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종영한 SBS 드라마 ‘산부인과’는 저조한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연일 화제를 모았다.
특히 미혼모, 성병, 낙태 등 산부인과와 연계된 사회적 문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문제인식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산부인과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듯 첫 회부터 최근 논란에 휩싸인 낙태 문제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첫회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재벌가에 시집간 스타 아나운서 출신의 여성은 자신의 뱃속에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놀란 그녀는 다운증후군이 친정집 집안병력임이 공개될까 두려워 낙태를 요구했다. 또 다른 환자도 낙태를 원하긴 마찬가지. 결혼 7년차인 이 여성은 나이트에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후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남편의 아이인지, 내연남의 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태아의 혈액형 검사를 원했고, 담당의사가 이를 반대하자 여성은 “여성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말아 달라”며 낙태를 원했다. 순간 의사는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잃는다.
사실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와 같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될 경우, 혹은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거나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부족한 미혼모의 경우도 낙태를 잔인한 살인죄로 표현하는 것이 옳을까.
자기결정권의 자유 또는 타의 생명권 박탈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낙태’. 우리나라의 낙태 실태와 낙태 근절정책을 짚어보고, 실제 사례 등을 통하여 근본적인 낙태 해결책을 살펴보자.
찬반 논란에 가려진 무서운 진실
낙태는 아이를 임신한 여성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어미의 뱃속에서 강제 사살되어야 하는 아이에게도 몸과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여성의 자궁 안에서 자라는 태아가 자연스럽게 출산되기를 기다리는 일반 출산과는 달리 낙태는 인공적으로 유산시키는 인공 임신중절에 속한다. 낙태 시술시 주로 소파수술과 흡입법을 사용한다. 먼저 주로 임신 16주 이전에 많이 사용되는 소파수술의 경우 질을 통한 유산법으로 벌어진 자궁경부 사이로 끝이 둥근 갈고리 모양의 큐렛을 삽입해 태아를 긁어내는 시술법이다. 소파수술은 마취사고 및 출혈의 위험성이 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면 흡입법은 자궁경부를 확장시킨 후 진공청소기와 같은 튜브모양의 기다란 관을 넣어 아이의 신체와 태반을 빨아들인다. 방법들이 어찌나 끔찍하고 무서운지 시술을 담당하는 의사들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때론 이런 경우의 수도 발생한다. 낙태 수술 후 태아가 자궁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불완전유산이 발생하는 것. 이럴 땐 통증과 출혈이 동반되어 서둘러 재수술을 해야 한다. 만에 하나 그렇지 못한다면 여성의 생식기관을 손상시키는 것은 물론, 난치성 출혈과 골반 통증 등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강제로 자궁경부를 열면 손상이 되기 때문에 정작 임신을 원할 경우 자연 유산 가능성이 타 임산부들의 비해 커질 수 있다. 자궁 내부의 유착으로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소파수술 당시 자궁내막이 기계에 의해 긁히기 쉬운데, 이때 난 상처가 아물면서 자궁 내 조직이 유착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산모는 생리의 양이 급속이 줄어들고 생리통도 심해진다. 심할 경우 수술시 과다출혈로 식물인간 또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밖에도 자궁천공, 출혈, 경부열상, 감염증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정신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주로 신체적 고통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낙태는 정신적으로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낙태후증후군이 산모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 여성은 자신이 아이를 지웠다는 죄책감에 기분 컨트롤을 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엔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임신을 할까 두려워 의식적으로 성관계를 기피하여 원활한 남녀관계를 이어가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동료도 등지게 하는 낙태 천국
젊은 산부인과 의사들의 모임인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의사들이 불법 낙태 근절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프로라이프는 말 그대로 ‘생명 지지’였다. 지난 2월3일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불법 낙태 시술을 해준 병·의원 3곳을 검찰에 고발했다. 의사들이 의사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이번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단번에 이슈로 떠올랐다. 더불어 그 동안 우리사회 음지에서 암암리에 성행돼 오던 불법 낙태를 제도권 수면 위로 부상시키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심상덕 윤리위원장은 “입으로만 하는 캠페인은 더 이상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과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불법 낙태를 놔둬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도 일선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니 이런 강수를 쓰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면 우리는 더 이상 의사를 고발하지 않을 것이다”면서 같은 동료를 고발하게 된 배경을 토로했다. 그들이 고발한 이유는 동료들의 처벌을 원해서가 아니다. 