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 첫 비행성공, 하늘의 길이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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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형제 첫 비행성공, 하늘의 길이 열리다
  • 신혜영 기자
  • 승인 2009.12.0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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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106년, 인간의 오랜 꿈을 실현시킨 ‘플라이어 1호’

1903년 라이트 형제, 첫 비행 성공 쾌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키티호크 해변에서 비행 준비를 하는 오빌과 윌버 라이트 형제.
1900년과 이듬해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키티호크에서 2회에 걸쳐 글라이더 시험비행을 하였다. 그 후 데이턴에서 비행기의 과학적 연구에 착수, 모형으로 200회 이상, 1902년 키티호크에서 1,000회에 이르는 글라이더 시험비행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데이턴에 돌아와 형제가 직접 만든 가솔린기관을 기체에 장치한 결과 드디어 1903년 12월17일 10시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해안에서 인류 최초의 비행기가 이룩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기 전까지 비행은 인류에게 오랜 꿈이었다.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하던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1~1948) 형제는 독일의 릴리엔탈이 글라이더 시험 중 1896년 추락사 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항공에 흥미를 가져 비행기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가솔린기관을 기체에 장치하고 두개의 날개를 가진 동력비행기를 완성했다.
‘플라이어 1호’는 엔진이 달린 무미익복엽기(無尾翼複葉機)로 처음 비행은 오빌의 조종으로 12초간 36m를 날았고, 두 번째 비행은 59초 동안 243.84m를 비행하였다. 그리고 1904년 허프먼 프레리에서 45분 동안 비행하였고, 상하 좌우로 조종하는 문제도 해결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05년 플라이어 3호가 38분 동안 45km 비행에 성공하면서부터다. ‘플라이어 3호’는 4기통 13마력의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로 풍동 실험을 거쳐 활공하기 좋게 설계한 날개, 날개의 앞부분을 상하로 움직일 수 있는 승강키, 비행기가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수직 테일핀을 단 방향키 등을 갖춤으로써 마음대로 하늘을 날 수 있었다. 이후 비행기는 라이트 형제의 성공을 시점으로 끊임없이 개발되어 1909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블레리오가 3기통 엔진을 부착한 비행기를 타고 34㎞의 도버해협을 34분 만에 횡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비행기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민간항공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라이트 형제는 기체와 기관의 제작에만 전념하면서 그들의 비행기 개발을 원조해 주도록 여러 나라에 호소함으로써 1908년 마침내 미국 연방정부는 그들의 비행기 1대를 구입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에서는 그들이 설계한 비행기를 조립하겠다는 회사가 나타나 이듬해 아메리칸 라이트 비행기 제작회사를 설립, 유럽에서의 비행기 제작에 선진적인 역할을 하였다. 형인 윌버 라이트가 죽은 뒤 동생인 오빌 라이트가 사장직을 이어받고, 1924년 하익(下翼)을 발명하였다. 데이턴에는 이 형제의 이름에서 딴 미국공군의 라이트 연구소가 있다.

1884년, 개화파 인사들의 개혁 단행 정변 ‘갑신정변’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출신 지식인과 양반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바로 개화파다. 당시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의 양반 출신 청년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오경석·유홍기(본명 劉大致)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를 통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운동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의 근대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특히 1880년 이래 조선정부의 해외시찰정책, 즉 일본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의 파견, 청으로의 영선사 파견 등에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흐름과 새로운 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특히 1883년 8월 박영효는 외무아문 아래 박문국을 설치하여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해 나라 안팎의 정세에 관한 소식은 물론, 구미의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의 우월성 등 그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선전하였다. 그런데 민씨정권이 부분적인 개화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이들은 성공적으로 개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으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변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1884년 12월4일 갑신년에 일어난 사건인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이들을 공격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 결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으로 도망치고 홍영식은 청나라 군대에게 목숨을 잃었다. 김옥균은 이로부터 10년 뒤 청나라에서 피살당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데 있었다. 이들은 농민이나 상인들에게 개화가 왜 필요한지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다. 또 일본의 힘을 빌리려 한 것도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개혁운동으로 신분 제도의 폐지와 왕이 아닌 의정부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며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 채택
유엔총회는 1948년 12월10일 유엔 제3차 총회에서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방파제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범죄가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채택된 이 선언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상세히 진술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한 인권과 근본적인 자유가 모든 사람과 모든 장소에서 적용된다는 내용을 세계 최초로 인정한 것이다.
