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언
도쿄 유학생들에 의한 2.8독립선언을 직접 자극하고 촉발시킨 계기는 당시 재미동포들의 동향이었다. 1919년 1월18일부터 열리는 파리 강화회의에 재미 한국인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贊鎬)·정한경(鄭翰景)이 미국 대통령 T.W 윌슨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1918년 12월 한국대표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이 영국인이 고베[神戶]에서 경영하는 신문 <The Japan Advertiser〉의 12월15일자 보도를 통해 일본 유학생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2월18일자에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된다고 하는 보도에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해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송계백(宋繼白)을 국내로, 이광수(李光洙)를 상해로 파견하였다.
1919년 2월8일 오전 10시경 임시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 국 대사관 및 공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그리고 도쿄 및 각지의 신문사와 잡지사,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한 다음, 오후 2시부터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임원선거를 명목으로 유학생대회를 개최했다. 도쿄 유학생의 거의 전부를 망라한 600여 명이 참가했다. 회장 백남규(白南奎)가 개회를 선언한 다음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고 비등해진 분위기 속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회순에 따라서 백관수가 독립선언문,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이날의 독립선언회의에서 유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했으나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장이 강제해산을 명령하여 27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27명 중 임시실행위원 10명은 출판법 제27조 위반으로 2월10일 도쿄 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2.8독립선언 후 지도부가 검속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여 일본 국회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하여 2월12일 100여 명의 유학생들이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에 모여 이달(李達)을 회장으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려 했으나, 이달 등 13명이 붙잡혀 해산되고 말았다. 23일에는 변희용(卞熙鎔)·최재우(崔在宇)·장인환(張仁煥) 등 5명이 조선청년독립단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하여 역시 히비야 공원에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배포 도중에 붙잡혔다.
또한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쿄 유학생들은 3월9일 ‘재동경조선청년독립단동맹휴교촉진부’를 결성해 유학생들에게 학교를 동맹휴학하고 귀국하여 본국의 만세시위운동에 합류하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띄웠다. 그 후 3월10~11일 변치덕(卞致德)·정근모(鄭根模)·이재훈(李載勳) 등은 태극기 130여 개를 만들어 최팔용 등의 공판일에 모인 유학생들에게 배포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했다. 일제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3.1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한 한국인 총수는 491명으로 그중 유학생이 359명이었다고 한다.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게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1975년 2월4일, 철의 여인 대처, 영국 보수당수 선출
“여성의 카리스마는 돈과 명예보다는 자신이 지닌 내면, 외면의 이미지로부터 발생한다.”
유럽 최초의 여성총리 마가레트 대처는 영국에서 20세기 들어 총리직을 3번 연임한 최초의 인물로 그녀의 재임기간은 1827년 이래 가장 길었다.
식료품 상인의 딸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의 서머빌 칼리지를 졸업하고, 서머빌 칼리지에서 문학사(1946)·이학사(1949)·문학석사(1950) 학위를 취득했고 옥스퍼드대학교 보수연합회 최초의 여성회장이 되었다. 졸업 후에는 연구화학자로 일했다. 1951년 D.대처와 결혼하여 쌍둥이 남매를 둔 대처는 1959년 보수당 후보의 당선이 비교적 확실한 북런던 핀츨리 선거구에 공천되어 의회에 진출, 1961~1964년 연금·국민보험부 공동 정무차관을 거쳐 1970~1974년 교육·과학장관을 지냈다. 여자로서 보수당 각료가 된 예는 그전에 단 한 번밖에 없었다.
대처는 1974년 보수당이 2차례의 총선에서 패배한 뒤 1975년 히스의 뒤를 이어 당수에 올랐으며, 1979년 노동당의 L.J.캘러헌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결의를 당하고 해산된 직후의 총선거에서 대처가 영도하는 보수당이 승리함으로써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취임하였다.
집권 후 긴축재정을 실시하여 영국의 경제부흥을 이룩하였고, 대외적으로 대처는 식민지통치에서 이탈한 로디지아가 1980년 독립 짐바브웨로 발족하는 것을 도왔으며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가 10주 동안 점령했던 포클랜드 제도를 전쟁을 통해 재탈환하는 데 성공하며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전쟁중에 그녀가 보인 과단성과 지도력은 1983·1987년 실시된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 3기를 연임함으로써 영국 사상 최장기 집권의 총리가 되었다. 그 후 과감한 사유화와 노조의 와해, 교육·의료 등 공공분야에 대한 대폭적인 국고지원 삭감 등 획기적인 정책 추진과 독단적인 정부운영 등으로 ‘철(鐵)의 여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집권 후반기에 이르러 ‘대처 혁명’은 재정·산업의 경제분야로부터 교육·보건·주택공급의 민영화를 통하여 사회정책부문으로 확산되어갔다. 대처는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의 적극적인 참여와 독자적인 핵억지력의 확보를 공언했는데, 전통적인 핵·방위전략을 부정하는 노동당의 태도에 비해 보다 큰 국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1984년 서식스 브라이튼에서 아일랜드 분리주의자의 폭탄 테러로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를 영국령으로 보유하려는 영국정부의 기존노선을 고수했다. 1990년 유럽통합 반대입장을 고수하다가 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게 되어 자진 사임하였으며,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하였다. 1992년 남작 작위(케스티븐의 대처 남작)를 받고 귀족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한 대처는 1986년 5월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1929년 2월11일, 바티칸 이탈리아로부터 독립
이탈리아와 오랫동안 반목하고 대립해 온 로마 교황령(領)이 1929년 2월11일, ‘라테란 협정(Lateran Concordat)’을 체결함으로써 독립국가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으로 탄생했다. 협정은 교황 비오 11세(Pius XI, 1857~1939)를 대신해 교황청 국무장관 가스파리(Gasparri, Pietro, 1852~1934) 추기경과 이탈리아 총리 무솔리니(Mussolini, Benito, 1883~1945)가 서명했다.
