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전 총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됐다.
사건의 핵심은 ‘2006년 12월20일 총리공관에서 식사를 함께한 뒤 5만 달러를 건넸다’는 곽 전 사장 진술의 신뢰성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선 계좌 추적 등을 통해 돈의 흐름이 확인된 직접 증거가 없는 데다 돈을 주고받는 광경을 본 목격자 등도 없다.
이 때문에 한 전 총리 측은 “곽 전 사장의 ‘짜맞추기’ 주장에 근거한 엉터리 수사”라며 “법정에서 검찰 수사의 허구성을 밝히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검찰은 “한 전 총리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진술과 물증을 법정에서 제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우선 “두 사람 간에 은밀히 이뤄진 뇌물 사건의 경우 공여자의 일관된 진술이 결정적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검찰은 한 전 총리와 곽 전 사장과의 관계, 돈을 전달하기 전에 달러를 환전한 상황, 돈을 건넨 이후 이뤄진 인사 내용 등 정황 증거를 내세우며 한 전 총리 측을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또 국무총리의 포괄적 직무 범위를 제시하며, 돈의 대가성을 입증해 유죄판결을 끌어내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한 전 총리 측은 “가장 마지막에 나오면서 돈을 전달했다”는 곽 전 사장의 진술을 깨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전 총리의 변호인인 조광희 변호사는 “곽 전 사장의 주장과는 다른 얘기도 있다”고 밝혔다.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누가 나갔는지에 대한 진술이 저마다 엇갈린다는 것이다. 곽 전 사장이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전달한 물리적·시간적 여건이 안 됐다는 점을 부각시키겠다는 의미다. 정 대표 측은 “당시 정 대표가 가장 늦게까지 남았으며, 한 전 총리에게 ‘차기 당 대표 경선에서 도와 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또 “검찰의 주장처럼 한 전 총리가 당시 정세균 장관에게 ‘곽 전 사장을 잘 부탁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정 대표와 강동석 전 건교부 장관의 증언을 토대로 검찰의 공소 내용을 반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법원은 내년 1월 본격적인 재판에 들어갈 방침이어서 검찰과 한 전 총리 측과의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재판 과정에서 사건 당시 산자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식사 자리에 참석했던 정세균 민주당 대표 등에 대한 증인 채택 여부를 둘러싼 법리적·정치적 논쟁도 불가피해 보인다.
곽 전 사장의 인사청탁 들어주기 위한 자리?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권오성)에 따르면 한 전 총리는 2006년 12월20일 총리 공관에서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이었던 정세균 현 민주당 대표와 곽 전 사장, 강동석 전 건교부 장관 등과 함께 오찬을 가졌는데 검찰은 이날 오찬이 곽 전 사장의 인사청탁을 들어주기 위해 마련된 자리로 보고 있다.
검찰은 곽 전 사장으로부터 “한 전 총리에게 공기업 사장직에 대한 인사청탁을 한 뒤 그해 11월 산자부 고위 공무원으로부터 ‘석탄공사 사장으로 지원하라’는 전화를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측 주장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한 전 총리는 정 대표에게 “곽 전 사장을 잘 부탁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곽 전 사장은 오찬 후 한 전 총리와 둘이 남게 되자 2만, 3만 달러가 각각 들어있는 봉투를 건넸다.
특히 곽 전 사장이 결국 석탄공사 사장에서 떨어지자, 한 전 총리는 “곧 다른 공기업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곽 전 사장은 이듬해 3월 한국전력 임원으로부터 “지원서를 내라”는 연락을 받은 뒤 한국전력 자회사인 남동발전 사장에 임명됐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하지만 정 대표가 사건 당일 오찬에 참석한 뒤 9일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점, 한 전 총리도 곽 전 사장이 남동발전 사장으로 임명되기 한 달 전, 총리직을 사퇴한 만큼 공기업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이 시간이 지날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 같은 수순 밟아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법원에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이 이유이다. 곽 전 사장은 현재 심각한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심장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난 12월18일 곽 전 사장과 대질조사를 받은 한명숙 전 총리측에 따르면, 곽 전 사장은 ‘죽을지도 모른다’며 ‘살려달라’고 검사에게 애원했다. 곽 전 사장은 ‘대한통운 비자금 사건’의 핵심인물이다. 회삿돈 80억 여원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을 비롯해, 공기업 사장으로 선임되기 위해 한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건낸 혐의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총리 역시 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불구속 기소가 된 상태이다.
