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단위를 낮추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변경)이 또다시 논란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정부 부처는 물론 정치권, 학계 할 것 없이 찬성측과 반대측으로 나뉘어 저마다 논리를 내세우느라 정신없다. 현재 리디노미네이션을 주장하는 중심 세력인 한국은행은 화폐단위변경을 검토 할 때가 됐다는 기본 입장에서 변함이 없다. 지난 62년 화폐개혁 이후 40년간의 물가상승, 국제통화와의 교환비율 등을 감안할 때 시기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리디노미네이션 필요성이 제기돼온 것은 사실 오래 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문제로 시끄럽지 않았던 것은 한국은행이 중기과제로 검토해 온 정도였기 때문. 그러나 최근 정치권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본격적인 논란이 시작됐다.
贊, 경제규모 확대에 따른 대외거래 효율성 및 국가 이미지 상승에 기여
反, 인플레이션에 따른 물가상승과 재산도피 위험 및 과도한 비용 수반
◈화폐개혁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근거
우선 리디노미네이션을 찬성하는 측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 경제 규모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경제규모가 수십배 커졌음에도, 아직 40년 전과 같은 화폐 단위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얘기다. 특히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커지면서ꡐ조ꡑ단위도 부족해ꡐ경ꡑ 단위가 도입돼야 할 날이 멀지 않은 터라 그 필요성이 더 절실한 것으로 얘기된다. 실제로 한국은 OECD 국가 사이에서 화폐 단위가 가장 높은 나라다.
이외에도 통계작성의 편리성, 대외거래의 효율성, 국가 이미지 상승 등이 찬성의 근거로 꼽힌다. 0을 3개만 떼어내도 회계처리나 통계작성이 크게 간단해진다. 또 선진국에 비해 화폐 단위가 높다보니 상대적으로 후진국 이미지를 풍기고 있기도 하다.
반면 부작용에 대해 우려하며 반대하는 측의 근거는 뭘까. 일단 화폐단위 자체를 평가절하할 경우 물가가 뛸 가능성이 크다. 2000만원짜리 차 값을 2200만원으로 올리면 크게 오른 것 같지만, 2만원짜리를 2만2000원으로 인상하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때문에 업체들이 가격 인상에 더욱 적극적이 될 수 있고 자연스레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소비 위축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화폐단위가 낮아지면 상대적으로 자산가치가 저평가 된 것으로 인식된다.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1억원짜리 집이 졸지에 10만원이 돼버리면, 자산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한 집주인들이 소비를 줄일 가능성이 있다. 이는 결국 소비위축으로 이어져 가뜩이나 어려운 내수경기를 더욱 침체시키는 요인이 되리라는 예측이다.
각종 부대비용도 만만찮다. 기업들은 회계 프로그램은 물론 지급결제시스템 등을 모두 바꿔야 한다. 일각에서는 Y2K에 버금가는 비용 부담이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내다본다. 새로운 화폐의 제조, 현금입출금기와 자동판매기 교체 등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할 전망이다.
지금껏 화폐단위변경을 실시했던 국가들이 대부분 살인적인 인플레를 경험한 나라들이었다는 점에서 국가 이미지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50년대, 60년대 화폐개혁을 경험한 세대들의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한 등의 국민정서도 걸림돌이다.
변경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요즘처럼 경제불안이 심각한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이 혼란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역할만 하게 되리라는 이유다.
◈정치권의 폭넓은 긍정적 공감대
화폐개혁에 대한 17대 국회의원 설문조사는 응답자 10명 중 7.7명이 고액권 발행이나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고 밝혀 이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확산됐음을 보여준다. 화폐개혁 논의가 국가보안법과거사 등 여야 갈등이 첨예한 사안 때문에 우선 순위에서 밀려 있지만 필요성 인식은 확실한 셈이다.
우선 화폐개혁이란 화두를 던진 정치권은 고액권 발행에 압도적인 손을 들어줬다. 응답 의원 167명 중 65.9%가 고액권 발행 필요성에 동감했다. 민주당 김효석 의원이 대표적으로 주장한ꡐ고액권 발행보다는 리디노미네이션 실시ꡑ의견은 10.8%에 그쳤다.
고액권 발행은 1~2종(5만원권10만원권)의 화폐를 추가하는 것이어서 혼란없이 추진할 수 있지만 리디노미네이션은 경제사회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는 리디노미네이션에 무게중심을 두는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의 견해와는 다소 다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고액권 발행이나 리디노미네이션을 포함한 화폐개혁을 서두를 필요가 없고 현행 제도를 당분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23.3%를 차지했다. 현재 경기침체가 극심한 상태에서 경제혼란을 초래할 수 있고 고액권 발행에 따른 물가불안이나 뇌물 고액화 등의 우려가 곁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정당별로는 열린우리당이 고액권 발행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응답자 7명 전원이 현행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열린우리당 응답자 88명 중 고액권 발행 찬성이 72.7%를 차지했고 리디노미네 이션은 14.8%, 현행 제도 유지는 12.5% 순으로 조사됐다.
