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네슬레(Henri Nestle)는 소젖과 밀가루, 설탕을 다양한 방법으로 혼합을 거듭하다가 ‘페린 락테(Farine Lactee)’라는 제품을 개발, 모유를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유아들의 사망률을 낮추겠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네슬레의 설립자인 앙리 네슬레는 자신의 이름 Nestle를 Nest(둥지, 보금자리)로 상징화해 회사 설립부터 기업 브랜드로 사용해오고 있다. 네슬레는 기업 브랜드뿐 아니라 어미새와 새끼새로 디자인된 새들과 둥지를 통해 안전, 모성애, 자연, 가족 등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다. 초기 유아식을 취급하는 네슬레에게 이러한 이미지는 가장 적절했으며 또한 기업 이념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네슬레에게 최고의 고객이자 첫 번째 고객은 ‘미숙아’였다. 어머니의 모유나 그를 대체하던 제품조차 견뎌내지 못해 의사들이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미숙아들은 아이들을 살려냈다. 이렇게 2, 3년 만에 신생아들을 살려내며 네슬레의 제품은 유럽 전역을 넘어 미국에서도 병당 50센트에 팔려나갔다.
‘앵글로-스위스연유회사’, ‘네슬레’ 두 기업으로 출발
네슬레는 1866년 스위스에 세워진 2개의 기업으로 출발했다. 미국 출신의 찰스 A. 페이지와 조지 페이지 형제가 스위스 샴에 세운 ‘앵글로-스위스(Anglo-Swiss)연유회사’이며, 한 회사는 앙리 네슬레가 같은 해 9월 근처 브베에 세운 네슬레로서, 이 두 회사는 우유를 주원료로 한 이유식을 개발·판매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두 회사는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유럽과 미국 전역으로 진출했다.
그러다 두 회사는 1905년 ‘네슬레앵글로스위스연유회사’라는 이름으로 합병해 20세기를 맞이했다. 이후 1947년 또 한 번 식품업체인 마기와 모회사인 알리멘타나를 합병해 1977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900년대 초기까지 회사는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에서 공장을 운영했으며, 1904년에는 네슬레가 스위스의 ‘General Chocolate’ 회사와 계약을 체결해 초콜릿을 새로운 식품군에 추가했다. 1907년에는 호주에 적을 두고 본격적으로 제조업을 시작했으며, 싱가포르, 홍콩, 봄베이에 창고를 세워 아시아 시장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대부분의 생산시설이 유럽에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생산이 중단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원료를 구입하거나 제품을 판매하는 것도 어려워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전시 상황은 유제품의 수요자를 폭발시켰으나 대부분은 정부 계약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에 네슬레는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공장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약 40여개의 미국 공장이 네슬레의 소유가 되어 네슬레의 생산량은 1914년 이후 두 배를 넘기게 됐다.
그렇다고 전쟁과 함께 네슬레의 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21년 네슬레는 원료가격 상승과 경제 사정 악화, 환율 하락 등으로 첫 번째 손실을 기록하며 절망적인 상황과 대면하게 된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한 네슬레 운영진은 스위스의 금융전문가 ‘루이스 데이플’을 초빙, 그에게 회사 상황을 진단케 해 판매와 생산이 일치할 수 있도록 공장 가동을 합리화시켜 회사의 부채를 줄여나갔다.
이후 네슬레는 맥아로 된 우유 ‘마일로’, 유아를 위한 가루로 된 버터우유 등 신제품들을 안정적으로 출시했고 1938년 마침내 네슬레의 대표 브랜드 ‘네스카페’를 출시했다. 8년간의 연구 끝에 녹는 가루 인스턴트커피를 만들어내 커피를 마시는 습관에 혁명을 일으킨 네스카페는 출시되자마자 첫해 2,0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성공했고, 이는 곧 ‘네스티’의 성공으로도 이어졌다.
세계대전 참전한 미군의 주음료 되면서 인지도 상승
하지만 전쟁은 네슬레의 성공가도에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네슬레의 이익은 1년 만에 2,000만 달러에서 600만 달러로 곤두박질쳤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럽 내에서 스위스마저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렇다보니 네슬레로도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네슬레는 다수의 직원들을 미국 북동부의 코네티컷주 스탬포드에 있는 행정사무실로 전근시켰으며, 공장들은 유럽과 아시아를 떠나 라틴 아메리카 등 개발도상국에 세웠다.
