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 퇴직자금 금융시장으로 유입 지각변동 예고
퇴직연금(기업연금)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퇴직연금제 도입과 근로자 5인 미만 사업장 확대 적용을 골자로 하는 '근로자 퇴직급여 보장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정부안이 확정됐다. 노동부는 이에 따라 이 법안을 국회에 제출, 정기국회에서 입법화할 수 있도록 추진됨에 따라 이르면 올 12월부터 퇴직금을 금융기관 등에 맡겨 굴릴 수 있게 된다. 또 근로자들의 노후설계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거액 퇴직자금의 유입으로 금융시장의 지각변동도 예상된다. 준비 상황을 짚어봤다.
퇴직연금제 시행, 무엇이 달라지나
이르면 올 12월부터 열릴 국내 퇴직연금(기업연금) 시장을 놓고 벌써부터 자산운용사들 간에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 보험개발원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 시장은 어림잡아 계산해도 도입 첫해 9조원 규모가 되고, 2010년엔 13조원 이상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누가 시장의 승자가 되느냐에 따라 금융시장의 판도도 뒤바뀔 수 있다. 평생직장이 점차 사라지는 가운데 근로자들의 은퇴후 자금 설계도 획기적으로 달라질 전망이다. 어떤 퇴직연금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은퇴후 주머니 사정도 크게 다를 수 있다. 금융회사와 근로자들 양측에 퇴직연금은 기회이자 위기일 수 있다.
확정된 정부안은 국내 기업 회계처리 관행을 고려해 2006년 초부터 활발한 도입을 위해 퇴직연금제를 올 12월1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신규 적용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2008년 이후 2010년 범위 내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시기부터 적용하되 사업주의 부담도 현행 퇴직금의 절반 수준에서 시작해 단계적으로 상향조정하도록 했다. 5인 이상 사업장은 퇴직금제 유지나 퇴직연금제 전환여부를 노사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퇴직연금제 전환시 반드시 노사합의를 거치도록 했다.
퇴직연금제 형태는 사업장의 특성과 근로자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확정급여형(DB형)과 확정기여형(DC형)을 함께 도입하기로 했다. 또한 근로자들의 평균 근속 년수가 5, 6년에 불과한 점을 고려해 직장을 옮겨도 퇴직금을 누적해 통합해 받을 수 있도록 개인 퇴직계좌를 도입하기로 했다. 아울러 노무관리능력이 취약한 30인 미만 사업장은 퇴직연금제도 대신 근로자 전원이 개인퇴직 계좌에 가입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근로자의 수급권 보호를 위해 적립금 운용의 안정성과 건전성 확보장치를 마련했다. 적립금의 관리는 근로자 명의로 적립, 관리되는 신탁계약(은행)과 보험계약(보험) 방식으로 제한하기로 했으며, 적립금 운용은 다양한 금융기관의 참여를 허용하되 재무건전성 등 일정 요건을 갖춘 기관만 허용하기로 했다.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의무, 자기투자 제한 등(DB형), 원리금 보장 상품 제시 의무화, 주식 등 위험자산 투자 한도 설정 등(DC형) 안전장치를 두기로 했다.
노동부는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면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 의 선진국형 3층 노후소득 보장체계가 갖춰져 인구 고령화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퇴직적립금이 사용자로부터 독립돼 금융기관에 근로자 몫으로 적립되므로 기업이 도산해도 수급권이 보장돼 퇴직금 체불 위험이 없고 과세 혜택을 받으면서 목돈을 만들어 노후에 연금이나 일시금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근로자들의 퇴직에 대비한 비용관리가 예측 가능해지고 확정 기여형의 부담금을 납부하고 나면 이후에는 금융기관이 관리해주기 때문이 관리부담을 줄일 수 있다.
증시, 자산운용업계 변화 예고
퇴직급여를 대신하는 퇴직연금제가 올 12월부터 시행됨에 따라 증시와 자산운용업계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증권연구원은 올12월부터 퇴직연금이 도입되면 규모는 10년만인 2015년에 189조원에 이르고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145조원으로 현재 자산운용사 전체의 수탁고(MMF 포함)인 179조원에 크게 뒤지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또 보험개발원도 퇴직연금시장의 규모는 2006년에 5인 이상 사업장을 기준으로 49조원에 이르고 2010년에는 67조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투자자들의 안전자산 선호현상에 따라 퇴직연금의 자산중 주식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궁극적으로 증시 수급에 기여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401K' 제도의 도입으로 기업연금 발전의 전형을 보여주는 미국의 연기금은 1980년대 이후 저금리 기조와 1990년대 주식시장의 호황 등에 따라 주식투자비중이 급격히 늘어 증시 수급의 한 축을 맡고 있다. 또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401K 제도를 도입한 기업수는 1985년에 2만9천869개사였으나 1995년 20만813개사, 지난해에는 43만8천318개사로 크게 늘었다.