이 선언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1948년 당시 58개 유엔 회원국은 상이한 경제발 전 단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체제와 종교,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각 지역에서 온 선언의 성안자들은 초안의 내용이 서로 다른 문화를 반영하면서 세계의 주요 법체계, 종교적·철학적 전통에 내재된 공통의 가치를 결합하는 것으로 만들기를 바랐다. 무엇보다도 이 선언은 더욱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라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을 위한 공동 의 선언이 돼야 했다.
그 노력의 결실은 이 선언이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됐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오늘날 약 25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된 이 선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권 문서다. 국제 인권법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이 선언은 수많은 국제조약과 선언의 모델이 되고, 여러 나라의 헌법과 법률에 수용되었다. 이 선언은 인권을 증진하고 보호하기 위해 법적 구속력이 있으며 포괄적인 조약체계를 구성하는 60개 이상의 국제인권규범을 고무시켰다.
세계인권선언은 명확하고 간결한 전문과 본문 30개 조항으로 다양한 인권 영역을 다루고 있다. 인권선언 작성에 크게 기여한 엘리노아 루스벨트 여사가 인권선언의 채택을 선포했고 세계인권선언에는 정치적·시민적 자유보장과 경제적·사회적 생존권 보호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이 규정됐다.
제1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이다. 제2조 차별은 안 돼. 제3조 안심하고 살아간다. 제4조 노예는 없다. 제5조 고문이나 모욕은 싫다. 제6조 법의 보호를 받는다. 제7조 법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제8조 억울할 때는 법의 도움을 청하라. 제9조 제멋대로 잡아 가둘 수 없다. 제10조 재판은 공정하게. 제11조 잡혀도 반드시 유죄라고 볼 수 없다. 제12조 나만의 세상을 가질 수 있다. 제13조 떠나고 돌아올 수 있다. 제14조 도망치는 것도 권리다. 제15조 어느 나라 사람이든 될 수 있다. 제16조 사랑하는 사람끼리, 제17조 재산을 갖는다. 제18조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제19조 표현하는 것도 자유다. 제20조 모일 수 있다. 제21조 선거할 수 있다. 제22조 사회보장제도를 누릴 수 있다. 제23조 마음 놓고 일하기 위하여, 제24조 쉬는 것도 중요하다. 제25조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제26조 배울 수 있다. 제27조 즐거운 생활, 제28조 이 선언이 바라는 세상, 제29조 우리의 의무, 제30조 권리를 짓밟을 권리는 없다.

1999년, 80년 만에 파나마 운하 반환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파나마는 번영을 누렸다. 많은 탐광자들이 대륙을 횡단하는 험한 미국 철도 대신에 캘리포니아로 가는 파나마 노정을 택했다.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건설된 파나마 철도가 1855년 개통되었으며 곧바로 콜론 시가 세워졌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경영하는 프랑스계 회사가 1879년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이권을 정부로부터 얻어냈으나 1889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1850~1900년에 40개의 행정부, 50번의 폭동, 5번의 분리 시도, 13번의 미국 간섭 등이 있었으며 20세기 초 운하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콜롬비아 상원이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연기했을 때 미국은 파나마 분리주의자의 운동을 지지했다. 1903년 11월3일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둘러싼 미국과의 분쟁을 계기로 미국의 지원을 얻어 콜롬비아로부터 분리·독립하였으나 1903년 11월6일 파나마 폭동이 일어났으며 11월18일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 운하지대의 영구 소유권을 얻어냈으며 완공된 운하는 1914년 개통되었다. 그 후 20세기 초에는 로렌소를 지도자로 한 게릴라전 등 파나마의 주권회복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한편에서는 바나나 재벌인 유나이티트 프루트사를 비롯한 미국자본의 진출이 헌저하게 늘어났다.
