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분단된 채 남북한이 서로 다른 체제와 사회 속에서 살아온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단일민족으로 동일한 언어와 문화, 혈통을 지닌 우리는 반드시 공존·공영해야 할 동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로 남아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 민족이 분단을 겪게 된 원인은 무엇이며, 또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무엇일까? 지난 1994년 최초로 살아 돌아온 '국군포로 조창호'를 비롯해 안순용, 장무환, 그리고 유골로 돌아온 백종규 등 지금까지 북한을 탈출해 입국한 국군포로는 4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2000년 9월 처음으로 귀환한 '납북어부 이재근'을 시작으로 납북어부는 진정팔, 김병도를 포함해 단 3명 귀환한 상태다. 지금도 북녘 땅에는 국군포로를 비롯해 납북자 등 약 2,486여명이 억류된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분단의 비극적인 현실을 방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허리잘린 한반도, 분단의 역사 시작
1945년 8월 15일, 35년간 일제의 모진 수탈과 압박을 받다가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과정에서 당시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점령함에 따라 남북분단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5년 후인 1950년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나면서 남과 북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고, 이로 인해 한 민족이 겪는 아픔은 더 커갔다.
분단은 민족적 차원에서 번영과 발전을 저해했으며 불필요한 경쟁과 군사적 대치, 자원의 분할 사용 등과 같은 막대한 민족 역량의 낭비와 손실을 초래하였다. 또한 혈육과 헤어지는 아픔 그리고 망향의 한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분단이 낳은 비극, 국군포로 조창호
'군번 212966 육군 소위 조창호'. 그는 남북분단의 현실 속에서 희생된 인물이다. 그가 살아온 지난 40년은 실로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43년만에 귀환한 조창호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평생을 압류 당했다. 그런 그가 북한을 탈출하는 데 불과 10분이 걸렸다. 그리고 중국을 통해 70여 시간의 사투 끝에 암흑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그가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조창호가 잃어버린 43년의 세월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된다. 스무살의 꽃다운 나이에 전쟁터로 달려갔던 조창호는 1951년 '한석산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면서 악명 높기로 소문난 만포교화소, 아오지특별수용소, 강계교화소로 전전하며 인간 이하의 삶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된다. 그가 13년만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을 때는 500명의 포로들 중에서 단 50명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후 그는 화풍 광산과 중강진의 호화광산의 막장에 다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의 고된 강제 노역은 규페증과 뇌졸중 등 그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힘든 생활로 나이 60을 넘기며 조창호는 자식들에게 그의 묘비에 자신의 이름대신 꼭 '남쪽에서 온 사람'이라 써 달라고 유언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조선족 보따리 장사를 통해 편지를 가족에게 보내면서 자신의 생존사실을 알린다. 그 편지는 그의 누이에게 전달되며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동생소식에 그를 찾으러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만난 조창호와 그의 가족들은 43년만에 극적인 해후를 했고 남쪽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43년의 세월은 그에게 있어 가장 기억하기 싫은 젊은날의 추억이었다.
조창호가 살아서 돌아오기까지 국군포로들은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을 잊지 못하고 목숨건 탈출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을 탈출해 입국한 국군포로는 4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1997년12월에 귀환한 안순용씨는 이미 2년 전에 사망했고 1998년 9월 귀환한 장무환씨는 45년만에 아내와 눈물겨운 해후를 했다. 또한 국군포로 유골1호인 백종규씨의 딸 백영숙씨는 '남한에 묻어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위해 유골을 안고 2003년4월 북한을 탈출, 그토록 그리던 남쪽땅을 밟았다.
분단의 비극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국군포로들을 두고 새로이 생겨난 이산가족. 북에 남겨진 처자식과 남한의 가족들 또한 분단이 낳은 비극이다.
한국 전쟁 포로의 경우 유엔군사령부가 53년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종적인 국군포로 및 실종자 수는 82,318여명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북한에 살아 남은 국군포로는 2,000여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한국전쟁 당시 청년이었던 그들은 대부분 70세가 넘어선 노인들이 되었다. 국군포로들이 스스로 노력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국가가 할 일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경우 10여 년 전부터 유해 송환 협상을 벌여 90~94년 유해 11구를 인도, 97년엔 290만 불을 지불하고 유해 5구를 인도했다. 미국은 죽은 사람의 유골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우리나라는 살아있는 사람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2003년엔 자신이 국군포로라고 주장하는 탈북자 전용일씨(72)가 중국 공안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국군포로라면 법적으로는 우리나라 국민이다. 하지만 그는 조국으로부터 "알아서 한국에 가라"는 말만 들은 채 외면을 받아야만 했다.
