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공포에 휩싸인 러시아… 체첸 악몽 되살아나
러시아 모스크바 테러 이후 일주일 사이 다섯 건의 폭탄테러로 60여 명이 사망했다.
3월29일 오전 7시56분(현지시간), 모스크바 중심 크렘린으로부터 1㎞남짓 떨어진 루비얀카 지하철역 구내로 들어온 전동차 2번째 칸에서 폭탄이 터졌다. 이어 8시38분쯤 루비얀카 역에서 네 정거장 떨어진 파르크 쿨트리 역에서도 테러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출근시간에 수도 모스크바 도심 두 곳의 지하철역 자살폭탄 테러로 최소 38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다쳤다. 2004년 8월 이후 약 6년 만이다. 당시 모스크바 지하철역에서 자폭테러로 10명이 사망했다. 러시아 경찰은 테러 발생 후 역 주변 도로를 통제하고 두 역으로 통하는 모든 지하철 운행을 금지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지하철 테러가 발생한 지 이틀 만에 또 다시 러시아 남부 다게스탄 자치공화국에서 자살 폭탄이 터졌다. 당시 테러범들은 지프 차량에서 경찰 순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다 폭탄을 터뜨렸다. 이어 사건 조사를 위해 경찰이 도착하자, 다시 한 번 자폭 테러를 가했다. 두 번의 잇따른 폭탄 테러로 적어도 12명이 숨지고 23명이 다쳤다. 사망자 가운데 9명이 경찰이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오전 다게스탄의 인치헤역 인근 철로에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폭발 사고가 발생,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로 향하던 화물열차 8량이 탈선했고 이중 5량이 전복했다. 이 사고 여파로 승객 119명을 태운 튜멘~바쿠 여객열차의 운행이 중단됐다.
이어 지난 4월3일, 경찰이 무장단체의 총격을 받아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뱌체스라프 가지예프 다게스탄 내무부 대변인은 “공화국 수도 마하치칼라에서 북서쪽으로 70㎞ 떨어진 지역에서 총격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사건 발생 후 “당국은 범인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테러 배후를 색출해 멸살하겠다”며 예의강경 보복을 천명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테러범들이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해 이 나라와 시민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며 “우리는 절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지난 4월19일 북카프카스에서 테러 소탕 작전을 펼 반(反)테러 작전팀을 구성해 본격적인 테러 작전에 돌입,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이달 말까지 북카프카스 지역에서 각종 범죄와 테러 행위 척결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짤 것을 지시했으며 검찰청, 연방보안국(FSB), 대통령 행정실 등이 중심이 돼 내달 15일까지 테러범과 그 공범들에 대한 처벌 강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러시아, 지하철 테러 배후로 체첸 반군 단체 지목
러시아 당국은 지난 3월29일에 일어난 모스크바 지하철역 연쇄 자폭 테러범으로 자네트 압둘라예바(Abdullayeva·17)를 지목했다. 압둘라예바는 체첸공화국의 이슬람 분리주의 테러단체인 ‘초르나야 브도바(검은 미망인)’ 소속 여성 대원으로 유리 루즈코프 모스크바 시장은 연방보안국(FSB)의 조사내용을 인용해 몸에 폭탄을 장착한 여성 두 명이 두 지하철역에서 각각 폭탄을 터뜨렸다고 지난 4월13일 밝혔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한 관계자는 이번 자살테러범들에 대해 “이슬람 순교단체 샤히드 소속 여성들로 보인다”면서 “폐쇄회로(CC) TV 화면을 통해 이들 여성이 지하철에 탑승한 것을 확인했다”며 “‘여성 자살테러범’이라는 점도 2002년 이후 모스크바에서 벌인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테러 수법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FSB 알렉산데르 보르트니코프 국장은 이날 반(反)테러 대책 회의에서 “이번 테러가 북카프카스 지역에서 체첸 독립을 요구하는 분리주의자들과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며 “모스크바 지하철 테러와 다게스탄 키즐라야 테러 공격 배후가 확인됐으며 공범 조직도 알아내 추적 중”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지난해 11월 고속 열차 테러에 가담한 26명의 테러리스트를 사살했고 다른 14명을 체포했다”면서 “이들은 그간 50여 건의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사법당국은 압둘라예바의 테러 배후가 도쿠 우마로프(Umarov·45)라는 점도 확인했다. 이에 러시아 지도부는 우마로프의 검거에 주력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우마로프는 모스크바에서 거주하다 지난 1994년 러시아 정부의 체첸전쟁 때 ‘조국을 구하겠다’며 체첸으로 돌아가 반군 투쟁을 전개해온 인물이다. 우마로프는 2006년부터 체첸 독립정부인 ‘이츠케리아(Ichkeria·현지어로 체첸이라는 뜻)’의 대통령에 올랐고, 2007년부터는 이츠케리아의 후신이라며 ‘카프카스키 에미리트(카프카스의 이슬람왕국)’를 선포한 뒤 지도자를 자임하고 있다.
체첸 반군 지도자 도쿠 우마로프는 고속열차 테러와 이번 지하철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그가 배후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은 지난 1월 러시아 전역에 대한 테러를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지도자 도쿠 우마로프는 지난 2월14일 웹사이트 카프카즈닷컴에 실린 인터뷰에서 “우리 고장에서만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땅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다음 테러 목표가 모스크바임을 시사했다.
