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세력의 재집권 야욕으로 얼룩진 역사
상태바
군부세력의 재집권 야욕으로 얼룩진 역사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0.05.12 1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육과 폭력이 난무한 잔혹한 5월,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전두환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을 곤고히 하고 반대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일환으로 계엄령을 선포·확대한다. 이에 따라 7공수여단은 18일 새벽 1시경 33대대를 전남대에, 35대대를 조선대에 각각 배치한다. 이날 아침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교문에서 계엄군이 등교하는 학생들을 막았고, 계엄군은 학생들이 항의하자 메가폰을 통해 해산을 종용하다 학생들에게 돌진해 곤봉을 휘둘렀다.
이튿날인 5월19일 시위대가 5,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시민·학생들의 시위가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거세지자 그 진압형태가 더욱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변해갔다.
그러자 공수부대원이 1,000여 명이 트럭 30여 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해 작전명 ‘화려한 휴가’를 펼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는 유혈진압작전이었다. 5월20일 밤 11시쯤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의 첫 발포가 일어난 데 이어 다음날인 5월21일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하자 시민들이 무장항쟁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고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한다.
5월22일, 도청과 금남로에 시민들은 집결하였고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은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하여 7개 항의 수습 안을 전달했다.
5.18민중항쟁은 결국 5월27일 오전, 계엄군이 광주 전 지역을 폐쇄하고 총, 칼을 앞세워 도청과 시내전역을 장악한 후에야 마침내 피로 물든 역사의 시간은 마침표를 찍었다. 이날 새벽 4시 기관총과 M-16, 수류탄을 동원한 계엄군의 대대적인 도청탈환 작전이, 개시 1시간 30분 만에 완료되면서 열흘에 걸쳐 전개된 1980년 5월의 항쟁은 참담한 최후를 맞이했다. 신군부는 이 사건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했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 191(무연고자 12기 포함)명, 행불자 64명, 상이·연행, 구금자가 3,642명 등 총 4,362명(피해자별 총괄집계 기준)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여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당시 분출되고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그 제물이 광주였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곳이며 야당의 정적 중에서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 전라도 광주였던 것이다.
5·18민중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희생의 피를 흘려야 했던 80년 5월 광주. 빛고을 광주의 80년 5월은 살육과 폭력이 난무한 참으로 참혹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5월의 함성과 정신은 국민의 가슴에 남아 흐르며, 사회전반에서 건강한 힘으로 계승되고 있다.

1948년 14일, 이스라엘 2,000년의 유랑 끝에 공화국 수립
기원전 1900년 경 이스라엘 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였다. 기원전 11세기에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했으며, 다윗왕과 솔로몬왕 때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솔로몬왕이 죽자 기원전 922년에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먼저 이스라엘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기원전 722년), 약 1세기 후에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기원전 586년)된 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보호 하에 유대왕국이 다시 수립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저항했기 때문에 탄압받고 서기 70년 유대인의 세계유랑이 시작되었다. 특히 유럽의 유대인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다.
현대 이스라엘은 19세기 시온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탈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 유대인들이 2,000년의 유랑 끝에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다. UN총회는 여섯 달 전인 1947년 11월 유대인 국가 건설을 위한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승인했었다.
이스라엘 건국에는 영국의 도움이 컸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팔레스타인의 영국군 주둔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전세계 유대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밸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벨푸어 선언은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담았다. 벨푸어 선언 이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면서 아랍인들과의 대립과 게릴라전이 계속됐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언 이후에는 아랍연맹국 군대가 팔레스타인에 침입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개시됐다. 유대인들은 이르군과 하가나 등 민병대를 조직하여 아랍인들의 공격을 방어하였고, 서방과 미국으로부터의 무기지원으로 아랍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2차 중동전쟁(시나이전쟁)과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스라엘에 복수를 다짐하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시 중동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1973년 10월6일, 드디어 이집트는 유대인들의 속죄일 욤키푸르 당일 이스라엘에 기습을 감행하기에 이르렀고 이스라엘은 멸망위기에 놓였다.(4차 중동전쟁) 하지만 이스라엘은 비교적 약한 시리아군이 포진한 곳을 공습하면서 전세를 역전하기에 이르렀으며 끝내 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어냈다. 장기간에 걸친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결과, 1993년에 PLO와 자치에 합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가자 지구와 웨스트뱅크에 세워졌으나 현재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1945년 7일 독일, 연합군에 항복 선언
1945년 5월7일 새벽 2시41분, 히틀러의 자살로 후계자가 된 데니츠 독일 제독이 군대를 연합군 점령지역으로 옮기고 항복을 선언한다. 이틀 뒤인 5월9일 항복이 정식 조인되면서 유럽에서의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된다. 5월23일에는 데니츠 정부의 각료가 모두 연합군에 체포됨으로써 히틀러가 이끈 독일 제3제국은 완전히 소멸됐다.
