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민주주의 수호의 불길로 물든 4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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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민주주의 수호의 불길로 물든 4월19일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0.04.0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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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일대사건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 8.18해방과 분단 이후 성립된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에 대한 변혁의 요구를 배경으로 발생했다.
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학생들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 선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어 3월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
3월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의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4월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그 사건이 일어난지 일주일 후인 18일에는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0~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대가 경무대로 몰려가자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차별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흥분한 시위 군중은 경찰 지프차를 빼앗아 불사르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공격했다. 독재타도를 부르짖는 시위는 부산, 광주, 인천, 청주 등 전국에서 이어졌다. 당황한 정부는 오후 5시부터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무차별진압을 감행했다. 밤 10시쯤 계엄군이 진주하면서 시위는 수그러들지만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만 100명 이상이 사망, 전국에서 6,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4월25일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라며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다시 시위가 거세졌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하고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하면서 혼란한 시국이 가라앉았다. 같은 해 6월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29일 민의원·참의원선거가 실시돼 민주당이 압승했다. 이 선거 결과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타이타닉호 빙산 충돌, 사상 최대의 해난사고로 남아
1911년에 제작된 타이타닉호는 총톤수 4만 6,328t, 길이 259.08m, 너비 28.19m, 깊이 19.66m의 호화여객선이다. 주기(主機)는 터빈의 삼연성기기(三連成汽機)의 조립으로 된 기관으로 삼축선(三軸船)으로 속력은 22㎞이며, 당시에는 4만t급 이상의 객선의 개척선이었다.
터키식 사우나와 스쿼시 경기장, 수영장 등 온갖 시설을 갖춘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은 안전에도 엄청난 투자를 해 ‘침몰할 수 없는 배’란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영국 사우샘프턴항(港)에서 뉴욕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를 하던 영국의 호화호객선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14일 밤 11시40분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 만에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의 희생자가 발생해 세계를 놀라게 한 사상 최대의 해난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로서는 어디에도 비길 데 없는 뛰어난 기술력으로 화려함과 최고의 안전성을 보장하며 첫 항해를 시작했던 그 거대한 배는 생각지도 못했던 빙산과의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짧은 여정을 마쳤다.
그리고 침몰한 지 73년이 지난 1985년 바다 속 4,000m 지점에서 타이타닉호의 잔해가 발견된다. 과학자들은 무인 잠수정 등을 이용해 여객선 사고경위를 밝히려 했지만 빙산충돌 전후 상황을 명확히 규명해내지는 못했다. 일반적인 추측과는 달리 선체에는 빙하와의 충돌로 인해 생겼을 법한 큰 구멍이 없었고 뱃머리 철판 6곳에서 얇은 틈만 발견됐다. 이런 가운데 미 국립표준기술연구원의 티머시 포엑 박사와 존스홉킨스대 제니퍼 후퍼 매카티 박사는 ‘무엇이 타이타닉호를 침몰시켰는가’에서 불량 리벳이 타이타닉을 급속도로 침몰시킨 주범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리셋들이 부서지면서 배에 생긴 틈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리벳이 쓰였더라면 타이타닉호의 침몰 시간을 늦춰 생존자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이타닉호의 사고를 계기로 배의 구명설비와 무선설비, 빙하 감시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해상의 인명안전에 관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어, 해난사고방지를 위한 국제적인 결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와 관련한 새로운 해상안전 규정이 만들어졌다.
한편, 지난 2009년 6월1일 타이타닉호 최후의 생존자인 밀비나 딘 할머니가 9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생후 9주의 갓난 아기였던 밀비나 딘 할머니는 그녀의 부모와 두 살 위인 오빠와 함께 미국 캔자스로 이민을 가던 길이었다. 당시 딘 할머니는 아버지가 상황을 미리 알아채고 서둘러 구명선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헤이그 밀사 파견… 끝내 참석과 발언 거부로 실패
1905년 일제가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외국에 나가 있는 사신(使臣)을 소환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실권을 하나하나 박탈했고, 대한제국의 국체는 형해화(形骸化)하기에 이르러 국가는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이럴 즈음인 1907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는 정보를 얻고, 4월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과 전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 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폐하는 한국이 무고하게 화를 당하고 있는 정상을 생각하여 짐(朕)의 사절로 하여금 한국의 형세를 만국회의에 설명할 수 있게 한다면 만국의 여론에 한국의 원권(原權)이 회복될 수 있을까 기대하며…”라는 회의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 이들 대표에게 만국회의에 나가 당시 한국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리도록 하였다. 이들 대표는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도착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하고 전 러시아공사관 서기 이위종(李瑋鍾)과 6월25일 헤이그에 도착한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과 일본의 협박때문에 강제 체결된 한일보호조약은 마땅히 무효화되어야 한다고 역설, 이 조약의 파기를 회의 의제에 상정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제는 고종을 감금하다시피 하고 그들의 현지 공관과 회의 대표를 통해 한국대표의 회의참석 방해공작을 폈다. 이 때문에 의장 넬리도프는 책임을 형식상의 초청국인 네덜란드에 미루고, 네덜란드는 을사조약은 각국 정부도 이미 승인하였으니 한국 정부에는 자주적인 외교권을 승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 대표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하였다.