사회의 경각심을 일으켜 불법 낙태 문화를 단절시키기 위함이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자문위원인 전재중 변호사는 “낙태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처벌로 연결된 적은 없었다”며 불법 낙태란 사실을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방조한 사회 전체를 비판했다. 실제로 지난해 낙태에 관한 고발사건 46건 중 기소된 것은 7번에 불과했다. 전재중 변호사는 “낙태와 관련돼 정식재판으로 간일은 없고, 모두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번 고발은 의사를 처벌하기 보다는 이를 방조한 보건복지가족부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전 변호사는 “그간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처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정식재판으로 간다면 복지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심상덕 윤리위원장은 여성단체들의 낙태는 여성의 ‘행복 추구권’에 속하는 자기 결정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밝혔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따로 대꾸할 말이 없다. 지난 20년 간 산부인과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낙태했다고 행복한 여성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 수많은 미혼모를 상담해봤는데, 낙태를 하려다 결국 출산을 선택한 여성들은 나중에는 아이를 낳기 잘했다고 오히려 감사해한다. 열이면 열, 후회하지 않는다”며 진정 여성의 행복추구권인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심 윤리원장은 “물론 당장 여성들이 불편해질 거다. 하지만 그들이 희생하면 그들의 자녀, 앞으로 임신할 수많은 여성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출산을 할 수 있다. 우리 부모님들도 우리에게 희생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낙태를 금지시킨다고 여성들이 죽는 건 아니다”라며 낙태 금지를 더욱 더 강력히 주장했다.
정부, 뒤 늦게 불법 낙태 근절에 나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것일까. 시종일관 침묵으로 버텨왔던 정부가 낙태공화국의 오명을 깨끗이 씻어내겠다는 일념 하에 불법 낙태 근절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신고를 받은 산부인과와 병원, 의사를 검찰에 고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불법 인공 임신중절 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계획은 정부가 인공 임신중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지난 2년 간 종교계, 여성계, 의료계 등 각 사회분야와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먼저 지난 3월1일 129콜센터에 불법낙태 신고센터를 개설했다. 이와 함께 올 상반기 중으로 129콜센터를 통하여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핫라인을 개설, 정보 제공과 기관으로 연계도 해줄 계획이다. 또 산부인과의 전문상담 및 교육 프로그램을 건강보험 급여화하기로 했으며, 열악한 환경의 산부인과 경영개선을 위해 분만수가도 현실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청소년 미혼모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24세에 이를 때까지 양육비와 의료비를 지급하기로 했다. 이 밖에도 1대 1매칭 방식으로 한 가구당 월 20만 원 한도에서 자산적립을 돕기로 결정 했다.
한편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정부의 대책에 의외로 반감을 나타냈다. ‘낙태 근절’이라는 동일한 주장을 외치던 터라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반응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프로라이프측은 “정부의 대책은 실효성이 없다”면서 과연 낙태 근절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 의심스럽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더 강력한 낙태관리시스템을 바탕으로 낙태를 쉽게 선택하는 사회 분위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산의 자유는 여성 몫, 여성 분노 넘어 슬픔
지난 3월5일 청계광장에서는 울분이 가득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성단체들은 지속적인 토론회와 캠패인을 통해 낙태권 보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고발조취와 복지부의 불법 낙태 근절 제도에 대해 “낙태시술 단속 강화는 여성을 궁지로 몰아넣는 일”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민우회 등 20여 개 여성·시민단체는 공동 성명서를 통해 “여성이 원하지 않는 임신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면서 “무조건 금지하기 보다는 낙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이다”고 단속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정춘숙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무조건 낙태를 하지 말라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낙태수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 여성 본인인 만큼 진지하고 종합적인 판단을 거친 후 낙태를 결정하도록 존중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역시 “피임과 임신, 출산, 낙태 등 몸에 관련된 모든 결정권은 몸의 주체인 여성에게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두나 활동가는 낙태 금지를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우는 동시에 선진국의 예를 비교하며 우리나라의 잘못된 낙태 제도를 꼬집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사회, 경제적인 사유의 낙태를 일정 부분 허용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입법화 과정을 통해서라도 낙태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이들의 주장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었다. 낙태의 배경에는 여성들이 성관계와 임신, 출산을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이중적인 성문화와 미비한 사회제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낙태를 선택해야 하는 여성들의 삶과 경험이 존재한다. 