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13년 만에 다시 사형제도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지난 2월25일 광주고등법원이 전남 보성 앞바다에서 남녀 여행객 4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70대 어부 오모씨의 신청을 받아들여 2008년 9월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것과 관련, 5(합헌):4(위헌)로 합헌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합헌 결정에 대해 “사형제도는 현행 헌법이 예상하고 있는 형벌의 한 종류로 생명권 제한에 있어 헌법상의 한계를 일탈했다고 할 수 없으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한 헌법 조항에도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1996년 11월 합헌 결정에 이어 이번에도 합헌
9명의 재판관 중 이강국, 이공현, 민형기, 이동흡, 송두환 재판관은 합헌에 손을 들어줬으며 김희옥, 목영준, 김종대 재판관은 사형제도가 생명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조대현 재판관은 일부 위헌 의견을 냈다. 하지만 합헌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한 재판관 중 2명은 사형제에 대한 개선을 권고해 사실상 폐지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헌재는 지난 1996년 11월에도 사형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재판관 7(합헌):2(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한 바 있다. 현재까지 사형제 폐지를 요구하는 일반인의 헌법소원 청구는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 제기된 바 있지만 법원이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위헌 여부 판단까지 이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해 10월11일 열린 법무부 국정감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949년 7월14일 살인죄로 사형을 집행한 이래 1997년 12월30일까지 920명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총 57명의 사형수가 있지만 1997년 12월 30일 전국 교도소별로 23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이래 10년 이상 집행하지 않아 국제앰네스티의 규정에 따라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헌재가 사형제 합헌 결정을 내리자 국제앰네스티는 즉각적으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깊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헌재는 사형이 헌법에서 보장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국제앰네스티 아시아·태평양국 로젠 라이프 부국장은 “한국에서의 이러한 결정은 큰 퇴보이며, 10년 이상 사형집행 없이 사형제도 폐지를 향해 가던 흐름을 역행해가는 것”이라고 표명했다. “오늘날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이 극단적인 형벌인 사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으며, 70% 이상의 국가들이 사형집행을 중단하고 있으며, 사형제도를 폐지했다”고 밝힌 앰네스티는 “대한민국이 사실상의 사형폐지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나아가 사형제도를 완전히 폐지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로젠 라이프 부국장은 “더 이상의 퇴보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에 심각한 손상만을 입힐 뿐이다. 경제 강국인 한국은 모든 사람의 생명권을 보호하는데 있어서도 앞장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0월26일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 4대 종단 지도자들이 사형제 폐지를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 18대 국회에서 사형폐지특별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권오성 총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 한국 천주교의 공식 대표 기구인 주교회의의 의장 강우일 주교, 원불교 교정원장 이성택 교무가 동참한 공동성명을 통해 4대 종단은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박탈하는 ‘사형’을 ‘제도적 살인’으로 규정한다”면서 그 어떠한 경우라도 가장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사형을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범죄를 막기 위한 사회 전반의 노력 역시 필요하지만 사형처럼 극단적인 형벌은 그 역할을 할 수가 없다면서 강력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도 진정한 속죄와 양심의 재생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4대 종단은 “정부는 더 이상 사형집행 재개 등을 언급하지 말고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프랑스의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 프랑스의 사형제도가 폐지됐던 것처럼 사형제도 폐지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법무부, 청송교도소 사형장 설치·보호감호제도 검토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끊이지 않는 강력범죄에 대해 더욱 엄중하게 대처하겠다는 방침이다.
지난 3월16일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흉악범들이 수감돼 있는 청송교도소를 방문해 청송교도소를 보다 엄중하고 철저하게 관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강호순 사건, 조두순 사건 등으로 깊어진 국민들의 불안이 채 해소되기도 전에 김길태 사건이 발생, 그 불안이 더욱 가중되었다고 말한 이 장관은 청송교도소를 흉악범을 특별 관리하는 중경비교도소로 운영, 관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장관의 방문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청송교도소에 사형집행장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것. 현재 우리나라에는 광주교도소, 대전교도소, 대구교도소, 서울구치소, 부산구치소에 사형 집행장이 설치돼 있지만 정작 흉악범들이 많이 수용돼 있는 청송교도소에는 사형집행장이 마련돼 있지 않다.
