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게 도적질이니 죽을 때까지 해야지!
트위스트김하면 항상 청바지에 은목걸이를 걸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걷는 반항아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의 나이가 벌써 65세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42년의 연기생활동안 51kg의 몸무게를 유지하며 그 허스키한 목소리도 모두 그대로인데 말이다. 40년 전 영화에서 잠깐 흘러나온 트위스트 춤을 익히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가서 따라해 보던 젊은 시절의 그가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조선호텔 앞 경남극장 오래된 화장실에 거울 앞에서 조금 전에 본 동작을 잊어버릴까 열심히 따라해 보았다. 트위스트 춤이 유행이던 당시 오로지 춤을 익히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그의 의지와 노력이 오늘날의 트위스트 김을 만든 것이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배우 전의 인생
배우 트위스트김 아니 김한섭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고향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에게는 부산 사투리가 간간히 섞여 나오고 있다. 당시만 해도 들어가기가 힘들었다던 부산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똑똑하고 귀한 외동아들로 집안의 기대를 받아오며 성장했다. 국제신문 야구협회 이사였던 아버지와 면장 딸인 어머니를 둔 다복한 가정에서 자라던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뜬 어머니와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보며 차츰 비뚤어진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부산지역에서 알아주는 깡패가 되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고, 그때 그의 인생은 배우일 때보다 더 극적일 것이다. 트위스트김은 부산 칠성파라는 조직에 있던 중 사형 당한 임화수, 이정재, 한필국이 불러서 밀수를 시켰고, 스물한살 때는 밀수에 가담하고 5.16쿠테타가 터지면서 그는 경찰을 피해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배우생활 초기에 그의 이름이 수배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점만 봐도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짐작된다.
맨발 하나만 가지고 영화계 입문
부산에서 처음 서울로 올라와 배우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그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6개월만에 겨우 신 필름에 들어갔는데, 그 곳엔 모두 잘생기고 체격 좋은 돈많은 배우들이 수두룩했다. 5․60년대 배고프고 힘든 청․장년기 시절을 보내며 추운 겨울, 보리차를 끓이고 남은 찌꺼기로 주린 배를 채우던 그가 드디어 ‘맨발의 청춘’ 영화를 통해 영화계에 입문한 것이다. 인산인해를 이룬 개봉날 극장 안에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그는 그 후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암울했던 80년대가 다가왔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그의 배우로서의 길도 힘을 다했던 시기다. 배우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잊혀져 간다는 걸 경험한 것이다.
“배우로 늙어 죽겠다”
영화․운동. 이 두 가지를 빼면 그의 인생은 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매달렸다. “배우로 평생 늙어 죽겠다”는 말에서 배우의 길이 곧 자신의 인생자체라고 여겨온 그의 인생철학이 느껴진다. 이런 그의 인생철학이 트위스트김을 앞으로도 RP속 그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되고, 그가 40년 넘게 배우로 살아올 수 있었던 엄청난 저력의 근원지가 된 것이다.
트위스트김하면 항상 청바지에 은목걸이를 걸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걷는 반항아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의 나이가 벌써 65세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42년의 연기생활동안 51kg의 몸무게를 유지하며 그 허스키한 목소리도 모두 그대로인데 말이다. 40년 전 영화에서 잠깐 흘러나온 트위스트 춤을 익히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가서 따라해 보던 젊은 시절의 그가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조선호텔 앞 경남극장 오래된 화장실에 거울 앞에서 조금 전에 본 동작을 잊어버릴까 열심히 따라해 보았다. 트위스트 춤이 유행이던 당시 오로지 춤을 익히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그의 의지와 노력이 오늘날의 트위스트 김을 만든 것이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배우 전의 인생
배우 트위스트김 아니 김한섭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고향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에게는 부산 사투리가 간간히 섞여 나오고 있다. 당시만 해도 들어가기가 힘들었다던 부산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똑똑하고 귀한 외동아들로 집안의 기대를 받아오며 성장했다. 국제신문 야구협회 이사였던 아버지와 면장 딸인 어머니를 둔 다복한 가정에서 자라던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뜬 어머니와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보며 차츰 비뚤어진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부산지역에서 알아주는 깡패가 되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고, 그때 그의 인생은 배우일 때보다 더 극적일 것이다. 트위스트김은 부산 칠성파라는 조직에 있던 중 사형 당한 임화수, 이정재, 한필국이 불러서 밀수를 시켰고, 스물한살 때는 밀수에 가담하고 5.16쿠테타가 터지면서 그는 경찰을 피해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배우생활 초기에 그의 이름이 수배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점만 봐도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짐작된다.
맨발 하나만 가지고 영화계 입문
부산에서 처음 서울로 올라와 배우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그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6개월만에 겨우 신 필름에 들어갔는데, 그 곳엔 모두 잘생기고 체격 좋은 돈많은 배우들이 수두룩했다. 5․60년대 배고프고 힘든 청․장년기 시절을 보내며 추운 겨울, 보리차를 끓이고 남은 찌꺼기로 주린 배를 채우던 그가 드디어 ‘맨발의 청춘’ 영화를 통해 영화계에 입문한 것이다. 인산인해를 이룬 개봉날 극장 안에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그는 그 후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암울했던 80년대가 다가왔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그의 배우로서의 길도 힘을 다했던 시기다. 배우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잊혀져 간다는 걸 경험한 것이다.
“배우로 늙어 죽겠다”
영화․운동. 이 두 가지를 빼면 그의 인생은 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매달렸다. “배우로 평생 늙어 죽겠다”는 말에서 배우의 길이 곧 자신의 인생자체라고 여겨온 그의 인생철학이 느껴진다. 이런 그의 인생철학이 트위스트김을 앞으로도 RP속 그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되고, 그가 40년 넘게 배우로 살아올 수 있었던 엄청난 저력의 근원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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