정치권에서 화폐개혁이 공론화하면서 여러 의견이 도출되자 최근 열린우리당 박영선 원내부대표가 ꡒ더 이상의 논의는 없다ꡓ고 못을 박았지만 열린우리당 의원의 87.5%가 화폐개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한나라당은 64.6%가 고액권 발행에 찬성했지만 현행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도 32.3%에 달했다. 이는 경제위기론을 부각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도 배경에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한나라당 유승민 김재원 의원은 최근 예결특위에서ꡒ경제가 어려운데 고액권 발행이나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할 시점이냐ꡓ고 대정부 질의를 한 바 있다. 민주당은 대표적인ꡐ리디노미네이션ꡑ주창자인 김효석 의원의 견해에 동감한 듯 응답자 4명 중 3명이 리디노미네이션을 선택했다. 현재 국회에선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이 5만원10만원권 발행을 위한 화폐기본법 제정안을 제출한 상태다.
◈한은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액면변경)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물가불안을 촉발시키는 것은 아닌가, 돈이 부동산이나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은 아닌가, 너무 큰 비용이 드는 것은 아닌가. 정부․학계 일각의 반대와 일반인들의 불안감에도 불구, 리디노미네이션 연구를 끝낸 한국은행과 시행찬성론자들은 부작용보다 실익이 크다는 입장이다.
▲쟁점1 인플레이션=1,000원을 1원으로 낮추는 리디노미네이션이 단행된다면 1,800원짜리 라면 한 그릇 값이 1.8원으로 바뀐다. 이 때 라면가게에선 정직하게 1.8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격을 2원으로 올릴 공산이 높아, 전체 소비자물가가 인상된다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이헌재 부총리 역시ꡒ물가문제가 걱정된다ꡓ고 밝혔다.
하지만 한은은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할 경우 미국의 센트처럼ꡐ원ꡑ아래ꡐ전ꡑ단위가 새로 생기기 때문에, 이런 식의 물가상승은 없을 것이란 입장이다.ꡐ전ꡑ단위 동전이 사용되는 만큼, 제조업체나 상인들이 가격 우수리를 반올림하는 식의 얄팍한 행위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ꡒ유로화 도입 당시 유럽국가들은 자국화폐와 유로화간 교환비율이 소수점이하로 복잡했기 때문에 일부 가격의 우수리를 반올림하는 현상이 나타났지만 우리나라는 100대1이나 1,000대1의 단순한 비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ꡓ고 말했다.
▲쟁점2 재산도피=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재산노출 우려로 인해 현금자산가들이 돈을 부동산에 묻어두거나 해외로 빼돌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ꡒ60년대 화폐개혁을 경험했던 고령자산가들은 이 부분에 대한 불안감이 적지 않다ꡓ고 말했다. 하지만 리디노메이션은 일정기간, 일정한도까지만 신권교환을 허용했던 과거 화폐개혁과는 다르다.
한은 관계자는ꡒ누가 얼마를 바꾸든 신원은 묻지 않는 만큼 걱정할 이유는 없다ꡓ며ꡒ시중은행 창구를 통한 교환기간은 1년 정도 제한되겠지만 그 기간이 지나더라도 한은 창구에선 언제든 교환이 가능하다ꡓ고 설명했다.
▲쟁점3 과도한 비용=리디노미네이션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발권비용 뿐 아니라 현금자동입출금기(ATM)와 각종 자동판매기, 금융기관 회계프로그램, 하다 못해 음식점 금전등록기나 문방구에서 파는 장부까지 고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관계당국 분석에 따르면 새로운 화폐를 찍어내는데 2,500억원, ATM 및 자동판매기의 화폐인식센서 교체에 5,000억원 등 전체 비용은 2조6,000억원대로 추산됐다.
과연 경제가 어렵고 급한 현안이 산적한 지금 상황에서 굳이 급하지도 않은 리디노미네이션에 이런 돈을 쏟아 부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찬성론자들은 리디노미네이션으로 5조원 이상의 경제적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매년 10만원권 자기앞수표 발행관리비용으로 6,000억원이 들어가는 점을 감안할 때 리디노미네이션 시행후 5년이면 3조원이상의 경비절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은측은ꡒ준비기간만 3년이상 걸리는 만큼 그 사이에 ATM이나 컴퓨터프로그램은 어차피 교체수요가 생긴다ꡓ며ꡒ위조지폐 방지 등 사회적 효과까지 감안하면 비용 이상의 실익을 거둘 수 있다ꡓ고 말했다.