1964년 1월에는 운하지대의 주권회복과 미국 자본의 축출을 요구하는 폭등이 일어나 한 때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 때문에 운하수입이 줄어 든 데다 외국자본이 철수함으로써 실업의 증가, 노이헙생산의 후퇴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야기되었다. 이어 1968년 10월에는 대령 오마르 토리호스가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나 군정을 폈으며, 운하·운하지대에 대한 주권회복을 목표로 한 교섭을 벌인 끝에 1977년 9월 신파나마 운하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1999년 12월31일 미국이 관리해 오던 파나마 운하의 역사적인 공식 반환식이 열렸다. 이에 따라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길이 81.6㎞의 운하의 관리권이 파나마 정부로 공식 이양됐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1914년에 완공한 뒤 80여 년 동안 관리권을 행사해 왔다. 미국 정부는 파나마 정부의 줄기찬 반환 요구에 따라 지난 1977년 체결한 협약에서 2000년이 되기 전까지 반환을 완료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경계 가까이 있는 파나마해협을 횡단하는 운하는 길이 67.5㎞, 너비 150m로 태평양과 카리브해가 연결되어 국제해운에 대단히 중요하다. 운송량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제2운하 건설이 검토되고 있다. 운하와 그 양쪽의 너비 각 8㎞의 운하지대에 대해서는 미국이 영구조차권을 가지고 운영해왔으나, 1977년 미국과 파나마 사이에 신파나마조약이 조인되어 2000년부터 단계적으로 파나마에 반환하게 되었다. 3단의 갑문식이다. 통과 가능 선박은 7만t 미만이고, 1일 교통 가능량은 36척이다. 통과 소요시간은 8시간이다.

1999년 마카오 442년 만에 반환
마카오 반환은 포르투갈이 1999년 12월20일에 442년 만에 식민지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한 일이다. 이로써 명나라 말부터 이어져 내려온 포르투갈의 마카오 식민통치는 종식되고, 1국 2체제 하의 ‘마카오 차이나’ 시대가 개막됐다. 영국이 홍콩을 1997년에 반환한 뒤, 유럽의 마지막 아시아 식민지였던 마카오의 반환으로 서구 열강의 아시아 식민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중국 광둥 성의 주장 삼각주 남단에 위치한 마카오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1557년 해적을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나라 황제로부터 ‘하사’ 받아 건설됐다. 1887년 정식 식민지로 편입했고, 1951년 포르투갈 새 헌법에 따라 ‘해외주(州)’가 된 후 본국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를 받았으며 1973년 ‘자치령’이 됐다. 포르투갈이 중국에 마카오 반환 용의를 처음 표명한 것은 1974년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사회주의 혁명(카네이션 혁명)을 겪고 나서였다. 이후 양국은 1979년 외교관계 수립에 이어 1987년에 마카오 반환협정에 서명했다.
마카오 주권교체식은 1999년 12월19일 밤 11시 35분부터 12월20일 0시16분까지 지마카오 외항 신전해(新塡海)구 문화센터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식장에서 세계 60개국 귀빈 2,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주권교체식장에 나타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의 자세는 당당해 보였다. 드디어 20일 0시, 주권반환 기념식장에서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과 조르제 삼파이유 포르투갈 대통령 등 양국 고위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포르투갈 국기가 내려지고 중국의 오성홍기가 게양됐다. 마카오는 본토와의 일국양제(一國兩制) 합의에 따라 50년간 자치권을 행사하게 됐다. 중국은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된 마카오는 홍콩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결합된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원칙에 따라 중국 정부가 행사하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50년 동안 자치권을 누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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