로마 교황령이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1870년 이탈리아 왕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가 로마를 점령한 뒤 교황 비오 9세(Pius IX, 1792~1878)의 세속적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부터였다. 이전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넓게 차지한 교황령(756~1870)으로 존속하였으나, 영토 대부분은 1860년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합병되었고, 10년 후인 1870년에는 로마와 더불어 나머지 다른 지역도 모두 이탈리아에 합병되었다.
59년간의 갈등 해소에 나선 사람은 1922년에 로마로 진군, 이탈리아의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무솔리니.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절실했던 무솔리니는 가톨릭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무솔리니는 가톨릭을 이탈리아 유일의 종교로 인정하고 바티칸시국에 대한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며 몰수한 교회재산도 돌려줬다. 교황도 이탈리아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화답함으로써 무신론자인 무솔리니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었다.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 시내에 있으며, 벽으로 둘러싸인 영토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국이자 독립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0.44㎢의 면적에 약 900명 정도의 인구를 지녔으며 면적과 인구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바티칸 시국은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 국가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지이다. 바티칸 시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 관계에서의 정식 명칭은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성좌(聖座, Sancta Sedes)이다.
1689년 2월13일 영국, 권리장전 채택
미국 등의 다른 권리장전과 구별하여 영국권리장전(English Bill of Rights)이라고도 한다. 권리청원(權利請願)이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관련된 인권선언인 데 대해서, 권리장전은 명예혁명의 결과 이루어진 인권선언이다.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와 가톨릭 신앙에 반대하여 일어난 명예혁명은 1688년 12월23일 국왕이 프랑스로 도망하고, 그 이듬해 2월13일 국민협의회가 윌리엄 3세를 국왕으로 추대함으로써 무혈혁명으로 끝났다. 이때 의회는 새 왕을 추대하면서 왕관과 함께 ‘권리선언(權利宣言)’을 제출하여 그 승인을 받았고, 이 선언을 토대로 89년 12월16일 ‘신민(臣民)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계승을 정하는 법률’이라는 이름의 의회제정법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이 곧 권리장전이다.
주요내용은 제임스 2세의 불법행위를 12개조로 열거하였고 의회의 동의 없이 왕권에 의하여 이루어진 법률이나 그 집행 및 과세의 위법, 의회의 동의 없이 평화시에 상비군의 징집 및 유지의 금지, 국민의 자유로운 청원권의 보장, 의원선거의 자유 보장, 의회에서의 언론 자유의 보장, 지나친 보석금이나 벌금 및 형벌(刑罰)의 금지 등이었다.
이러한 권리장전은 영국의 의회정치 확립의 기초가 되고, 영국의 절대주의를 종식시켰다는 점에 영국 헌정상 큰 의의가 있다. 또 영국의 권리장전은 영국 헌정상뿐만 아니라 미국의 독립선언, 버지니아 권리장전, 매사추세츠 권리선언 등에도 영향을 주었고, 이들을 통하여 다시 프랑스 인권선언에도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권리장전이라는 말은 일반화되어, 각국의 헌법전 속에 규정된 인권을 보장하는 조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 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는 한국의 권리장전이라 할 수 있다.
1936년 2월5일 찰리 채플린 ‘모던 타임즈’ 개봉
유나이티드아티스츠 작품의 흑백영화 모던 타임즈는 제작·각본·감독·주연·음악을 찰리 채플린이 담당하였다. 토키영화 도래에 맞서 사이렌트의 아성(牙城)을 지키며 단 한마디의 대사 없이, 이미 오늘의 오토메이션시대를 60년 전에 간파한 영화이다. 타이틀백의 시계 문자판이 상징하듯, 시계에 지배되는 기계문명에 대한 도전과, 자본주의의 인간성 무시에 대한 분노를 묘파한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벨트컨베이어로 운반되어 오는 상품의 나사를 죄는 동작을 되풀이하는 공원(채플린)은 기계 앞을 떠나도 같은 동작을 계속한다. 정신병원에 가서 정상적인 생활리듬을 찾으면 낫는다. 데모의 주모자로 체포되기도 하고 모범수로 석방되어 조선소 직공 등으로 전전하나 실수투성이 이다. 부둣가에서 먹을 것을 훔친 불행한 소녀(포렛 고다드: 채플린의 부인)와 만나 내일의 희망을 안고 걸어나는 라스트 신은 유명한 장면이다.
결코 새로운 것만 좋아하지는 않았으므로 토키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채플린은 자본주의의 인간성 무시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저력 있게 고발한다.
찰리 채플린은 1889년 4월16일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뮤직홀 연예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를 따라 5세 때 첫 무대에 섰다. 가난과 어머니의 정신발작, 고아원 등 불우한 환경을 거쳐 10세에 극단에 들어갔다. 점차 천부의 재능을 인정받아 17세 무렵 당시 영국 최고의 인기 희극극단 프레드카노극단 단원이 되었다. 댄스·노래·어릿광대·몸짓흉내·무언극 등 희극배우로서의 재질을 키우기 위한 수업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절이었다. 1912년 카노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 영화제작자 M.세넷은 그를 할리우드로 초청하였으며, 채플린은 여기서 큰 행운을 얻었다. 그 당시의 미국 영화는 발전단계에 있었고, 세넷은 희극영화 제작의 명수인 동시에 미국 영화의 개척자였으므로 채플린의 재능을 대성시켜 주는 어버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