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범종 역사를 새로 쓰는 위대한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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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범종 역사를 새로 쓰는 위대한 걸작
  • 신혜영 기자
  • 승인 2010.01.0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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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전 12만 근의 구리로 빚어낸 신의 소리 ‘성덕대왕신종’

통합과 소통의 상징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완성
1962년 12월20일 국보 제29호로 지정된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구리 12만 근(27t)을 들여 완성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가 약 25톤에 달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은 1460년(세조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아 현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문으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화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몸체에는 당초문을 두른 견대(肩帶)가 있고, 그 아래 4개의 유곽(乳廓)안에는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을 넣었다. 그와 대칭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幢座)가 있다.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종명을 사이에 두고 2구씩 상대한 4구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으며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특히 비천상 사이의 2개 처에 이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살마 및 글쓴이의 이름이 적힌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 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로 앞으로도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1863년 미 링컨 대통령, 노예해방 선언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미국 대통령에 의해 1862년 9월22일 발표된 ‘노예해방 예비선언’이 1863년 1월1일,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던 자치주에 대해, 흑인 노예의 해방을 선언했다. 링컨 대통령은 이 선언을 통해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한다고 밝힌 뒤 해방된 흑인들에게도 옛 주인들에 대한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했다. 노예해방 선언은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던 자치주, 즉 남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남부의 내분을 노리는 동시에 흑인들을 북군의 병력으로 흡수하는 효과가 있었다. 노예해방 선언 직후, 흑인들이 북군에 대거 입대해 남군과 싸웠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링컨은 이 선언으로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역사도 링컨의 말대로 그를 노예해방의 주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노예해방이라는 인도적인 명분이 링컨으로 하여금 남북전쟁을 수행케 한 것은 아니었다.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한 것이었고, 노예해방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다.

1948년 62년 만에 미얀마 독립
미얀마는 19세기에 3차례에 걸쳐 영국과 전쟁을 해오다가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미얀마의 민족주의 운동은 인도 국민회의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0년에 랭군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미얀마는 1937년까지 사실상 인도의 한주였기 때문에 인도로 부터의 독립운동이 주가 되었다. 1921년에 설립된 청년 불교 협회는 외세의 지배에서 불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꾀하였고, 세계적으로 경제 공황의 영향이 컸던 1930년대 사야 산이 고대 왕국을 부활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31년 말 런던에서 회의가 열려 인도분리주의자와 인도 분리 반대파간의 격론이 있었으나, 바 모의 노력으로 1937년 인도로 부터 분리되게 되었다. 영국의 지배에 반대한 랭군 대학 중심의 대학생 투쟁을 ‘타킨 운동’이라고 부른다. 타킨이란 미얀마어로 ‘주인’이란 뜻이며 서로 미얀마의 주인이 되자고 서로를 타킨이라고 불렀다. 타킨 운동 지도자들은 가장 열렬한 반영운동의 세력이었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타킨운동의 지도자들은 바 모와 연합하였으나 바 모와 우 누는 체포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의 급진적 지도자들은 일본과의 협력으로 독립을 하려고 하였다. 그 중 아웅산은 30여 명의 타킨들을 일본으로 밀파하였으며, 6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게 한 후 1941년 방콕에 모여 미얀마 독립 쟁취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일본군이 진주하자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일본에 적극 협력하였다. 옹 산과 네윈 등은 순진하게 일본의 미얀마 독립 운동을 믿었지만, 미얀마에 진주하게 된 일본군은 정복자 행세를 하며 약속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타킨 지도자들은 미얀마가 일본에 속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버마로드의 차단이 목적일 뿐 버마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애초 약속과는 달리 버마에서 친일인사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고 영국보다도 더한 악랄한 식민통치를 자행하였다.
결국 미얀마의 민족주의자들은 다시 영국과 접촉하였고 1944년에는 반일범국민연합이 결성되었으며, 1945년 3월에는 옹 산이 이끄는 미얀마 군대가 공식적으로 연합군에 참여하였다. 영국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아웅산 등 미얀마 독립의용군의 안내를 받아 1945년 3월 또 다시 버마로 진군하여 일본을 패퇴시킨다.
일본을 몰아낸 아웅산 장군은 10만 명에 달하는 미얀마 독립의용군들을 세력으로 해서 영국과 독립교섭을 시작한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47년 아웅산과 애틀리 협상으로 1948년 1월 미얀마는 완전 독립을 획득했다. 그리고 1월4일 새벽 4시20분 미얀마 정부청사에 휘날리던 영국 국기가 내려지고 대신 미얀마의 국기가 게양된다. 미얀마가 62년 동안의 영국지배를 벗어나 버마 연방으로 독립하는 순간이다.