◈전문가들ꡒ지금은 때가 아니다ꡓ
상당수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화폐단위 변경을 논의할 수 있지만 내수침체와 물가불안이 심각한 최근의 경제상황에서 성급한 공론화는 경제주체들의 혼란과 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문가들도 장기적으로 화폐단위를 변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긴급하거나 절실하지도 않고, 물가불안 등 부작용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중히 다뤄야할 정책을 경기가 극도로 침체된 현재 시점에서 공론화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홍기택(洪起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ꡒ화폐단위를 바꾼다고 동해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오느냐ꡓ고 반문한 뒤ꡒ지금처럼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정부가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화폐개혁을 해도 국민의 심리적 불안감이 가중될 것ꡓ이라고 비판했다.
최공필(崔公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중요한 경제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이런 문제를 공론화할 만큼 우리가 한가한지 의문"이라며"일고의 가치도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1973년 1만원권이 발행된 이후 한국경제 규모가 100배 이상 커진 만큼 1만원권만으로 거래하기에는 불편이 따른다"며"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고액권 발행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화폐 바꾸면 부동산 거래동향은?
화폐개혁이 되면 부동산값은 어떻게 될까. 화폐개혁을 둘러싼 논란이 부동산 시장으로 옮겨 붙을 조짐이다. 아직 정책 방향이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부동산 중개업소와 인터넷 사이트 등에는 관련 문의가 부쩍 늘었다. 그만큼 실물 자산의 대표격인 부동산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값 상승에 호재가 된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외국의 사례 등을 미뤄볼 때 시장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요즘 거론되는 화폐개혁 방식은 리디노미네이션. 돈의 실질가치는 그대로 두고, 화폐 단위를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바꾸는 것이다. 신한은행 고준석 부동산재테크팀장은ꡒ화폐개혁에 대한 고객들의 관심이 의외로 크다ꡓ며ꡒ화폐개혁이 현실화할 경우의 부동산시장 향방과 투자 방식을 주로 묻는다ꡓ고 전했다.
◈부동산 시장에 호재(?)=부동산 전문가들은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부동산의 선호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데 무게를 둔다. 이들은ꡐ화폐환상(money illusion)ꡑ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돈의 가치가 낮게 느껴지는 착시현상을 통해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실제보다 부풀려진다는 경제이론이다.
건국대 부동산학과 조주현 교수는ꡒ합리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부동산이 싸게 보여 구매 심리가 발동할 수 있다ꡓ며ꡒ제한적이나마 부동산 시장에 돈이 유입되는 효과가 있을 것ꡓ이라고 전망했다.
부동산값 상승에 대한 부담감이 무뎌질 것이란 주장도 있다. 예컨대 1000분의 1로 화폐 단위가 낮아졌다면 3억원짜리 아파트가 3억5000만원으로 오르는 것보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30만원이 된 아파트가 35만원으로 뛸 경우 겉보기에는 심리적 부담이 작다는 것.
KTB자산운용 안홍빈 부동산팀장은ꡒ주식시장의 액면 분할처럼 절대가치 변동 없이 액면가만 낮아진 종목을 투자자들이 싸다고 착각해 사들이는 현상이 부동산 시장에도 나타날 수 있다ꡓ고 지적했다.
새 화폐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개인 정보가 드러나는 것을 꺼려 부동산을 구입하는 숨은 부자들이 늘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주택주거문화연구소 김승배 소장은ꡒ1953년과 60년의 화폐개혁 때처럼 자산 노출을 기피하는 부유층이 화폐 교환 대신 부동산 투자를 통해 자산 갈아타기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ꡓ고 말했다.
◈막연한 환상은 금물=리디노미네이션을 염두에 두고 무리하게 부동산 투기에 가담할 경우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많다. 화폐개혁은 경제 사회적 파장이 워낙 커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고, 추진한다 해도 시행까지는 3~5년 이상이 걸리므로 막연한 기대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홍기택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ꡒ화폐 단위가 바뀌더라도 돈의 실질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제 규모로 보아 화폐환상에 따른 불합리한 소비행동이 부동산 시장에 나타날 가능성은 작다ꡓ고 말했다.
또 외국계 투자회사인 딜로이트FAS 부동산팀 임승옥 전무는ꡒ화폐개혁을 했던 남미, 독일 등도 부동산 시장은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ꡓ며ꡒ화폐 단위 변경보다 부동산 시장 내부의 수급 상황이나 정책 변수에 따라 가격이 결정될 것ꡓ이라고 진단했다.
부동산값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박사는ꡒ화폐환상이 거꾸로 작용할 경우 돈의 가치가 오히려 낮게 느껴져 부동산 가치가 동반 하락할 수도 있다ꡓ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할 경우 부동산 규제가 더 강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주택산업연구원 권주안 박사는ꡒ장기적으로 보유세 등 세금 증가와 부동산 전산망 정비로 투기요인이 줄어들어 화폐개혁에 따른 부동산값 상승은 현실화하기 어렵다ꡓ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