냉험한 분단선, 북한이 부인하고 남한이 외면하는 그들이 지금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사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냉전의 희생자이면서 구석으로 밀려버린 국군포로들의 슬픔이 가시지 않는 한 분단의 비극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조국에 버림받은 납북어부
조창호의 뒤를 이어 최초로 살아 돌아온 납북어부 이재근 또한 남북한의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희생자였다. 1970년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 조기잡이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됐던 이재근씨는 1998년 북한을 탈출해 2년간 중국에서 숨어 지내며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왜 자꾸 국가에 부담을 주려고 해"라는 대답뿐. 조국은 그 역시 외면했다. 조국은 30년 동안 그랬듯이 그를 잊으려 했다. 2000년 9월 납북자 가족모임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이재근씨의 북한에서 삶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씨는 북한의 대남간첩 양성기관인 중앙당정치학교에서 2년 6개월간 남파간첩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사격, 폭파, 침투, 살상기술 등 고된 훈련이 계속되었고 이씨는 하루 빨리 남파되어 자수하겠다는 생각으로 훈련을 견뎌냈지만 그것마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상이 불순하고 파견되면 자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북에서 최하류층의 생활을 해야만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한에 남겨진 그의 가족들에게도 이씨가 납북됨과 동시에 비극의 시작이었다.
납북이 시작되었을 당시 귀환자들은 환영을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들은 온갖 고문과 수사 속에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정부는 '납북어선, 어부카드제, 요시찰인 카드' 등을 통해 납북자들과 그 가족들을 제도적으로 특별 관리하며 감시와 제재를 가해왔다. 우연히 발생한 납북은 그들이 평생 짊어져야 하는 무서운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
왜 북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한사람들을 북으로 납치했을까? 1960~70년대는 남·북의 이념과 체제경쟁이 극에 달했던 시절로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부터 납북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북한은 북한어선을 고깃배로 위장하여 NLL(서해북방한계선)을 넘기 일수였고 남한 고깃배를 납치했다. 납북자들의 93%를 차지하는 납북어부의 경우 1955년 '대성호' 납북을 시작으로 1995년 제86호 '우성호'까지 총 3,756명이 납북되었고 아직도 486여명의 어부들이 북에 억류된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한편 이씨의 귀환으로 납북어부가 60여명이 더 있다고 밝혀졌으며 그 중 납북어민 32여명의 생사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생사가 확인된 납북어부들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2001년 11월에 귀환한 진정팔씨는 34년만에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으며 2003년 6월 귀환한 김병도씨 역시 그토록 바라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생존명단에도 없었던 김씨는 이씨가 생존사실을 알림으로써 귀환에 성공한 경우다. 지금 현재로는 이재근, 진정팔, 김병도 단 3명만이 귀환한 상태다. 현재로써는 납북자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알 수 없고 다만 귀환한자들로부터 기억되는 납북자들의 생사만 확인 될 뿐이다. 납북자 가족들은 귀환자들을 통해서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그들과 만남을 갖고 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50년 동안 방치해 온 납북자들에게 있어서 조국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조국은 그들에게 있어 삶의 등불이자 목적이었으며 그들이 바라던 마지막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
남북한 긴장관계 완화 절실
그렇다면 분단의 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남북한이 상호 적대적인 대립 관계에서 벗어나,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여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국토 분단에 의해 형성된 두 개의 체제를 하나의 민주적 체제로 통합하여, 한반도에 하나의 주권 국가가 존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단의 극복은 통일을 의미하며 이는 분단으로 인한 모순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동일한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따라서 통일은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며 손상된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분단으로 인한 남북한의 이질화 현상을 극복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은 반세기 이상 단절된 채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살아왔다. 상호간의 교류가 자유롭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된다면, 남북한은 전혀 다른 문화 집단으로 변해 버릴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므로 민족의 이질화를 방지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분단을 극복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한 과제이다.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한간의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 햇볕정책을 내세워 비정치적인 교류(금강산 관광, 비료사업, 식량지원, 이산가족 상봉)를 시작했으며 정치논리(서해교전)에 민족공동체 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들이 실행되었다. 이에 그동안 정치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대북정책과 반응을 달리했던 것을 정치적 외풍을 차단함으로써 남북한이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따라서 민족의 동질성을 보여 줄 수 있었으며 반세기동안 단절된 남북의 관계를 한층 더 가깝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통일은 분단에 따른 민족 구성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이루어져야 한다. 탈북을 하는 경우나 국군포로, 납북된 사람들의 증언이 이를 증명해 준다. 날로 북한의 식량난이 극심해 지면서 남한행을 꿈꾸는 북한사람들이 많아 졌으며, 탈북자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지난 7월 탈북자 457명이 대거 입국을 비롯, 지난 10월15일 새벽엔 베이징에 있는 주중 한국 대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20명이 한국행을 희망하고 있다. 목숨건 탈북 역시 남북분단이 불러온 비극 아닌 비극이다.