위기가 기회를 불러온 것일까. 세계대전에 미군이 참전하면서 네스카페가 유럽과 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의 주 음료가 되면서 네스카페의 인지도가 상승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전쟁이 끝날 때쯤 네슬레 경영진들은 자신들이 세계 커피의 관심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점차적으로 회사를 점점 더 성장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네슬레는 역동의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원하는 많은 소비자들의 욕구에 부합하기 위해 네슬레는 수십 개의 신제품을 출시했고 외부 회사와도 합병을 하는 등 다각화 정책을 선택했다. 1947년에는 메기 조미료와 수프 제조업자인 알리멘타나 S.A와 합병해 네슬레 알리멘타나 회사가 됐으며, 1950년에는 보존식품과 캔식품 제조업체인 크로스&블랙웰(Crosse&Blackwell)을 인수, 1963년에는 냉동식품 회사 핀더스(Findus), 1971년에는 과일주스 회사 리비스(Libby’s), 1973년에는 냉동식품 회사 스토우퍼즈(Stouffer’s)를 인수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네슬레는 네스카페의 수직성장으로 1950년∼1959년 사이 인스턴트커피 판매가 3배 가까이 성장했으며, 1960년∼1974년에는 이것이 다시 4배로 껑충 뛰었다.
식품산업에서 성공 거두자 합병으로 사업 다각화
식품산업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네슬레 경영진들은 사업을 보다 다각화하기로 했으며, 그 대상은 다름 아닌 ‘로레알’이었다. 1974년 네슬레는 세계 화장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로레알과 계약 후 주요 주주가 되었고 이후 네슬레의 위치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네슬레는 전략적인 합병을 계속 추진했다. 제약과 눈 관련 상품을 제조하는 업체인 Alcon 연구소와 합병해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재정상황을 향상시키는 것과 합병 추진에 집중했다. 내실을 기하기 위해 비전략적이거나 무익한 비즈니스를 정리하고, 논쟁의 중심에 선 제3세계에서의 유아분유 마케팅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다. 이 문제로 네슬레는 특정 종교집단의 불매운동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1996년대부터는 보다 본격적으로 합병이 이루어졌다. 1997년 미네랄워터 사업과 관련, 이탈리아 산 펠레 그리노(San pelle grino)와 합병하게 됐으며, 1998년에는 스필러즈(Spillers)와 합병, 1999년에는 고부가 상품인 냉동식품에 집중하기 위해 핀더스 브랜드를 매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002년에는 랠스톤 퓨리나(Ralston Purina)와 합병하는 등 점점 몸집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펫케어 사업에서 네슬레 퓨리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또한 같은 해 ‘페리에 비텔(Perrier Vittel)’이라 불리던 네슬레의 워터비즈니스는 ‘네슬레 워터’로 이름을 변경, 폭발적인 성장률을 자랑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단순한 식품기업이던 네슬레는 연구개발(R&D)을 기초로 하는 영양·건강·웰빙 회사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다. 7월에는 미국 Dreyer’s와 합병했고 8월에는 Chef America. Inc를 26억 달러에 매수했다. 이는 냉동식품 산업의 성공적인 미국진출의 기반을 닦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006~2007년에는 제약사 노바티스에서 병원 영양식 부문인 ‘메디컬 뉴트리션’과 영유아식품 브랜드 ‘거버’를 차례로 사들였다.
피터 브라벡 회장은 또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면서 “성장을 멈추면 쇠퇴하게 된다”는 경영철학을 항상 강조하고 있다.
영양, 물, 농촌 발전 방안 장려하는 ‘CSV 어워드’ 제정
네슬레는 2009년 4월27일 뉴욕에서 ‘Creating Shared Value(CSV)’ 포럼을 개최하고 영양, 물, 농촌 개발 등 세 가지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새롭게 발표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전 세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영양, 건강, 웰니스 관련 교육 기회를 보다 확대하고, 아프리카에 R&D센터를 설립하며, 영양, 물, 농촌 개발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 방안을 장려하는 네슬레 CSV 어워드를 제정하는 등 구체적인 실행안을 담고 있다.