증권연구원은 미국 증시의 1990년대 활황 원인으로 정보기술(IT)산업발달과 기업의 생산성.투명성 제고 등도 거론되지만 퇴직연금 규모확대와의 관련성도 매우 중요했던 것으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한화증권 민상일 연구원도 퇴직연금 도입은 장기적 측면에서 증시의 수급기반을 강화시킬 전망이며 배당수익률이 높고 경영 안정성이 뛰어난 기업들의 수혜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다만 민 연구원은 미국의 S&P500 지수가 300포인트대에 안착한 이후 주식형 뮤추얼펀드로의 자금 유입이 급증세를 보였다며 종합주가지수가 1천포인트에 안착하지 못하면 연기금의 증시참여가 확대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미국보다는 일본 기업연금의 자산운용 형태가 국내 상황에 더욱 현실적으로 보인다며 퇴직연금의 주식투자 비중은 일본(2003년 28%)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자산운용사 업계 판도 변화
퇴직연금으로 자본시장 규모가 엄청나게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외국계 자산운용사들이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어 자산운용업계의 판도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기업연금 부문에서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피델리티는 자산운용업 본허가신청을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출한 상태로 내년 초부터 국내에서 자산운용 영업을 시작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피델리티는 이미 지난해 6월 예비인가를 받았고 포괄주의(블록트레이딩) 문제에 대해 금감위와 합의점을 찾지 못해 본허가 신청을 미뤘지만 퇴직연금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으로 국내 진출을 결정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피델리티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미국의 확정기여형(DC형) 기업연금 자산은 6천80억달러이며 이중 피델리티의 뮤추얼펀드 자산은 절반이 넘는 3천140억달러에 달한다. 또 최근 모건스탠리 프라이빗에쿼티가 대주주인 랜드마크투신이 외환코메르츠투신 매각의 최종협상자로 선정됨에 따라 수탁고 기준으로 업계 6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 프랑스계인 소시에떼제네랄과 기업은행이 합작 투자한 기은SG자산운용도 조만간 금감위의 허가를 받아 영업에 나설 예정이다.
이와 관련 LG경제연구원은 "경제 규모 등에 비해 성장이 지체된 국내 간접투자시장의 성장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외국 금융기관의 국내 진입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또 "외국계 선진 금융기관은 맞춤형 자산관리서비스 분야에서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고 인력을 확보하고 있어 자산운용시장에서 외국계 기관이 급속히 잠식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외국계의 공격적 진입에 대응하기 위해 인수, 합병으로 대형화를 꾀하면서 규모가 적은 회사들의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 진행될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운용사들의 치열한 선점 경쟁
운용사들은 이미 퇴직연금 유치를 위한 상품개발에 들어가거나, 퇴직연금과 비슷한 구조의 징검다리 상품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랜드마크투신운용은 곧 기업이나 학교 등 단체를 대상으로 한 단체전용 적립식펀드를 내놓을 계획이다. 포스코 같은 대기업들이 종업원에게 월급외로 매달 적립해주는 자금을 유치해 '+ '수익률을 올려줘, 퇴직연금도 끌어오겠다는 계산에서다.
대신투자신탁운용도 이달부터 법인전용 적립식펀드인 엔터프라이즈펀드를 시판했다. KB자산운용은 퇴직연금과 운용시스템이 비슷한 개인연금 상품을 준비중이다. 이 회사는 국내 최대 판매망을 가진 국민은행과 유럽퇴직연금시장의 큰손인 ING와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들과 상품개발부터 협력해 시너지효과를 낸다는 욕심이다.
피델리티 코리아도 내년 2월께로 예정된 공식 영업개시에 앞서 퇴직연금시장을 겨냥한 적립식 펀드상품 개발을 마쳤다. 이 회사의 에번 헤일 서울지사장은 "한국의 기업연금 시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며 "치밀한 시장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충분한 교육 및 상담 필요
미래에셋 증권 리스크관리본부 구원희 팀장(36)은 2년째 퇴직금을 회사에서 운용하는 연금펀드에 붓고 있다. 이 펀드는 미래에셋이 곧 도입될 퇴직연금 운용의 예행연습을 위해 지난해 1월부터 굴리고 있으며, 현재까지 15%의 수익률을 냈다. 구 팀장은 "국민연금만으로는 노년 소득이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해 퇴직금을 연금 펀드에 적립하고 있다"며 "회사의 보조금에 펀드 수익률까지 더하니 장기적으로 퇴직금보다 훨씬 큰 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퇴직연금이 늘 장미빛인 것은 아니다. 한국증권연구원의 고광수 연구위원은 "근로자의 선택에 따라 운용하고, 그 성과에 따라 급여를 받는 확정기여형(DC)의 경우 근로자가 투자 손실을 볼 위험도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경제 상황이나 투자 상품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얻어야 한다"며 "나이가 들수록 고위험 투자를 피하고, 장기적으로 정석투자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보험사․자산운용사 등 관련 금융회사들도 근로자들의 요구를 충족할 한국형 상품들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가입자 교육과 상담을 위한 서비스체계도 서둘러 갖춰야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주문한다.