한편 남북한은 대치 상황으로 인하여 엄청난 군사비를 부담하고 있으며 국제 무대에서 아직도 소모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는 민족의 자긍심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 번영의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해야 할 많은 자원과 민족적 역량을 낭비하는 것이다.
정책적인 지원 필요
우리는 현 시점에서 남북분단의 비극이 낳은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 비극을 어떻게 극복을 해야 하는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강제 납북자들의 무사귀환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납북자들을 외면해 왔고, 남아있는 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일삼으며 인권을 유린해 왔다. 이들의 아픔을 계속 외면한다면 분단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NLL(서해북방한계선)이란
1953년 7월 27일 이루어진 정전협정에서는 남·북한간 육상경계선만 설정하고 해양경계선은 설정하지 않았는데, 당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던 클라크(Mark Wayne Clark)가 정전협정 직후 북한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설정해 북한측에 공식 통보한 한계선이 'NLL(Northern Limits Line)'이다. 해양의 북방한계선은 서해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5개 섬 북단과 북한측에서 관할하는 웅진반도 사이의 중간선을 말하는데, 북위 37.35'과 38.03'사이에 해당한다. 1953년 설정 이후 1972년까지는 북한도 이 한계선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준수함으로써 남북 사이에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973년 들어 북한이 서해 5개 섬 주변 수역이 북한연해라고 주장하면서 이 수역을 항행하려면 사전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하는 한편, 빈번히 북방한계선을 넘어옴으로써 남한 함정들과 맞닥뜨리는 소위 '서해사태'가 발생하였다. 북한 경비정들은 1973년 10월과 11월 두 달 사이에 약 43회에 걸쳐 의도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였다.
북한은 동년 1월1일 제346차 군사정전회의에서 휴전협정의 관계 조항을 들어 서해도 주변해역은 북한의 관할 수역이며, 이들 도서자체가 휴전협정에 명기된 대로 유엔군 통제하에 있음을 인정하나, 그 주변해역을 통제하는 북한의 사전 승인을 받아서 통항 해야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였다. 이날 북한측 수석대표 김풍섭의 발언에서 서해 측의 경계를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의 연장선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초로 등장하였다. 국제법적으로도 영해를 규정하는 경계선은 아니라는 것이 국제법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납북자 가족모임
납북자 가족들과 함께 참여, 납북자 가족들의 애로사항 접수 및 송환에 힘써
납북자가족모임(대표 최성룡)은 지난 2000년 2월 28일 '납북자가족모임'이 창립총회를 개최하면서 만들어졌다. 이후 많은 납북자 가족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지난 2000년10월엔 전국 납북자 가족 총회를 가지면서 납북자가족모임 운영위원회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납북자가족모임 운영위원회는 가족들의 애로사항을 접수하고 있으며, 북에 있는 납북자를 송환하는데 보다 정당한 방법으로 해나가고 있는 조직이다.
일본의 경우 정부에서 공식 발표한 납북자 10인의 가족 외에도 수많은 지식인들과 평범한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휴전 협정이후 납북자는 3천 790명이며, 이중 13%에 해당하는 487명이 아직까지 북한에 억류된 상태이다. 통일부로부터 납북억류자 현황에 대한 자료를 보면 납북억류자는 70대 이상이 13명, 50~60대가 292명, 30~40대가 82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납북자 유형별로는 어부가 가장 많다. 납북자가족모임사이트(www.comebackhome.or.kr)에서는 납북자전체 현황 및 가족 현황 등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