특히 불법 낙태를 법적으로 금지시킨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사회적 조건이 변하지 않는 이상 낙태는 우리 사회 그늘 어딘가에서 지속될 것이라며, 정부의 단속 강화 부작용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이 충분했다. 사회적 여건 개선 없이 처벌만 강화한다면 무면허 낙태, 해외 원정 낙태를 양산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한편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고발조취에 화가 난 것은 비단 여성단체들뿐만이 아니었다. 낙태를 둘러싼 의사들 간의 내홍이 깊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산부인과 개원의들의 대표 모임인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지난 9일 성명을 통해 “프로라이프 의사회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면 전문의로서 인성과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인공 임신중절을 줄이려는 목적 말고, 진짜 목적을 밝혀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퍼 부었다. 의사회는 이어 “의사는 사회적 합의에 도출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결정에 의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전문적 지식에 의거해 시술하는 행위자이지, 불법 낙태 논란의 중심에 있을 수 없다”면서 “상당수 회원들이 프로파이프 의사회의 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이 결코 순수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프로라이프 의사회 최안나 대변인은 “산부인과의사회는 불법 낙태수술 제보 내용을 알고도 이 회원들에 대한 징계는커녕 편을 나누어 감싸고만 있다”며 “낙태를 줄이자는 소수 의사들의 진심어린 마음에는 관심도 없고,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고 억울함을 이야기했다. 또 최 대변인은 “진정으로 산부인과 의사들이 대표단체라면 불법을 저지른 회원들부터 조사하고, 그에 상응한 조취를 취해야 한다”면서 혹시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폄훼라면 산부인과 대표단체로서 자격 상실이라고 비난했다.
속 타는 여성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아이 아빠는 저와 아이를 피해 도망갔어요. 그런데도 제가 이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 하는게 맞는 건가요. 대체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 모르겠어요.” 이제 막 20살이 된 현희(가명)는 또래 친구들처럼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이성친구와의 하룻밤 실수는 임신으로 이어졌고, 현희는 올 9월 출산예정일을 앞두고 있다. 이번 달이 임신 3개월 째.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하면 사실상 낙태를 하기 힘들어진다. 그런데도 정부는 낙태를 금지 했다.
“세상에 낙태를 쉽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물론 제 잘못으로 이렇게 된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피치 못하니까 낙태를 결심하는 거죠. 그런데 공개적으로 금지시키다니 결국 음지에서 낙태하라는 것 밖에 안 되는 소리잖아요.” 앞날이 걱정이라는 현희는 임산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낙태 수술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마친 정식 부부라도 준비되지 않은 임신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올해 결혼 2년차인 신지선(32,가명) 가정부는 지금도 눈만 감으면 끔찍했던 낙태 수술 당시의 일이 생생히 떠오른다.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던 중 계획되지 않은 임신소식에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먼저 들었다. 게다가 남편은 실직상태였다. “당시 남편이 회사에서 해고 조취를 받고 수업이 전혀 없는 상태였어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울 만큼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덜컥 애부터 생기니 행복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죠. 당장 먹을 끼니도 없는데, 우리 좋다고 무턱대고 아이를 출산하면 향후 그 아이의 행복은 누가 책임지겠어요. 하다못해 분유 값도 없는데….”
남편의 반응이라고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다. 더 시간이 경과될 경우 수술 자체가 불가능하니 일단은 지우고 보자는 식이였다. 결국 그녀는 임신 2개월째 되던 날 아이를 낙태했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이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새어나온다. 그녀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낙태 금지론’에 대해서 수박 겉핥기식의 제도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여성들의 낙태를 비판하기에 앞서 과연 사회적 제도는 잘 정비되어 있는지 먼저 묻고 싶네요. 여성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나쁘다, 잘못됐다 비판하면 여성들은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요.”
설상가상으로 아이를 낳고 싶어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출산을 포기하는 임산부도 많다. 직장인 장미란(27,가명)씨의 경우가 그렇다. 최근 그녀는 약물복용으로 아이를 낙태해야만 했다. 임신인줄 모르고 감기기운에 복용했던 약들이 화근이 되었던 것. 의사는 괜찮다며 출산을 권유했지만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의사는 괜찮다고 했죠. 하지만 엄마의 마음이란게 다 똑같지 않나요. 혹시나 하는 마음, 괜스레 불안하고 불안한 일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했어요. 만에 하나 다운증후군이나 장애가 있는 아니가 나온다면 아이를 키울 자신이 더 없어질 것 같아서요. 이런 제가 뭘 잘못한건가요.” 실제로 장애와 희귀병을 동시에 지닌 채 태어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희경(35,가명)씨는 “뱃속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리하게 출산을 강행한다는 건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정말 못할 짓이예요”라고 말했다. “서로 지치게 돼요.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강제로 낳게 하는 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 법인지, 참 답답하네요.”