또한 이 장관은 보호감호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염두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호감호는 상습법 등 재범의 위험성이 있는 자에 대해 보호감호시설에 수용해 감호·교화하고, 사회복귀에 필요한 직업훈련과 근로를 부과하는 제도로, 지난 1980년에 사회보호법 제정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됐다가 2005년에 폐지됐다.
이번에 새롭게 도입이 추진되는 보호감호제도는 기존의 ‘이중형벌’ 논란을 없애기 위해 형법상 상습범과 누범 가중 규정을 폐지하는 대신 실제 형과 보호감호 기간을 적절히 분배하여 죄 값을 다 받고 사회에 복귀하기 이전에 보호감호를 통해 사회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집중 훈련을 더 받도록 하는 것이며, 형사법 개정 특위의 논의를 통해 형법 개정안을 마련해 올해 12월까지 국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예정하고 있다.
“사형집행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근본대책 마련해야
한편, 이 장관의 청송교도소 방문과 발언에 대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사형제도가 범죄를 억제하는데 효력이 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악범죄 사건에 대해 정부는 1년 전과 동일하게 ‘사형집행’을 해결책처럼 언급하고 있다. 정부는 흉악범죄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범죄예방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유엔가입국 192개국 중 25개국만이 사형을 집행하고 있고, 그 숫자도 점점 줄고 있는 국제적 추세에 한국의 사형집행시설설치는 국제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임이 틀림없다”면서 다시 한 번 정부를 비판했다.
시민단체들도 “정부는 사형집행 재개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면서 일어섰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형폐지범종교연합, 참여연대, 한국사형제폐지운동협의회 등으로 구성된 ‘사형집행 재개를 반대하는 종교시민인권학술단체(이하 시민단체)’ 일동은 3월24일 “법무부 장관이 청송교도소를 방문해 보호감호제도의 부활과 사형장의 신설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고 사형집행 재개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며 개탄을 금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강력범죄가 발생했을 때 정부가 할 일은 범죄가 야기된 원인을 찾아 개선하고 교정교화를 통한 재범방지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깊이 검토하는 일”이라고 말한 시민단체는 그러나 이 같은 근본적 처방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사형집행재개를 거론하는 것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대응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어 시민단체는 “사형폐지의 당위성을 이미 수십 차례의 토론회와 성명서를 통해 밝힌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사형집행 재개를 추진하는 정부의 그 어떤 시도도 강력히 반대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다”고 덧붙였다.
또한 “강력범죄 발생 직후 형성된 일시적 사형찬성 여론을 근거로 사형제도를 정당화 하려 하는 정부의 태도에도 찬성할 수 없다. 모든 형사정책은 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치국가의 원칙에 따라 이성을 가지고 냉정하게 집행돼야 한다”고 밝힌 시민단체는 “헌재의 합헌결정은 결코 사형집행을 용인하거나 사형제도 존치의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다. 9명의 헌법재판관 중 4명이 사형제도가 위헌이라 결정하였고 합헌의견을 낸 재판관들 중에서도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회가 사형제도의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한 것을 정부와 국회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시민단체는 강력범죄에 대한 국민의 불안함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찰과 검찰이 제대로 된 수사와 검거를 하지 못한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형집행을 거론해 정부로 쏟아지는 비난을 피해보려는 것은 아닌지 반문했다. 시민단체는 “1997년 97.4%였던 강력범죄 검거율은 2008년엔 89.2%까지 떨어졌다”면서 정부와 국회는 범죄예방과 국민보호를 위한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하기 바란다고 전했다.