이 당시 서울에서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며 배일(排日)운동을 하던 미국인 B.허버트(轄甫)가 헤이그로 와서 한국 대표를 후원하며 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신문인 W.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의 전문(全文)은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라는 제목으로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특사 가운데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다.
이 사건의 배후에서 고종의 근신(近臣)으로서 러시아에 망명한 전 러시아공사 이범진과 허버트 등 외국인이 관계하였으며, 고종 자신도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참가 주선을 요청하고 특사의 활동비를 지출하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토는 7월18일 그들의 외무대신 하야시를 서울로 불러 함께 고종을 협박하였고, 밤을 새워가면서 항거하던 고종은 결국 ‘대사를 황태자에게 대리시킨다’는 황태자 섭정의 조칙(詔勅)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친일각료들은 이 조칙을 ‘양위’로 왜곡 발표하고, 20일에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문사 및 경찰관서 등을 습격 파괴하고 친일괴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서울 장안은 유혈과 통곡소리로 수라장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7월24일 일제의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위한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이, 29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공포되고, 31일에는 군대해산명령이 내려졌다. 이와 같이 나라의 운명이 망국으로 기우는 상황 속에 순종은 새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도 광무(光武)를 융희(隆熙:8월 2일자)로 바꾸고 일제는 마지막 병탄 작업을 서두르게 되었다.

1,200년 만에 부활한 제1회 아테네 올림픽 개막
1896년 4월6일 제1회 근대 올림픽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고대 올림픽의 이상을 계승한 첫 번째 근대 올림픽으로, 393년 제293회 대회 이후 1,200년 만에 고대 올림픽의 전통과 향수가 살아 있는 아테네에서 10일간 개최되었다.
육상, 사이클, 수영, 체조, 역도, 레슬링, 펜싱, 사격, 테니스, 마라톤 등 43개의 세부종목을 14개국 241명의 선수들이 10일 동안 힘과 기술을 겨뤘고, 판아테나익 스타디움에 운집한 6만여 명의 관중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환호했다. 대회 개막 첫 경기는 100m 달리기 예선부터 시작되었다. 트랙 경기는 현재와 같은 좌회전이 아니라 우회전으로 실시되었고, 200m육상경기는 새 트랙의 코너가 너무 뾰족해서 안전상 취소되었다. 수영경기의 경우, 해안까지 되돌아올 거리를 짐작할 출발자와 함께, 수영선수들은 작은 증기선을 타고 나가 4월의 차가운 지중해에서 경기를 치렀다. 대회의 최대 관심사는 옛 그리스의 영광을 찬양하여 종목으로 채택한 마라톤으로 2시간 58분으로 우승한 그리스의 목동 출신 S.루이스는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자만 인정한 것과 달리 각 경기의 1·2위에게 시상이 되었는데, 우승자에게는 상장·은메달과 함께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고 2위선수에게는 상장·동메달·월계수관이 수여되었다. 모든 상은 대회 마지막 날인 4월15일에 그리스왕 게오르기오스 1세가 수여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11개의 미국이 차지했고, 그리스(금메달 8개)·독일(7개)·프랑스(5개)·영국(3개)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참가국은 개최국 그리스를 포함하여 오스트레일리아·오스트리아·불가리아·칠레·덴마크·독일·프랑스·그리스·영국·스웨덴·스위스·헝가리·미국으로 대부분 유럽 국가이며, 쿠베르탱을 불신한 네덜란드와 올림픽 대회 자체를 비난한 벨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또 1895년 말까지도 초청장이 발송되지 않아 실제 참가국이 14개국에 불과했고, 대회규모도 축소되었다.
근대 올림픽은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설립을 주도한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텡(Pierre de Coubertin, 1863~2937) 남작의 공이 컸다. 당초 그의 의도는 보불전쟁(1870~1871)에 패해,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주고 아울러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 각국 청소년들의 상호 이해와 우정을 다지고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제2회 대회는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고 이후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1926년 조선 마지막 왕 순종 타계
조선의 제27대 왕(재위 1907~1910)이자 최후의 왕 순종의 이름은 척(拓)이며 고종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며 비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이다.
1875년(고종 12) 2월 세자가 되었으며 189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융희 1)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헤이그 특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하자 즉위하였다. 같은 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한국관리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8월1일에는 다시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12월에는 황태자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1909년 일본은 한국의 민정(民情)을 살펴가며 국권탈취공작을 추진하여 7월에 군부(軍部)를, 10월에는 법부(法部)를 각각 폐지하여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하였다.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가 본국으로 간 뒤, 소네 아라스케를 거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후임으로 오면서부터 더욱 야욕을 드러내자, 각지에서 나라가 망함을 통탄하고 조정 대신들의 무능을 비난하여 암살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동년 10월 안중근에 의하여 이토가 암살되고 12월 이완용이 습격을 당했다. 1910년 8월29일 국권이 피탈되어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에 머물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다. 순종은 1926년 4월25일 창덕궁에서 타계했으며, 능은 유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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