이와 관련해, ‘한명숙 공대위’의 이해찬 전 총리는 곽 전 사장과 검찰 사이의 밀약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구속집행정지를 비롯해 석방과 낮은 형량을 대가로 한 전 총리에 대한 허위진술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또 곽 전 사장이 심각한 건강상태 등 궁박한 사정에 몰려 허위 진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한 전 총리 측 변호인의 주장도 나왔다. 마치,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경우처럼 말이다.
한 전 총리 남편 수사의 포석이라는 견해
검찰은 한 전 총리 수사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일단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면 한 전 총리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다.
검찰 관계자는 “한 전 총리는 우리가 조사한 내용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이라며 “현재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수사 진행이 매우 잘 되고 있다는 것 정도”라고 말해 사법처리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했다. 검찰의 이 같은 자신감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는 것이 검찰 주변의 전언이다. 검찰 소식통에 따르면 검찰은 한 전 총리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다고 한다. ‘아킬레스건’이란 다름 아닌 한 전 총리의 남편이다. 검찰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검찰이 한 전 총리의 남편에 대해 집중조사를 했다고 들었다”라며 “이 과정에서 한 전 총리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내용들을 많이 수집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이 소식통은 “검찰이 한 전 총리에 자진출두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남편에 대한 수사내용을 언급했다고 한다”며 “남편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한 전 총리에 자진출두를 권유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의 말이 사실이라면 검찰이 한 전 총리에 빅딜을 제안한 셈이다. 검찰이 박 교수의 금품수수 사실을 입증할만한 어떤 증거를 확보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박 교수를 조사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검찰의 한 관계자도 “한 전 총리와 박 교수를 조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특히 박 교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금품수수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 일부를 발견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수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검찰 빅딜설은 정치권에서도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다. 야당의 한 인사에 따르면 검찰이 찾아낸 것은 한 전 총리의 금품수수 사실이 아니라 박 교수가 금품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인사는 “청와대와 검찰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군 물망에 올라 있는 한 전 총리가 남편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고 있다”면서 “검찰은 한 전 총리를 체포해 조사를 마친 뒤 내주 중 불구속 기소하는 수순을 밟을 전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에 대해 “한 전 총리 남편에 대한 조사 여부는 밝힐 수 없다”며 “한 전 총리의 수사는 검찰의 입장이 명백하기 때문에 빅딜을 제안할 이유가 없다”고 소문을 일축했다. 검찰 주변에서 나오고 있는 빅딜설의 실체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검찰과 한 전 총리간의 묘한 신경전이 주목을 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이명박 대통령이 사회지도층 토착 비리에 대한 강력한 척결 의지를 천명했다. 이를 위한 검찰의 ‘전력투구’도 독려했다. 비리 척결은 국가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게 이 대통령 판단이다. 내년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앞둔 정부로선 국격 제고는 중요한 국정과제다. 이 대통령은 “지도층부터 공직자, 고위직, 정치(인)를 포함해 지도자급의 비리를 없애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국격을 높이기 위한 여러 사안 중 기본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회 전반에 걸쳐 고강도 사정바람이 뒤따를 것으로 관측된다.
하필이면 이 때 검찰의 기를 살려주겠다는 이 대통령의 진정성에 대해 “일반론을 말한 것이지 한 전 총리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는 것이 청와대의 대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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