김형오 의장 “생명권 존중국가 명예 잃지 말아야”
김형오 국회의장도 그동안 줄곧 지켜온 사형제 폐지에 대한 소신을 다시 한 번 밝히며 ‘사형제 폐지’에 손을 들었다. 3월17일 김 의장은 “김길태 사건이후 천인이 공노할 흉악범은 사형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감정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과연 사형을 시키는 것만이 대안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이성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생명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이고 존엄한 천부적 권리이며, 그 권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아무도 박탈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권한도 없으며, 공권력에 의해 이를 박탈하는 구시대적 제도가 21세기 문명화된 이 시대에서조차 그대로 계속된다는 것을 반대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김 의장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외교관계 등을 보더라도 지난 15년간 사형집행을 유보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사형폐지국의 반열에 들어간 우리나라가 이제 와서 사형을 다시 집행해 생명권 존중국가로서의 명예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형제를 실시하기 전에 범죄자의 신원공개라든지, 전자발찌, 종신형 등 기본권 제약을 통해 중범죄자를 사회에서 유리, 격리 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김 의장은 강조했다.
지난해 사형제도 폐지가 헌법 및 국제인권규약에 부합한다는 의견을 헌재에 제출한 바 있는 국가인원위원회 역시 “사형제도는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 즉 모든 이에게 살인을 금지하면서 국가가 일정한 공익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명목 아래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살인행위를 한다는 윤리적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훌륭한 사법제도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재판이 신이 아닌 사람의 영역에 속하는 이상 오판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힌 국가인권위는 “국제적으로도 이제 사형제 폐지는 시대의 대세”라면서 국제인권조약인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6조는 생명권보장을 규정하면서 사형제폐지가 바람직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인권위는 지난 2005년 4월 국회의장에게 “사형제도는 생명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으며, 2006년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권고에서도 사형제를 폐지할 것을 포함토록 한 바 있다.
또한 2007년 유엔총회에서 사형제도 모라토리움(유예)에 관한 결의안이 표결에 붙여질 때 정부가 이 결의안에 찬성할 것을 촉구했으며, 2009년 2월 당시 사회일각에서 제기되던 사형집행 주장에 대해 우려하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2009년 7월에는 헌법재판소에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헌법 및 국제인권규약에 부합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법무부의 사형집행 및 보호감호제도에 관해서도 국가인권위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지난해 유럽에서 사형집행 無, 미주도 미국이 유일
국제앰네스티가 3월30일 발표한 ‘2009년 사형선고와 사형집행’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8개국에서 최고 714명의 사람들이 처형됐으며, 56개국에서 최소 2,001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결과는 사형과 관련한 정보를 국가기밀로 취급하는 중국의 사형집행 건수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국제앰네스티의 연구 결과, 아직 사형을 집행하는 국가는 일반적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중국 이외에 사형에 관해 기록을 갖고 있는 국가들은 이란(최소 388명 처형), 이라크(최소 120명 처형), 사우디아라비아(최소 69명 처형), 미국(52명 처형) 순이다.
특히 중국, 이란, 수단의 경우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하거나 반대자들을 침묵시키고 정치적 의제를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형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통계들을 살펴보면 2009년 한 해 동안 세계가 사형제도의 폐지를 향해서 전진했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토고와 부룬디가 모든 범죄에 대해서 사형을 폐지하면서 자국의 법률에서 사형을 완전히 폐기한 국가의 수가 95개로 늘어났다. 또한 2009년은 국제앰네스티가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유럽에서 사형집행이 없었던 해였다. 이제 유럽 지역에서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는 벨라루스 뿐이다. 미주대륙을 통틀어서 사형을 집행한 유일한 국가는 미국뿐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을 제외한 방글라데시, 일본, 북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단 7개의 국가만이 사형을 집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려진 사형집행 건수는 26건이다.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몽골, 파키스탄에서도 지난 한 해 동안은 사형집행이 없었다.
클라우디오 코르돈 임시 사무총장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더 적은 수의 국가들이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사형제도 없는 세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지만 그때까지는 모든 사형집행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