역사적인 항복 조인식은 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중심 도시인 랑스에서 열렸다.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사령관 대신, 월터 버델 스미스 참모차장이 참석했으며 프랑스, 연합국 대표들도 참석했다. 독일 외상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 백작은 오전 8시9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독일국민들에게 항복소식을 알렸다.
독일의 항복에는 4월30일 히틀러의 자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항복 조인식과 동시에 종전을 환영하는 뉴욕과 런던, 파리 등의 시민들은 자동차 경적을 둘려대며 크게 환호했다. 5년 8개월 6일 동안 지속되던 유접지역의 전쟁이 이날로 끝을 맺었다. 전쟁기간 동안 독인은 285만 명의 군인과 50만 명의 민간인을 잃었고 연합군도 이와 비슷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일본은 동맹국 독일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어갔다. 같은 해 8월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일본도 마침내 연합국에 백기를 들었고 이로써 2차대전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항복문서에 독일 대표로 서명한 독일군 장성 알프레드 요들은 전쟁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전범 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1948년 31일 제헌국회 개원
1948년 오늘, 한국 헌정사상 최초로 구성된 의회인 ‘제헌국회’가 개원했다.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 김동원을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8.15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10일 총선거를 실시해 구성됐다. 즉, 한국 제1대 국회로서 그 회기는 1948년 5월31일부터 동년 12월18일까지 총 203일간이었다. ‘제헌의회’라고도 한다.
5·10 총선거는 UN의 결의에 따라 선거가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만 실시되어 총 200의석 가운데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전국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제주도만은 이른바 4·3사태 발생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정당별 분포도를 보면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승만 지지파)가 54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였고,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당 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이 2석, 그 밖이 95석(무소속 84석 포함)이었다. 이때의 투표율은 75% 정도였다. 초대 국회는 1950년 5월30일 임기만료일까지 헌법과 정부조직법, 지방자치법 등 149건의 신법을 제정해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초대 국회는 7월12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20일에 이승만과 이시영을 제1공화정의 정·부통령에 선출하였다. 초대 국회에서 제정, 통과시킨 주요 법안은 정부조직법을 비롯하여, 친일파 처벌을 목적으로 한 반민족행위처벌법, 농가 양곡의 정부 매입을 의무화한 양곡매입법안, 사상범 단속을 위한 국가보안법안 및 지방행정조직법 등 20여 건이다. 이 외에 결의안 12건과 건의안 12건, 중요 동의안 22건 및 각종 청원 안건 9개 등을 처리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얼마 가지 않아 이승만은 한민당(韓民黨)을 배척하고 이승만을 따르는 국민회(國民會) 소속 50여 명이 이정회(以正會)를 구성함으로써 여당 입장에 섰으며, 한국민주당은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개편되어 야당의 입장으로 자리바꿈을 하였다.

1929년 16일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아카데미상 시상식 텔레비전 시상식 프로그램 중 가장 대형이고 텔레비전의 최대 이벤트중 하나로 1929년 5월16일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국 허리우드 루스벨트호텔에서 감독과 배우 등 영화인 2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당시에의 아카데미상은 고작 20여 명의 위원회가 12개 부문의 수상작을 선출, 1회 작품상에 ‘일출(Sunrise: A Song of Two Humans)’이 선정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인 1932년에는 백 명의 위원들이 선출에 임하는 대규모 아카데미로 성장했다. 처음 15년간은 호텔에서 거행되다가 1944년부터 극장 상영에 이익이 되도록 극장 무대로 옮겼고, 1969년부터는 LA 카운티 뮤직 센터 ‘도로시 챈들러 파빌론’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988년부터는 슈라인 오디토리움(Shrine Civic Auditorium)과 번갈아가며 진행되다가 2002년에 헐리우드에 코닥 극장(Kodak Theatre)이 아카데미 전용 시상식장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1953년부터 NBC-TV에서 최초로 방송 전파를 탔다. 수상자들이 받은 높이 34㎝, 무게 3.85㎏의 나체조각상은 청동으로 만들어 도금한 것으로 나체상 아래 보이는 5개의 필름통은 배우, 감독, 제작, 기술, 각본 등 5개 분야를 상징한다. 이 인체조각상의 이름이 ‘오스카(Oscar)’로 알려지면서 아카데미상은 ‘오스카상’으로도 널리 불리게 됐다. 오스카 쇼는 긴장·매력·생방송의 예측 불가능성 등의 소구력을 가지고 있고, 텔레비전에 출현하는 스타의 의상과 행동은 잡지의 기사거리가 될 정도이다. 텔레비전 에미(Emmy)상 시상식도 오스카 쇼와 비교할 만하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질과 다양성에 있어 뒤지고 종류가 너무 많아 긴장감도 약하다. 오스카 시상식 진행자는 해마다 바뀌지만 코미디언 보브 호프(Bob Hope)가 15번 이상 진행을 맡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요즘은 16개 부분에서 수상자를 선정, 특히 작품, 감독, 남우주연, 여우주연, 각본상 등 이른바 ‘빅5’는 아카데미상의 가장 큰 영예의 상으로 꼽힌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