낙태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때는 분명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무작정 낳아서 아이의 행복을 책임지지 못할 바엔 낙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들을 우리는 더 이상 손가락질하고 욕할 순 많은 없다.
낙태하러 비행기타고 해외 가는 세상
불법 신고를 한지 두 달 째. 그에 따른 부작용들이 속출하고 있다. 여성단체에 따르면 낙태 시술 의사에 대한 고발 조취 이후 낙태 관련 상담은 눈에 띠게 크게 증가했다. 한 달에 4~5건에 불과했던 낙태 관련 상담이 최근 들어 7배가량 증가했고, 이러한 사정은 온라인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두나 활동가는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는 여성들의 상담전화가 폭주상태다. 오죽하면 업무가 마비 될 정도”라며 현재의 상황이 너무 빠르게 여성들의 안전이나 건강을 위협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이어 “더 심각한 문제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도 고소장을 가지고 와야만 낙태시술을 해준다는 것이다. 성폭력은 신고율도 10%로 낮을뿐더러 증거자료를 입증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고소장이나 판결문을 요구하는 행동은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이라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천정부지로 솟는 낙태 수술비용도 큰 문제다. 평균 20만 원에서 많게는 40만 원까지 하던 낙태 비용이 고발 조취 이후 수 백 만원을 돌파했다. 게다가 국내에서 시술을 하지 못한 여성들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서라도 아이는 꼭 지우겠다는 심사다. 이른바 ‘원정 낙태족’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 가깝게는 일본이나 중국 등을 방문해 낙태 시술을 받고 있으며, 멀게는 낙태시술이 음성화되거나 낙태가 법적으로 허용된 나라라면 북극이건, 아프리카건 무조건 찾아가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2010년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한편 일부 병원에서는 정부의 눈을 피해 여전히 낙태 수술이 행해지고 있었다. 얼마 전 뉴스 보도를 통해 밝혀진 경기도의 한 산부인과. 이곳에서는 상대방 동의여부 등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친 후 당장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몰래카메라를 통해 공개된 화면에는 산부인관 직원이 낙태를 하러 온 여성에게 “지금 바로 할 거예요. 저희도 당장 내일 문 닫을지도 몰라요. 이미 보건복지부에서 1차적으로 권고를 내렸고, 2차적으로 경고했기 때문에 또 걸리면 아웃당하고, 면허정지가 돼서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수술은 3분 정도 소요돼요”라며 서둘러 시술할 것을 부추겼다. 돈은 현찰로만 받고, 낙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수술 사유는 ‘성폭력 피해’로 위조했다.
단속 강화 이후, 대부분의 병원들이 이런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는 수술 기록도 없이 낙태를 강행하는 경우도 많다. 산부인과 전문의 A의사는 “낙태는 피임의 개념으로 활용될 만큼 일반적인 게 사실. 정부의 강력한 조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선 무분별한 불법 낙태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낙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했다. 덧붙여 현실과 동떨어진 제도는 부작용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산부인과 전문의 P씨는 낙태의 음성화 현상으로 음지에서 시술을 받다 세균에 감염되거나 마취 사고가 발생할 위험성을 이야기하며 환자들의 안정성 문제를 꼬집기도 했다.
낙태 금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정부의 바람대로 어느 정도 확보된 듯하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찾아온 낙태 금지는 거센 후 폭풍을 만나 길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다. 점점 더 가열되고 있는 낙태 논란. 인공 임신중절의 문제는 의욕만 가지고 서두른다고 금방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무작정 상대방의 의견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폄하하기 보다는 서로간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야 들여야 한다.
비록 의견은 다를지언정, 오랫동안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이뤄졌던 낙태 문제가 공론화된 것에 대해 근본을 두고 생명존중의 기본적 가치와 여성과 태아가 행복을 나란히 추구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마련할 때 진정 국민이 행복한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