보험개발원 보험연구소 류근식 연구위원은 "기업연금에 가입한 근로자들이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자금을 맡아 굴리는 수탁사의 책임과 의무를 명확히 하고 미국의 연금지급보장공사(PBGC)와 같은 안전장치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근로자들은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에 적절히 자산을 분배해 노후에도 지속적으로 소득이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사합의 해야 퇴직연금제 전환 … '퇴직연금제 문답풀이'
퇴직연금제는 어떤 장점이 있나.
⇒현행 퇴직금제도가 유지되기 때문에 퇴직연금제는 선택사항이다. 그동안 연봉제와 중간정산 확산 등 노동시장이 급변하면서 퇴직금이 사용자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근로자에게도 회사도산등에 따라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점이 많이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증시활성화를 위해 퇴직염금제를 도입하는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근로자들이 노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외국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면 부수적으로 증시가 활성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직접적인 목표는 아니다.
▲퇴직연금제가 시행되면 이전 근무기간은 어떻게 되나.
⇒사업장 실정에 맞추어 규약에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시행이전 기간으로 소급적용하는 방안과 추후 근로자 퇴직시 퇴직금으로 지급하는 방안등이 검토될수 있다.
▲퇴직연금제가 도입되면 퇴직금을 못 받는 경우는 없나.
⇒경영이 어려운 기업은 체불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확정급여형(DB)을 선택할 경우 사용자가 부담할 금액은 적립금 운용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회사가 도산이나 경영상 어려움을 겪을 땐 퇴직금 전액을 지불하지 못할 수도 있다.
▲확정기여형(DC)은 근로자들의 수급권에 어려움이 없나.
⇒확정기여형은 사용자가 낼 적립금은 사전에 확정되고 근로자가 받을 퇴직급 여는 근로자의 책임하에 이뤄지는 적립금 운용실적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근로자들이 선택한 금융상품을 잘 운영했다면 기업들이 낸 적립금 이상 을 받을 수 있다.
퇴직금, 퇴직연금 “어느 게 좋을까”
퇴직금과 퇴직연금 가운데 어느 것이 유리할까. 2005년 12월 퇴직연금제도 도입을 앞두고 퇴직금을 어떤 방식으로 받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적용되는 세율이나 퇴직연금 유형에 따라 수령액이 차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퇴직연금이란=기업이 퇴직금 전액을 사내에 적립하는 현행 ‘퇴직금’제도와 달리 퇴직금 전액 또는 일부를 외부에 맡겨 퇴직금 체불을 예방하는 제도. 연금 총액이 기존 퇴직금 총액과 같은 ‘확정급여형’과 기업으로부터 받는 퇴직적립금을 근로자가 직접 선택한 금융상품을 통해 운용하는 ‘확정기여형’으로 나뉜다.
2006년 1월부터 종업원 5인 이상 기업에 적용된다. 노사가 합의하면 기존 법정 퇴직금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다.
▲ 퇴직급여 총액은 ‘확정기여형’이 유리=보험개발원 산하 보험연구소가 최근 예상 투자수익률과 임금상승률 등을 감안해 산출한 연령대별 퇴직급여 총액은 확정기여형이 확정급여형이나 현행 퇴직금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 근무하는 27세 근로자(월 평균임금 164만3178원)가 55세까지 근무할 경우 받는 퇴직급여 총액은 확정기여형이 2억718만1859원, 확정급여형과 현행 퇴직금은 1억3401만8435만원으로 각각 추산됐다.
보험연구소는 안정적인 채권형에 주로 투자하는 확정급여형이나 현행 퇴직금과 달리 확정기여형은 위험이 있지만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주식형 또는 혼합형을 선택한다는 가정 아래 나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 세금을 줄이려면 일시금 또는 장기 연금으로=현행 세법상 퇴직급여를 일시금으로 받을 때는 다른 소득과 분리해 과세한다. 하지만 연금으로 받으면 다른 소득과 합산해 세금을 매기는 종합과세가 적용돼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소득이 많을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누진세율이 적용되기 때문.
보험연구소가 퇴직급여 수령 유형에 따른 소득세 부담을 추산한 결과 대기업에 근무하는 35세 근로자(월 평균임금 244만8880원)가 55세까지 일한 후 현행 퇴직금을 일시금(1억1243만3141원)으로 받을 경우 내야 하는 소득세는 397만9,491원이다.
하지만 확정급여형을 선택한 다음 퇴직급여를 5년에 걸쳐 연금 형태로 받을 경우 소득세는 982만5412원이다. 10년에 걸쳐 받으면 499만1,458원으로 연금으로 받는 것이 세금 측면에서 불리한 것으로 추정됐다. 다만 연금 수령기간이 15년이면 소득세가 364만1,482원으로 일시금보다 적은 것으로 예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