1991년 사막의 폭풍 ‘걸프전쟁’ 발발
이라크가 1990년 8월2일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가 포성과 화염에 휩싸인다. 걸프전쟁은 쿠웨이트를 침공해 일어난 전쟁으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1937~) 대통령은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진 대아랍국 부채의 면제, 보다 많은 석유자원의 확보, 실지회복 및 중동지역 패권국가로서의 위치 확보를 위해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에 대해 유엔 안보리는 즉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규탄하고 무조건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660호)과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결의안(661호) 등을 채택했다.
미국과 소련도 9월9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걸프사태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으며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과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 등 중동 여러 나라가 다국적군을 구성해 이라크에 군사적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라크가 철수의사를 보이자 않자 유엔 안보리는 11월29일 이라크가 1991년 1월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678호)을 채택했다.
그리고 1991년 1월9일 열린 미국과 이라크간 외무장관 회담이 결렬되자 다국적군은 1월17일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2월24일 전면적인 지상공격을 벌여 지상전 시작 100시간 만에 100만 대군이라던 이라크군을 완전 궤멸시킴으로써 2월29일 종전을 선언했다. 이로써 다섯 달 전 이라크가 침탈한 쿠웨이트의 주권이 회복되었다.
걸프전쟁의 결과 중동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 하에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계기를 맞았다. 걸프전은 현대전의 개념을 바꿔 놓았으며 중동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위해 열릴 중동평화회담의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꼭 2년만인 93년 1월 이라크의 비행금지구역 내 미사일 배치, 자국 영내 유엔기의 비행금지조치, 쿠웨이트 기습침공 등으로 2차 걸프전이 발발했다. 미국의 4차례에 걸친 공습에 이라크가 휴전을 선언, 종료됐다.

1627년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정묘호란’ 발발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하고, 랴오둥(遼東)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明)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했다. 때문에 명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서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들은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1627년 l월17일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軍)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安州)·평산(平山)·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란하였다. 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2월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①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②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①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②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③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3월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했다.

1176년 민중봉기 망이·망소이의 난
무 신란(武臣亂)에 의한 무신정권의 출현을 전후해서 사회질서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관리의 탐학으로 유망민이 속출하였다. 1176년(명종 6) 1월, 공주에 딸린 천민부락 명학소(鳴鶴所)에 살던 망이·망소이 등은 도당을 모아 자칭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일컫고, 본읍인 공주를 공격해 함락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패하자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들이 사는 천민부락의 지위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縣令)을 파견하였음에도 응하지 않고 예산(禮山)을 공략해서 감무(監務)를 살해하였다. 망이·망소이 등은 계속 난동을 하다가 이듬해 1월에 항복하여, 조정에서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곡식을 주고 고향으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망이는 2월에 다시 난을 일으켜 서산(瑞山)의 가야사(伽倻寺)를 점거하고 3월에는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워 승려 10여 명을 죽이는 등 일대를 휩쓴 다음 아산(牙山)까지 점령하였다.
이어 이들은 청주목(淸州牧)의 치소(治所)를 제외한 관할구역 내의 모든 군현(郡縣)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전면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차차 기세를 잃고, 7월에 망이·망소이 등이 붙잡힘으로써 망이·망소이의 난은 끝났다.


1933년 히틀러, 독일 총리 취임
독일민족 우월사상으로 무장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4.20~1945.4.30)가 독일 총리가 됐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공황과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933년 1월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히틀러는 이듬해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해 ‘총통 및 수상’이 됐다.
히틀러는 경제적·정치적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고 외교계·경제계·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600만 명이 넘는 실업자들을 군수산업과 토목사업에 흡수시키고, 세습농장법을 제정해 대농과 중농을 보호하고 식량의 자급자족화를 도모하는 등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다. 또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키며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당 독재를 실시해 나치스친위대(SS)를 강화하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가둬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했다. 히틀러는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고 군비를 확장해 독일을 유럽 최강국으로 올려놓으며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게 됐다. 이를 기반으로 1939년 9월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大生存圈)을 수립하기 위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하여 패전을 거듭하였다. 1944년 7월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保守帝政派)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반란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고, 1945년 4월29일 그는 베를린의 지하호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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