사이에 수사의 범위를 백악관까지는 확대하지 말도록 연방수사국에 지시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러한 사실의 폭로로 의회와 미국 전역에서 당의 지지를 상실하게 된 닉슨은 8월8일 밤 사퇴 성명을 발표했고 부통령인 제럴드 R.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후임 대통령인 포드는 닉슨의 재임기간 중 범죄사실에 대해 사면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965년 22일 한일협정 정식 조인
1965년 6월22일 한국의 외무장관 이동원(李東元),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金東祚)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晉一) 사이에 조인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이에 부속된 4개의 협정 및 25개의 문서(협정부속서 2, 교환공문 9, 의정서 2, 구술서 4, 합의의사록 4, 토의기록 2, 계약서 2, 왕복서간 1)의 총칭이다.
부속협정은 ①어업에 관한 협정, ②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③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④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다. 조약의 교섭(한일회담)은 14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최종단계에서는 두 나라에서 모두 야당과 학생 등의 강력한 반대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제1차 한일회담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의 중개로 1951년 10월21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1952년 2월 15일부터 당시 한국의 이승만(李承晩) 정부와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 사이에 본회담이 시작되었는데 쌍방의 주장이 크게 엇갈려 4월21일 중단되었다.
제2차 회담은 1953년 4월15일에 열렸으나 평화선문제, 재일교포의 강제퇴거문제 등으로 7월23일 다시 결렬, 10월6일부터 재개된 제3차 회담도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타 강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일본의 36년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망언으로 10월21일 또다시 결렬되었고, 그 후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제4차 회담은 1957년 예비회담을 거쳐 1958년 4월15일 시작되었는데, 재일교포의 북송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가 1960년 4·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장면 내각은 한일회담 재개를 추진하여 그해 10월25일 제5차 회담이 열렸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다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한일회담의 타결에 역점을 두었고, 1961년 10월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1962년 11월12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은 도쿄(東京)에서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회담, 대일(對日)청구권문제와 평화선, 법적 지위문제가 타협점에 도달하여 메모를 교환하였다.
그 후 한국 내에서는 1964년 3월24일 학생시위에 이어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1965년 2월20일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가 방한, 기본조약의 가조인을 함으로써 완전타결을 보았다. 그러나 청구권문제·어업문제·문화재반환문제 등에서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2005년 1월 한일협정 문서가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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