체첸 반군 지도자 도쿠 우마로프는 “우리는 전쟁이 러시아의 안방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알려주려 한다. 군사 활동을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할 것이다”라며 이번 테러가 러시아 보안군이 체첸 민간인을 살해한 보복이라고 말했다.
미국 싱크탱크 카네기센터의 안드레이 말라셴코는 이번 테러의 직접적인 이유에 대해 지난달 러시아 당국이 우마로프에게 충성하는 분리주의자 지도부 2명을 포함해 20명을 사살한 데 대한 일종의 ‘복수’라고 지적했다. 말라셴코는 “이번 폭탄테러는 러시아의 중심을 겨냥한 지하드(성전)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말했다.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테러가 모스크바에서 추가로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체첸을 중심으로 한 북카프카스 지역에서는 옛 소련 몰락 이후 러시아 지배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대통령이었던 지난 2007년 이 지역에서 발생한 테러 건수는 25건이었으나 2009년에 800건으로 급증했다.
FSB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만 170명의 체첸 이슬람 반군 조직원들이 검거됐고 10건의 테러 행위를 사적에 적발했으며 이들로부터 150㎏ 폭발물과 100개의 사제 폭탄을 압수했다. 극동 하바롭스크의 한 건설 현장에서 쇼핑 가방 안에 TNT 200g 상당의 폭탄이, 무르만스크의 한 기차 역 주변에서는 잠금장치가 설치된 폭탄이 발견돼 폭발물 제거반이 출동하는 등 한때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테러-보복, 체첸과 러시아의 끊을 수 없는 악순환
끊임없이 분리 독립을 추진하는 체첸과 이를 허락하지 않은 러시아의 입장이 테러 등으로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이 배경엔 ‘석유’라는 자원이 깔려 있다. 지난달 모스크바 지하철 연쇄폭탄테러가 발생한 직후 오일프라이스닷컴은 “폭탄테러의 근본은 석유”라고 보도했을 정도로 석유는 러시아의 경제력을 좌지우지한다. 때문에 러시아는 체첸 남부지역인 카프카스 북부 오지를 잃지 않기 위해 강경책을 써오며 분리독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 지역을 잃으면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2007년 미 에너지정보국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께 카스피안 해 지역 석유 생산량은 하루 430만 배럴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추정 매장량만도 최대 490억 배럴로 중동국가에 못지않다. 오일프라이스닷컴은 “1999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임명한 후 그에게 처음 맡긴 역할은 체첸 지역을 통과하는 석유관 건설”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1994년과 99년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과 두 차례 전쟁을 벌여 굴복시켰다. 이후 러시아 북카프카스 지역인 잉구셰티아, 다게스탄, 체첸 자치공화국 등지에서는 체첸 반군 잔당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체첸 남부에 친미(親美) 정권인 그루지야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체첸이 뚫리면 러시아는 북쪽의 저지대로 밀려난다. 러시아가 체첸 반군과 협상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또 전문가들은 러시아 전체 실업률이 8%대인 반면, 체첸의 실업률은 80%에 이를 정도의 경제 불균형도 테러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러시아의 날개 없는 추락, 언제까지
러시아 내에서 일어나는 반정부 시위도 최대 문제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대통령으로 집권할 당시 거의 자취를 감췄던 반정부 시위가 최근 들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러시아 야당이 모스크바 승리광장에서 시위를 벌여 상트페테프부르카, 카잔, 극동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확산됐다. 앞서 1월에는 러시아 역외(域外) 영토 칼리닌그라드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벌어진 공공요금 인상 항의 시위를 시작으로, 2월에는 바이칼호 인근 바이칼스크에서 제지공장 가동에 항의하는 2,000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공공요금 인상과 실업 대책 등에 항의하고 더 많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이유엔 지난해부터 시작된 물가상승과 실업 등 경제난이 원인이 되고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1998년 국가부도 사태 이후 가장 힘든 한 해”라고 말할 정도로 현재 러시아는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GDP는 전년보다 7.9% 줄었으며 유가 하락의 영향으로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대중교통 요금과 식료품 및 의약품 가격 인상 등에 국민들은 반발하고 있다. 지난 1월 칼리닌그라드에서는 1만 5,000여 명이 모여 공공요금 인상에 항의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런 가운데 최근 반정부 시위가 잇따르는 가운데 테러 공포까지 더해지면서 메드베데프와 푸틴은 금융 위기 이후 리더십에 있어서 최대 난관에 부닥친 것으로 보인다. 정치학자 보리스 마카렌코는 “대중은 최근 정부에 대해 회의적 입장”이라면서 “이는 경찰관들의 잘못된 행동과 비효율성을 비롯해 무엇보다 정부가 경제 위기에 있어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테러 공격은 정부에 또 다른 위기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또 다른 근심거리인 인종혐오 범죄 역시 줄어들지 않고 있다. 최근 한국인 인명 피해가 잇따르는 가운데 푸틴 총리는 이 범죄와 관련해 “위협 수준에 완전히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현재 러시아에 스킨헤드 등 극단적 민족주의 단체가 약 7만 개에 이른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러시아가 강경 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푸틴 총리가 정권을 잡은 이후 지속적 강경책이 테러를 양산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이번 테러를 “러시아 정치 지도부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라고 보도했다. AFP통신은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북카프카스에 대해 강경정책을 펴 온 푸틴 총리의 지난 10년간 정책의 실패”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