오는 2011년 말까지 네슬레는 ‘글로벌 어린이 건강 프로그램 ’을 통해 영양 및 체육 교육을 지원하고 있는 기존 국가 수를 두 배로 늘려 100개국 이상에서 관련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며, 아프리카 농촌 개발을 위해 코트디부아르 아비장(Abidjan) 지역에 연구개발 센터를 설립, 옥수수, 커피, 코코아 등의 아프리카 농산물의 생산성을 높이고 식품 안전을 증대하는 연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라고 밝혔다.
또한 네슬레는 영양부족, 수질정화, 농촌개발 촉진을 위한 창의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개인 및 비정부 단체, 중소기업 등을 2년에 한번 선정해 최고 50만 프랑을 지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네슬레의 기본 비즈니스 전략인 영양, 건강, 웰니스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일반 대중을 위해 더 좋은 영양과 물, 식품을 생산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네슬레의 사업 운영에 핵심적인 요소이며, 주주가치와 일반 대중 및 지역사회의 가치는 이러한 측면에서 근본적인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피터 브라벡 레트마테 회장은 “장기적인 성공을 위해서 기업은 주주와 일반 대중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훌륭한 공통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네슬레는 이를 ‘공유 가치 창조(CSV)’라고 부르며, 네슬레의 모든 사업에서 근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CEO인 파울 불케 역시 “물 절약, 영양 개선, 농촌개발 지원 등은 세상을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활동인 동시에 네슬레의 경영 전략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며 “네슬레의 새로운 사회공헌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뿐 아니라 영양, 건강 및 웰니스의 세계적인 선두주자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덧붙였다.
40년 넘게 오로지 한 우물, 여전히 건재한 네슬레맨
2008년 회장으로 취임한 피터 브라벡 레트마테(Peter Brabeak Letmathe) 회장은 오는 2012년까지 네슬레를 책임지게 된다. 네슬레는 정년인 72세까지 회장에 재선출 될 수 있어 그가 지금의 입지를 이어나간다면 향후 몇 년을 더 네슬레에서 회장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
1968년 네슬레에 입사한 후 오로지 네슬레라는 우물만 팠다. 입사초기에는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힘들었을 법도 한데 그는 그 때를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아이스크림 팔던 신입사원은 그렇게 40년 넘게 한 우물만 파서 결국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지켜왔던 CEO의 자리는 후임인 파울 불케(Paul Bulcke)에게 넘겨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한 네슬레맨으로 직원들과 함께 하고 있다.
네슬레의 성장을 주도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브레벡 회장은 1970년대부터는 남미지역에서 세일즈 매니저, 마케팅 디렉터 등을 거치며 시장 상황이 변화하는데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감각을 키웠으며,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법인 CEO로 근무할 때는 경제위기가 불어 닥쳐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회사의 성장을 이끌기도 했다.
현재 브레벡 회장은 네슬레 회장직뿐 아니라 크레디트스위스와 네슬레가 2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로레알의 부회장직도 겸임하고 있다.
설립 당시부터 네슬레는 사업을 국제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식품산업이 지역사회의 식생활 습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 이러한 이유로 네슬레는 사업 초기부터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항상 존중해 왔다. 네슬레는 네슬레가 운영되고 있는 곳의 문화와 전통에 가능한 한 많이 융화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물론 네슬레의 강한 직업윤리, ▲청렴성, 정직성 그리고 품질에 대한 약속 ▲상호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업무처리 방법 ▲사업에 대한 독단적인 접근 보다는 보다 실용적인 접근 ▲회사의 성과와 명성에 기여한다는 자부심 등의 가치를 지역사회 환경에 뿌리내리도록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네스카페, 거버,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생수 페리에 등. 이는 모두 네슬레 제품이다. 이 밖에도 네슬레는 무려 6,000여 종의 브랜드를 가지고 전 세계 시장에서 매일 10억 개 이상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네슬레에게 시장은 이미 세계이며, 고객은 이미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