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한 다큐멘터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경계도시2」. 2002년 개봉되었던 「경계도시」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다. 「경계도시2」의 감독은 입국 당시의 송 교수를 카메라에 담으며, 1편에 이은 후일담 정도로 다큐멘터리를 찍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상황은 그 스펙터클한 영화보다도 더 다이내믹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송 교수가 37년 만에 고국 땅을 밟자마자 대한민국에는 광풍이 일었다. 스스로 ‘경계인’이라 규정하며 남과 북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내놓던 양심적인 학자, 진보적인 학자 송두율은 어느새 ‘거물간첩’이 되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론은 들끓었고 그를 둘러싼 논란은 식을 줄을 몰랐다. 소환, 조사, 구속도 숨 쉴 틈 없이 긴박하게 진행됐다.
‘경계인’ 자처한 그, ‘반정부 인사’가 되어 돌아오다
송 교수는 이에 앞서 이미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한 바 있다. 1991년 서울대학교 초빙교수로 초청되었으나 무산되었고, 2000년 제5회 ‘늘봄통일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귀국하려 했으나 또 다시 국가정보원의 제지로 입국이 무산되었다. 2002년에는 “공항에서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는 입국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지만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날을 세우고 있는 관계당국의 반응에 그를 초청하려던 기관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결국 그의 초청을 취소하고야 말았다.
그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반정부 인사’이기 때문이었다. 독일 유학시절인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반정부 지식인과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이 점점 강화되자 그는 1974년 재독 반유신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 결성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을 맡게 된다. 이렇게 유신 독재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다가 박정희 정부에 의해 반정부 인사로 분류되어 입국이 금지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송 교수는 1973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여섯 차례에 걸쳐 ‘남북해외학자통일학술회의’를 성사시키는 등 남북 화해를 위해 노력해왔다.
1967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72년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트겐 하버마스 교수의 지도 아래 철학박스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82년 사회학 분야에서도 교수 자격을 취득한 송 교수는 1972년부터 뮌스터대학, 베를린자유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 미국 롱아일랜드대학, 베를린 훔볼트대학 등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해 왔다. 스스로 경계인이길 자처하는 그의 학문적 관심은 서구의 지성사를 조망하는 것은 물론 한반도의 민족적 현실, 즉 조국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이라는 주제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가 활발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고국에서의 그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져만 갔다. 국정원은 그를 대표적인 친북 지식인으로 분류해 조사대상으로 삼았으며,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입국을 준비할 때 국정원은 체포영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정보원은 그가 단순히 반정부 인사가 아니라 북한의 권력 서열 23위인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국 즉시 체포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오랫동안 밝혀왔다.
난무하는 의혹, 해명, 검찰조사 그리고 구속 수감
그리고 다시 2003년 9월. 유학길에 오른 지 37년 만에 그는 가족과 함께 고국의 땅을 밟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몸을 내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으로 귀국한 그는 하지만 귀국과 함께 강도 높은 국정원 조사를 받고 검찰에 구속되는 등 예상은 했으나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송 교수의 입국과 관련해 “송 씨는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암약해 온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서독에서 암약한 북한 대남 공작원”이라면서 국정원의 철저한 조사와 사법처리를 촉구했다.
정 의원은 또한 송 교수를 민주인사로 둔갑시켜 입국시키려는 정권의 속셈, 송 교수를 초청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실체와 배후, 국정원의 입장 등을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했다.
이후에도 정 의원은 송 교수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거듭 주장했다. 정 의원은 10월2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송씨는 간첩이고 금년 3월에도 평양에 갔다 왔으며 지난 9월9일에도 김정일에게 충성맹세문을 보냈다”면서 이 문건을 공개했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최병렬 의원도 송 교수 사건을 두고 ‘건국 이후 최고의 거물 간첩사건’이라며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최 의원은 “송 교수는 지금까지 18차례에 거쳐 입북했으며, 유럽 간첩의 총책으로 15만 달러에 이르는 공작금을 받고 활동했다”고 밝히며 이 사건은 국가 정체성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을 둘러싼 논란들이 점점 커지자 송 교수는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가족들과 함께 37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지만 벅찬 기쁨도 한순간, ‘양심적인 학자’에서 ‘거물간첩’으로까지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남북의 화해를 향한 디딤돌이 되어 보려했던 노력이 오늘의 상황 속에서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밝힌 송 교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논란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나갔다.
1973년 처음 북을 방문했으며, 첫 북한 방문 때 받았다는 ‘주체사상 교육’과 ‘노동당 입당’은 70년대 북한을 방문한 방문자들이 거치는 불가피한 통과의례였다는 것. 그 당시 행한 행동들은 30년이 지난 지금 거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로 남아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북한 권력서열 23위 김철수’라는 논란에 대해 송 교수는 정치국 후보위원을 수락하거나 활동한 바도 없고, 북측에서 후보위원으로 활동할 것으로 요구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도 행사장 명패에는 ‘송두율’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 ‘화해자로 살고자 하는 신념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 것에 대해 깊이 사죄한다고 밝힌 그는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실정법적인 처벌을 받을 사항이 있으면 감당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의 참여자가 되어 남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무죄’, ‘무죄’… 그러나 그는 이제 고국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둘러싸고 난무하는 의혹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경계인을 자처하던 송 교수는 점점 이데올로기를 강요받고 그를 두둔하던 진보 진영에서마저 그에게 국적포기 카드라도 내놓으라는 압박 아닌 압박을 받는다.
결국 송 교수는 2003년 10월14일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당을 탈당하며, 독일국적을 포기 하겠다”고 밝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정부 인사로 간주되어 번번이 입국마저 좌절되던 그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서겠다고 밝힌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균형감 있는 경계인으로 살기 위해 노동당에서 탈당하고자 한다. 의도했든 안 했든, 더는 구구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아울러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준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지키며 살 것을 분명히 말한다”라면서 경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편, 그를 초청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묶여 갖은 탄압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수많은 민주인사들은 국민들과 함께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향해 전진해 왔고 그 결과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자유로운 남북교류가 가능해졌다”면서 모두가 평화통일을 이야기 하는 지금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학자들의 교류를 반국가단체와의 회합·통신죄, 잠입·탈출죄로 처벌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송 교수의 무죄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광풍처럼 몰아치던 여론과 수차례에 걸친 검찰 조사, 그리고 구속까지, 짧은 시간 다시없을 경험을 하고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2004년 8월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로 돌아간 송 교수는 현재 뮌스터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2008년 대법원은 송 교수에게 적용된 대부분의 국가보안법상 공고사실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 2심의 결과를 확정했으며, 항소심에서 유죄가 인정됐던 독일 국적 취득 후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도 무죄 선고를 내렸다.
‘건국 이후 최고의 거물 간첩’으로 그를 몰아가던 대한민국 사회는 지금 그를 잊은 듯 조용하다. 그를 비난했던 이들도 두둔했던 이들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고요하다.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역사가 나의 무죄와 함께 국가보안법의 마지막 시간을 분명하게 기록하리라 믿는다”던 그의 말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